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16화
4개의 왕국이 통치하는 대륙.
이곳 동대륙의 정세가 오래토록 변치 않고 유지되어온 이유는 단순하다.
4개국의 자원과 인재가 너무 풍부했다.
서대륙과 비슷한 크기의 땅을 고작 4개의 국가가 나누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4개국 전부가 꾸준한 발전을 이루며 서로를 철저히 경계하였으므로 세력구도가 바뀌기 힘들었다.
“....!”
초국 수도 카라스.
과연 초국의 병사답게 철저히 경계를 서던 외성문의 병사들이 일제히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저벅. 저벅.
신의 걸음소리가 가까워진다.
병사들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고 뒤늦게 이변을 감지한 백성들 또한 황망해하며 절을 올렸다.
“.....”
급기야 신이 성문을 넘자 일대에 적막이 깔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파로 북적거리던 대로에 작은 숨소리조차 흐르지 않았다.
양반 가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찾아온 그가 일국의 수도를 마비시킨 것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기원했다.
우리들의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어 우리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하지만 공교롭게도,
저벅. 저벅. 저벅....
가람은 민중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가람의 초월적인 시력은 저 멀리 우뚝 서있는 궁궐의 입구를 바라볼 뿐이다.
‘네놈이 그저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마.’
환국의 불문율 중 하나는 4개국의 왕족을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민간에선 적잖은 영향력을 지닌 그들이 오존과 양반들에게 두려움을 품되 공경하게끔 나름의 선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가람은 불문율을 어길 생각이었다.
먼저 선을 넘은 건 저쪽이었으니까.
‘건방진 놈.’
꽈드득.
이를 가는 가람의 곱게 빗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오늘 그는 상투를 틀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잘려나간 왼쪽 귀를 드러낼 수 없었기에.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 개자식을 비호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묵과한 초왕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
눈에 불을 켠 가람의 발걸음이 점차 더 빨라지는 그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앙!!
궁궐을 빙 둘러싼 담벼락 뒤편으로 불기둥이 솟구쳤다.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구름이 모조리 증발했고 푸르던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
가람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의 전조를 그는 일단 부정했다.
하지만 잠시 뿐이다.
그는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앞으로 가실 수 없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된 이후 여태껏 단 한 번도.
결코 단 한 번도 가람의 앞길을 가로막은 바 없던 초국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빽빽이 모여 가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심지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시선을 마주쳐왔다.
“핫....”
우민들이 밟고 선 자신의 그림자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가람이 실소를 터뜨렸다.
“미물일수록 본능에 충실하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불기둥이 솟구침과 동시에 초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불쾌한 온기의 근원을, 가람은 알고 있다.
본래 이 땅을 수호했던 사신 중 주작의 기운이다.
아주 먼 옛날 힘겹게 봉인해놨던 녀석이 다시금 태동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시오!”
경고를 무시한 가람이 계속 앞으로 전진하자 언성을 높인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쥐었다.
지난 세월 동안 양반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제사의 도구로 활용해왔던 칼과 창이 모조리 가람을 겨눴다.
초국 신민들의 유전자와 영혼에 새겨진 본능이 개화했다는 뜻이다.
주작의 태동과 함께 전파된 온기가 그들로 하여금 잊힌 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조상들이 섬겼던.
여태껏 우리들을 가호해주었던 수호신 주작의 존재를 느낀 초국 신민들은 가람이 자신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큭큭큭, 같잖은 놈들이....”
가람은 굳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졌던 신앙 중 일부가 소멸함을 느끼며.
감히 자신으로부터 등 돌린 초국의 신민들을 향해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지금부로 너희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내 천벌을 내릴지니 너희들은 멸망할지다.”
신의 말은 행해지는 것.
머잖아 신이 될 가람은 자신이 입 밖에 꺼낸 말을 되돌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화르륵!
즉시 행동에 나서는 가람의 전면으로 불꽃이 응집됐다.
