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14화
“이거야 원 초보자가 된 심정이네.”
“그러게. 이런 무력감을 느껴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동대륙의 난이도는 소문 이상이었다.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해서 찾아왔건만 하루도 순탄할 날이 없었다.
새로운 무대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리라던 각오가 흩어지기 직전이다.
“퀘스트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너무 높아. 집 앞의 밭을 해치는 요괴를 잡아달라기에 코볼트 정도의 상대일 줄 알았더니 웬 사이클롭스 같은 놈들이 튀어나왔다고.”
“퀘스트 난이도가 높기보다는 몬스터의 수준이 높은 거겠지. 이곳에서는 농부들의 골치나 썩이는 초급 몬스터의 레벨도 300을 훌쩍 넘기니까.”
“맞아. 당분간은 퀘스트를 가려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전투가 발생할 수 있는 퀘스트는 자제하고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차츰 분위기에 적응해나가자. 정보를 모을수록 몬스터 대처법도 생길 테니 그 편이 현명해 보여.”
“어제 어떤 랭커가 너랑 똑같은 말을 했지. 그리고 장작 패기 퀘스트를 받더니 얼마 안 가 죽더라.”
“...?”
“그 양반, 장작 패다가 죽었어.”
“...??”
“나무가 폭발하더라고.”
“....그리드도 포기했던 이유가 있네.”
그리드가 동대륙을 왔다 간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실로 많은 정황들이 그리드의 동대륙 방문 이력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드의 업적을 칭송할 판게아의 주민들은 비록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리드가 이곳에서 적잖은 활약을 펼쳤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엔 그리드도 한동안 잠잠했다.
서대륙으로 되돌아갔던 그는 몇 년이 지나도록 동대륙을 다시 찾지 않았다.-이들이 알기로는 그렇다.-
그가 며칠 전 쓴 서사시의 무대가 동대륙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드도 몇 년 동안은 이곳을 포기했었다는 뜻이다.
“....”
“....”
며칠 째 죽만 쓰다가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하던 플레이어들이 숙연해졌다.
그리드조차 몇 년 동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 땅에서 고작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 섣불리 찾아온 듯하다.
짙은 후회가 플레이어들을 엄습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고 분위기는 이내 반전됐다.
“...우리 힘 내보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지. 이 악물고 버티다가 작은 업적이라도 세워보자고.”
“아니, 아예 몇 년 동안 머물면서 끝장을 보자! 우리가 그리드도 못해낸 일을 해내고 그리드를 따라잡는 거야!”
“우오오오!!”
동대륙을 찾아올 정도면 보통 수준은 넘는다는 뜻이다.
동대륙의 난이도를 체험한 플레이어들은 절망하기보다 더 큰 의욕을 불살랐다.
그리드도 넘지 못했던 시련을 자신들이 이겨내면 반드시 큰 보상을 얻으리라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모든 플레이어의 목표인 그리드를 따라잡을 토대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를, 이들은 엿봤다.
“냇가에서 빨래 해오기? 오케이! 수락!”
“딸기밭에서 하루 동안 딸기 수확? 좋아, 난 이거!”
“소꿉친구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라.... 후후훗, 낭만적이군. 오늘의 내 역할은 사랑의 큐피드인가.”
“뒤, 뒷산에서 자, 장작을 패오라고? 힉! 노! 패스!”
초국 경제의 중심답게 항상 일손이 부족한 카라스에 오래간만에 활기가 돌았다.
나름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온갖 잡일을 도맡았으니 카라스의 백성들에게 적잖은 도움이 된 것이다.
“....동대륙까지 와서 뭣들 하는 거지?”
의원 헤라.
켄트릭이라는 기연을 만난 덕분에 무사히 카라스에 도착할 수 있었던 그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곳곳에서 목격되는 플레이어들이 하나 같이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할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질풍의 레인저 열중샷.
도미니언 왕국의 사냥개 홀터.
원형 십자수의 달인 케이시 등등.
명망 높은 랭커들, 그리고 아직 랭커는 아니지만 커뮤니티에서 꽤 유명한 각 분야의 유망주들이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을 잡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 황당했다.
‘동대륙까지 힘들게 넘어와 놓고 왜 굳이 저런 일들을....?’
뭐, 어떤 연계 퀘스트라도 받았나보다.
깊이 생각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진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헤라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끊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에 집중했다.
선천적인 질병 탓에 단 1분도 편한 날 없었던 소년과, 자식을 건강히 낳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의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의뢰인의 정체가 수상하기는 했다.
