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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67화 (1,057/1,794)

템빨 55권 - 17화

단일 검무 중에서 초(超)가 요구하는 동작은 매우 크다.

초월적인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선 동작에 기세와 위엄이 담겨야했는데, 단지 보폭을 넓히는 수준으로는 표현이 힘들었고 과장된 몸짓이 동반돼야했던 것이다.

그리드가 초연살극(超聯殺極)을 애용하지 못했던 이유다.

만약 연살극이었다면 휘몰아치는 연에 찌르는 살과 베는 극을 자연히 싣는 검무가 되어 사용이 편리했겠지만, 위력을 극대화시키고자 초를 전제로 삼아 만든 초연살극은 필연적인 딜레이가 동반됐다.

긴박한 전투일수록 사용 타이밍을 잡기 까다로운 검무라는 뜻.

하지만 신격의 힘을 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연살극!”

아무런 딜레이 없이 연속 전개 되는 4융합 검무.

그 위력은 이미 주작의 기운을 활성화시켜서 회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던 가람에게도 위협을 안길 정도였다.

“놈....! 쿨럭? 쿨럭!!”

최초의 초연살극을 손쉽게 막아내고, 2회째 초연살극은 간신히 흘려내고, 3회째 초연살극에 이르러서는 버티지 못해 베이며 멀찍이 튕겨져 나갔던 가람.

곧바로 청룡의 기운을 활성화시켜서 돌진했던 그가 그리드와 다시 충돌하자마자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오싹.

가람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기습적으로 날아왔던 최초의 초연살극조차 손쉽게 막아냈던 자신이 2회째 초연살극부터는 감당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부르르.

검을 쥐고 있는 오른쪽 팔이 미친 듯이 떨린다.

복부에 맹렬한 통증이 느껴져 왼손으로 훑어보니 흥건한 피가 배어나왔다.

‘회복력이 따라가질 못했다고?’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에게 수세에 몰린 것으로 모자라 깊은 상처까지 입다니.

일생 최대의 수치다.

이날의 역사를, 지워야한다.

“쿨럭, 쿨럭! 크아아아아!!”

어지럽게 회전하며 덤벼오는 갓 핸드들을 신경질적으로 쳐낸 가람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전류가 영역을 확장하더니 잿더미로 변해있는 일대에 뇌전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굴욕을 목격한 인간들을 모조리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플레이어들이 사력을 다해서 카라스의 신민들을 보호한 까닭이다.

그들의 무구와 마법이 하나의 뇌전을 막아낼 때마다 수십의 사람이 목숨을 구했고 가람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찮은, 쿨럭! 놈들이!!”

극도의 분노가 도리어 가람에게 평정심을 안겨주었다.

사신의 힘을 여러 개 동시 사용할 경우 발생하는 부하를 상기한 그가 우선 청룡의 기운을 거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기를 날려 오는 그리드의 공격마저 무형의 바람으로 무력화시킨 그는 주작의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주작의 회복능력을 최대치로 활성화시킬 의도였다.

순간.

콰르르르르르륵!

가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그리드가 화신의 폭풍을 소환했다.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장렬한 불꽃의 폭풍이었다.

폭풍으로부터 주작의 기운을 감지한 가람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크하하하핫!! 과연 미물답게 어리석구나!!”

주작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주작의 불꽃이 강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생명력.

활용하기에 따라서 이롭게 작용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마침 주작의 기운을 활성화시킨 가람에겐 아주 맛 좋은 먹잇감이었다.

‘내가 먹어치워 주마!’

가람이 숨을 힘껏 들이쉬었다.

그는 그리드가 소환한 주작의 불꽃을 모조리 폐부로 흡수해 자신의 생명력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데.

‘뭣이?’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불꽃의 성질이 예상. 아니, 순리와 달랐다.

순수한 주작의 불꽃 안쪽에 거북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가람에게 지독한 살의를 표출하는 의지였다.

‘주작....! 주작인가!’

가람이 그리드가 등지고 선 불기둥을 노려봤다.

부활을 준비 중인 주작의 존재감이 강해지고 있었다.

가람이 품고 있는 주작의 숨결이 그 존재감에 동화되는 중이다.

주작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느낀 가람은 깨달았다.

다시 주작을 완전히 봉하기 전까지, 자신은 이제 주작의 기운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음을.

콰득!!

아찔한 파열음이 가람의 눈빛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불꽃을 삼켰던 가람의 폐부가 찢어지며 발생한 소리였다.

“크윽....!”

입을 악 문 가람이 호흡을 멈췄다.

숨을 내쉬는 순간 체내의 혈액이 불타오르고 심장마저 폭발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이었다.

그리고,

[<화신의 폭풍>의 영향을 받고 있던 대상이 회복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화신의 분노> 효과로 대상에게 1만 5천의 고정된 피해와 치유 효과 반전의 저주를 걸었습니다.]

알림창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회복하지 못한 가람과 달리 물약을 마셔서 상처를 회복한 그는 희망을 엿봤다.

‘가람이 화신의 폭풍의 효과를 눈치 챘어. 폭풍 안에서 놈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할 거다.’

가람이 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다니면 시간을 벌 수 있다.