주작의 기운의 응용이다.
네놈들이 떠올린 옛 신의 힘이 네놈들을 멸할 것이다....
생각하며, 잔인하게 비틀린 미소를 머금은 가람이 눈앞에서 타오르는 화염을 전면으로 쏘았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해일처럼 밀려나가는 화염의 경로에 선 모든 병사들과 백성들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불타 죽는다.
콰쾅!
콰콰콰콰쾅!!
폭발에 휩쓸려 무너지는 수십 채의 가옥과 출렁이는 대로가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한 순간에 지옥도로 변한 카라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한가운데 선 가람이 초국의 신민들에게 소리쳤다.
“인간이여! 하찮은 미물이여! 너희가 여태껏 누려온 모든 평화와 행복이 누구로부터 비롯됐는지 이제는 알겠느냐? 바로 나! 바로 나, 가람이다! 언제라도 너희를 멸할 힘을 지녔음에도 멸하지 않았음에 너희들은 살아올 수 있던 것이다!!”
“우윽....”
누군가는 숨 죽여 오열했고, 또 누군가는 참지 못해 토악질을 시작했다.
여태껏 신이라 믿어왔던 존재의 역겨운 실체를, 초국의 신민들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거 완전히 미친 새끼잖아?”
플레이어들이 이를 갈았다.
지난 며칠 동안 초국 신민들과 함께 생활한 그들은 양반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오존과 양반이라는 위대한 신들이 계시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사람들은 웃으며 말했었다.
그래서 자비로운 신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한데 실체는 전혀 달랐다.
저토록 지독한 오만과 독선이라니....
저건 신 따위가 아니다.
차라리 악마에 가깝다.
“아니면 신이라는 존재가 원래 저런 걸 수도 있잖아요?”
수군거리는 플레이어들 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헤라였다.
의원답게 병들고 힘든 자들을 마주해온 그녀는 신의 자비라고 표현할만한 기적을 목격한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다소 다른 시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 어디까지나 Satisfy의 신들을 말하는 거예요.”
분위기가 경직됐음을 느낀 헤라가 웃으며 수습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는 이미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전 월드 메시지를 떠올린 것이다.
반신을 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신의 자격을 논했던 메시지.
그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심지어 신들을 향한.
‘그리드는 신들의 실체를 알게 됐던 건가?’
Satisfy의 신들.
아니, 이곳 동대륙의 신들은 우리가 여태껏 믿고 의지해왔던 신들과 전혀 다른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드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던 것이고.
콰쾅! 쾅!!
폭발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웅장했던 카라스가 자신들이 믿었던 신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어갔다.
“....”
종말의 목격자가 된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미친 듯이 떨린다.
가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어두운 미래를 엿본 그들은 깊은 불안에 잠식되어갔다.
울부짖는 초국 신민들의 모습이 머잖아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게임 같으니.”
대악마 베리드가 로테몬 왕국을 멸망시켰을 당시.
사람들이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대악마의 악의와 살의가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신들이 나타나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나마 사람들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헛된 믿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atisfy에서 신이란 무조건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가람은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종말. 이 게임의 엔딩은 종말이야.”
왜지?
임철호 회장이 Satisfy를 만든 이유는 플레이어의 희망이나 꿈을 충족시켜주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앗....!”
혼란에 휩싸여있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두 눈을 부릅떴다.
근처에 있던 모녀가 날아오는 불덩이에 덮쳐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안 돼!”
헤라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그녀보다 먼저 모녀를 구출했다.
전사 클래스와 의원 클래스의 차이였다.
“당신 미쳤어? 대시기 하나 없는 의원 주제에 불길로 몸을 날리게?”
“사람들의 구출은 우리에게 맡기고 이 사람들을 치료해주세요.”
헤라에게 따끔하게 충고한 플레이어들이 모녀를 헤라에게 맡긴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시 전체를 구할 수는 없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정도는 돕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돕는 일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지, 그들은 베리드 레이드 당시 여러 랭커들의 모습을 보면서 배웠으니까.