그토록 아들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이 신전이나 의원이 있는 도시에서 살지 않고 인적 하나 없는 폐허에서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점.
만병을 고친다는 ‘성녀’의 명성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녀에게는 접촉해볼 생각조차 않는다는 점 등....
어쩌면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과거에 큰 악명을 떨쳤던 인물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자식을 잃는 고통을 알기에 그녀는 의뢰인을 외면할 수 없었고 머나먼 동대륙까지 찾아온 것이다.
“곤륜삼?”
“네.”
헤라는 장장 나흘 동안 카라스 성내를 순회했다.
성내의 모든 약초꾼들을 수배해서 일일이 방문하고 그들로부터 필요한 약재를 구입하거나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난관에 봉착했다.
“허, 곤륜삼을 찾는다고? 죽은 사람이라도 살릴 생각이오?”
마지막 재료가 문제가 됐다.
퀘스트가 제공한 레시피에도 획득 난이도를 ‘극악’으로 분류하고 있는 재료였으니 충분히 각오한 바였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라.... 잘못 된 표현은 아닌 것 같네요. 확실히, 제 의뢰인은 이미 죽어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니까요.”
“설마 당신, 강시를 살리려는 건 아니겠지?”
“강시를 살린다고요? 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곤륜삼이 품고 있는 양기는 시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정도로 막대하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은 곤륜삼의 뛰어난 약효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이지. 물론 주술적 지식과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
헤라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의뢰인을 처음 만났던 날 느꼈던 이질감들을 상기하며 온갖 의심에 휩쓸렸다.
그러다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푸하핫, 울겠네 그려.”
약초상이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헤라에게 그가 말해주었다.
“뭐, 곤륜삼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단 건 사실이오. 일부 사악한 도사들이 곤륜삼을 이용해 강시들을 부활시키고 민심을 어지럽힌 까닭에 왕실에서 민간의 유통을 금지했을 정도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곤륜삼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주술적 지식과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하오. 그것도 최고 수준의 지식과 기술.”
“그 말씀은...?”
“곤륜삼으로 탕약을 만들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며? 당신의 정체가 사실은 음흉한 도사가 아닌 이상에야 당신이 만드는 탕약은 결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소. 그러니 그렇게 겁먹지 말라는 게요.”
“이, 이 나쁜 아저씨가! 손님을 놀려서 쓰나요!”
허허 웃던 약초상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헤라를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당신이 사실은 사악한 도사일 수도 있으니 나름 시험을 해본 게지.”
“....”
“뭐, 약초나 캐다 파는 나 같은 나부랭이의 눈으로 봤을 땐 당신을 의심하기 어렵구려. 궁궐로 가시오. 곤륜삼은 오직 궁궐에서만 구입할 수 있소. 궁궐의 전문가들이 당신과 당신의 탕약 제조법을 충분히 감별한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 곤륜삼을 내어줄 게요. 아, 물론 탕약을 만들 땐 그들의 눈앞에서 만들어야하고.”
“감사합니다.”
친절한 약초상 덕분에 정보를 얻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혜라가 궁궐로 향했다.
곤륜삼을 구하고자 찾아왔다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길을 열어준 병사들은 그녀를 왕의 대전과 정 반대편에 있는 별관으로 안내해주었다.
따앙! 따앙! 따앙!
치릭! 콰쾅!
별관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었다.
어떤 건물에는 대장장이들이 모여 무기를 만들고 있었고, 어떤 건물에서는 과학자들이 모여 화포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건물에는 헤라와 같은 의원들이 모여 환자들의 용태를 살피는 등 다양한 직군의 실력자들이 보였다.
“...꿀꺽.”
굵은 기둥이 끝도 없이 늘어선 복도를 따라 걷던 헤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과 무사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챈 것이다.
그녀는 병사들이 특별한 검문 없이도 자신을 순순히 여기까지 안내해준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던 거네.’
동대륙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다는 사실을 충분히 듣고, 체험해왔지만 궁궐의 수준은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서대륙에서는 칭송 받는 랭커들도 이곳에서는 위축되어 쥐 죽은 듯이 지내리라....
헤라가 생각할 때였다.
“수준이 너무 낮군.”
누군가의 탄식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다.
역시나.
고개를 돌려 보니 며칠 전 자신을 도와줬던 정체불명의 랭커 켄트릭이 보였다.
한데 어째선지 대장장이 몇 명을 모아놓고 훈계하고 있었다.