화신의 폭풍을 유지하는 대가로 소모되는 마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드에게는 부조리의 반지가 있었고, 화신의 폭풍의 고유 능력 자체가 시전자를 ‘포함’한 아군의 치유 효과를 20퍼센트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화신의 폭풍을 유지하는 동안 마나 회복 물약의 효과 또한 상승한다.

물약 회복량, 쿨타임, 마나 소모량 등 모든 걸 감안했을 때 그리드는 앞으로 최소 40분 이상 화신의 폭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40분이 가람에겐 지옥이리라.

[초국의 학자들과 선비들이 주작의 부활에 박차를 가하는 중입니다.]

[주작의 부활까지 남은 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주작의 부활까지 남은 시간은 54분입니다.]

‘할 수 있어. 버틸 수 있다.’

늘 그랬듯이 그리드는 혼자가 아니다.

초왕을 비롯한 초국의 신민들 모두가 그리드와 같은 염원을 품고 주작의 부활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또한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돕는 중이다.

‘가람, 네가 걸어온 길은 잘못 됐다.’

내가 걸어온 길이야 말로 옳다.

수많은 사람들이 돕고 있는 나와 늘 혼자인 너의 차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드가 용기를 얻는 그때였다.

“감히 그딴 표정을....”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그리드와 그의 뒤편으로 솟구쳐 있는 불기둥을 번갈아가며 노려보던 가람이 도끼눈을 떴다.

치이이이익!!

가람의 몸 주변으로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물과 죽음을 관장하는 현무의 힘이 화신의 폭풍의 열기를 잠재우기 시작한 것이다.

“....!?”

이미 한 번 한결을 통해서 현무의 위력을 엿봤던 그리드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다급히 검을 세우는 그의 코앞에 불꽃을 가르며 나타난 가람이 다가와 섰다.

둥글게 말린 연검이 그리드의 뺨을 스치는 중이다.

“나는 신이다. 고작 죽음 따위로 나를 구속할 수 없다.”

쿠오오오오오!

좌우로 갈라진 불꽃의 길이 주작의 날개를 보는 듯하다.

이를 등지고 선 가람의 모습을 그 누가 신이 아니라 부정할 수 있을까.

츠카카카칵!!

그리드의 뺨을 지나면서 팽창한 연검이 그리드의 왼쪽 쇄골을 파고들었다.

“끅...!”

현무의 기운은 물건을 부식시키고 생명을 시들게 하는 독이다.

발할라를 비롯해 그리드가 자랑하는 모든 방어구의 내구력이 가람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크게 훼손 됐다.

퍼엉-!!

연검을 회수하며 회전하는 가람으로부터 발출 된 새카만 물이 그리드를 타격하며 멀찍이 날려 보낸다.

우당탕탕!

추락해 나뒹구는 그리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입가에 흐르는 피는 검어 중독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칸의 의지를 받든 그리드가 독에 완전히 저항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가람의 입 꼬리가 승천했다.

“오늘, 나는 완전해진다.”

그리드는 진짜 신의 자격을 지닌 존재다.

만약 오늘 가람이 그리드를 없애고 주작의 부활마저 막는데 성공한다면 가람은 자신이야말로 진짜 신의 자격을 가졌음을 온 누리에 증명할 수 있게 된다.

퉤.

목구멍에 또 다시 차오른 피를 뱉어낸 가람이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는, 조금 전 잠시나마 공포를 느꼈던 자신을 부정했다.

겁에 질린 자신을 목격했을 그리드의 목을 베어냄으로써 완전해지고자 준비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리드 네놈은 내게 있어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나를 완전케 할 제물.

그것이 바로 너였다.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은 가람이 곧추 세운 검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화르륵!

그리드의 몸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여러 개로 나뉘었다.

벨리알의 힘 중 <여왕의 왜곡>이 의지의 불꽃과 결합하여 전개된 것이다.

상대방의 눈과 정신을 현혹하는 훌륭한 기술이었으나,

촤르륵!

눈보다 빠르게 휘둘러진 가람의 연검이 원을 그려 그리드의 분신을 모조리 통째로 베어버렸다.

그나마 본신이 베이지 않은 것은 베리드의 힘 <자동 연성> 덕분이었다.

실시간으로 자동 생성되는 금속의 방어막이 가람의 공격력을 격감시켜준 덕분에 그리드는 치명상을 면할 수 있었다.

“정말 끈질기군.”

승기를 잡자 여유를 되찾고 있던 가람이 다시 한 번 얼굴을 구겼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그리드의 태도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차피 네놈은 나를 이길 수 없다. 한데 왜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거지? 설마 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냐?”

“....단 한 번도.”

“....?”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근데 왜....”

예상과 달리 솔직한 그리드의 고백에 흥미를 느낀 가람이 귀를 기울이다가 멈칫했다.

그는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드의 입가에 흐르는 피가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무의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고?’

죽음을 관장했던 신의 맹독을 무슨 수로 저항했단 말인가?

역시 불길한 놈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이놈, 아직도 저력이 남아있다.

가람이 초조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혜안.”

그리드가 가람의 상태를 관조했다.

“...!?”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불쾌한 감각.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오싹해진 가람이 본능적으로 검술에 변화를 실었다.

하지만 그 변화 또한 혜안이 읽은 미래의 예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콰드득-!!

공방일체의 검격.

가람의 그 비장의 한 수가 메르세데스의 힘을 등에 업은 그리드의 일격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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