“이리로! 윽!”
“제기랄!”
하지만 모든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선 그 위기를 타개할만한 능력이 필요했고, 플레이어들은 몇 번이나 실패했다.
화마에 뒤덮인 이를 살리려다가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물러나는 사람, 건물의 잔해에 깔린 이를 살리려다가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하지 못해 자신 역시 휘말린 사람 등.
고작 수백 명의 플레이어가 재앙 속에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비규환에 빠진 사람들의 귓전에 가람의 소름 돋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가치 없는 미물들아. 오늘 이곳에서 모조리 죽어라.”
화르르르르르륵!
가람을 중심으로 줄기줄기 뻗어나가던 화염의 파도가 더욱 더 거세게 불타오르자 장관이 펼쳐졌다.
카라스 전역을 뒤덮을 기세의 화염의 바다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적해가 불로 변한 듯한 광경이었다.
“아.... 으아아....”
플레이어들과 초국 신민들 모두가 절망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희망을 엿보지 못했다.
헤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궁궐에서 제조한 탕약과 상처 입은 모녀를 품에 꼭 끌어안은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 다 죽고 말 거야.’
지금쯤 이변을 눈치 챘을 켄트릭 님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가길 바랄 뿐이다....
생각하는 헤라의 피부가 점차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때였다.
“가치 없는 미물? 이들의 신앙으로 연명해온 네가 무슨 염치로 이들을 무시하는 거지?”
하늘에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화염의 포효를 억누를 정도로 묵직한 음성이었다.
“서, 설마?”
깜짝 놀란 헤라와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파직!
전광의 잔재가 보였다.
이어서.
“이십만대군 분쇄검.”
단 한 번의 참격을 통해서 전파된 거대한 의지가 도시를 뒤덮어가고 있던 불바다를 단번에 소멸시켰다.
“아....”
헤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보았다.
신이 일으킨 불바다를 소멸시킨 대가로 피를 토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흑금색의 손들에게 자신의 축 늘어진 어깨를 지탱하라 이르며 지상에 내린 그는,
“신격.”
신에 맞서고자 신이 되었다.
“초연살극(超聯殺極).”
“그리드으으으!!”
투쾅-!
투콰콰콰콰콰쾅!!
별과 별의 충돌을 보는 듯하다.
유성과도 같은 기세를 담은 그리드의 연격을 가람이 창으로 막아낼 때마다 세계가 격동했다.
“아, 안 돼!!”
플레이어들이 절규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그리드가 검무의 모든 동작을 끝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검을 풀어 휘두르는 가람의 모습을 보고 그리드의 패배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틀렸다.
그리드의 검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연살극!”
“....!?”
“초연살그윽!!”
“컥....!”
투쾅-!
쿠콰콰콰콰콰쾅!!
그리드의 맹공을 충분히 버티는가 싶던 가람이 차츰 수세에 몰리더니 급기야 견디지 못하고 날아갔다.
자신이 불태웠던 가옥을 몇 채나 꿰뚫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 선 그의 충혈 된 두 눈은 이제 오직 그리드만을 쫓고 있었다.
“네놈! 네노옴!!”
파직!
청룡의 기운을 전개, 육신에 전광을 두른 가람이 빛살처럼 쏘아져 그리드에게 달려든다.
다시금 격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헤라와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틈에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죠!”
“좋소! 궁궐로 갑시다!”
자신의 꿈과 희망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다.
타인에게 의지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드의 모습을 보고 배운 플레이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렸다.
Satisfy의 엔딩이 종말이라고?
아니, 우리가 바꿀 수 있다.
임철호 회장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서둘러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등에 업은 헤라와 플레이어들이 온 힘을 다해서 내달렸다.
이 와중에도 가람을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어떻게든 베어 쓰러뜨렸다.
그리드가 그렇듯 그들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