“철의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했소. 특히 이 검과 이 검을 만든 대장장이는 당장 해고하거나 제련에 투자하는 시간을 3배 이상 늘리라고 경고하시오.”
“....?”
서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장인들을 훈계하는 ‘전사’라니?
귀를 의심한 끝에 걸음마저 멈춘 헤라가 멍하니 켄트릭을 바라보았다.
켄트릭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라고, 제 친구였다면 그렇게 조언해드렸을 겁니다.”
조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누그러뜨리고 갑자기 공손한 태도로 말을 끝맺은 켄트릭.
그가 헤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라 님께서 여긴 무슨 일입니까?”
“아.... 그, 그게. 마지막 탕약의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라는 제보를 얻고 찾아오는 길이에요. 여기서 켄트릭 님과 다시 재회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잘 지내셨나요?”
“네, 그럼요.”
“근데.... 켄트릭 님은 어떤 용무로 이곳에...?”
“별 일 아닙니다. 초국의 대장장이 분들께 조언을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부탁을 들었던 바가 있어서 잠시 들렀던 차죠.”
헤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장인들께 조언을 해드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혹시 친구라는 분이 그리드 님이신가요?!”
“....맞습니다.”
“대, 대단해요! 그리드 님과 친구 사이라니! 켄트릭 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셨던 분이군요!”
“하하, 그리드 좀 알고 지내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럼 전 이만.”
켄트릭.
정확히는 인피면구로 켄트릭으로 변장 중인 그리드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은밀하게 활동해야하는 상황에서 굳이 헤라와 엮여 의심을 샀다간 귀찮아질 테니까.
“가, 같이 가시죠!”
대장장이들이 우르르 그리드를 뒤따랐다.
용광로의 온도가 오르길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조언을 해준 그리드를 그들은 이미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
별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대장간.
열심히 풀무질 중인 갓핸드들 덕분에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용광로의 상태를 점검한 그가 뒤따라온 대장장이들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아까 그 여자가 혹 나를 찾거든 이미 떠났다고 전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흐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그리드가 천천히 몸을 풀었다.
주작의 숨결은 불의 결정체.
그것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비상식적인 수준의 고열이 유지되어야한다.
엄청난 체력과 긴 인내가 필요한 작업.
그렇기에 충분히 머리를 식히고 왔다.
“....놈은 곧 온다.”
가람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한다.
그리드는 주작을 부활시켜야했고, 초왕은 세력을 하나로 규합해 진실을 널리 알려야했다.
그래야만 가람과 환국에게 저항할 수 있다.
“쿨럭, 쿨럭!”
“끄으윽....!”
연병장처럼 거대한 대장간을 열기가 잠식하자 대장장이들이 고통에 주저앉았다.
보통 사람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고열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예 접근 자체가 불허할 정도의 초고열이 주작의 숨결을 제련하는 기본 조건.
오직 그리드만이 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이유다.
갓 핸드들에게 명령해 쓰러진 대장장이들을 모두 내보낸 그리드가 용광로 앞으로 다가가 섰다.
화르륵!
화염이 주작의 숨결을 삼킨다.
콰르르르륵!!
용광로에서 넘쳐흐른 불길이 사방팔방 줄기줄기 뻗어나가며 대장간 전체를 휘감았다.
한편.
“여기까지가 오존과 양반의 실체요.”
대소신료들을 소집한 초왕은 진실을 설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존의 추종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도리어 왕을 매도했다.
촤륵-!
피가 뿌려진다.
시간이 없었던 초왕은 눈물을 머금고 숙청을 시작했다.
***
무저갱.
“네놈이 이곳의 문지기라고?”
심처에 도달하기 직전, 마족 비프론즈와 조우한 브라함이 질문하자 그의 손아귀에 들린 골드히트의 머리통이 하하 웃었다.
“하하핫! 비프론즈다! 이곳 틈새에서 태어난 마족이지! 금제만 벗으면 나보다 훨씬 더 강한 놈이다! 브라함! 제아무리 네놈이라도 저놈을 상대하기는 벅찰.... 꿱!”
마력의 채찍으로 골드히트의 정수리를 후려치는 브라함의 표정이 어둡다.
그리드가 봤다면 놀라 자빠지고도 남을 표정이었다.
“네놈, 이상한 곳에서 전생했군.”
“전생....? 혹시 넌 나를 알고 있어?”
“알고 싶나?”
“....”
당연히 알고 싶다.
아니, 그렇다고 믿어왔다.
틈새에서 태어난 비프론즈는 자신이 마족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은 왜 아무 것도 없는 이곳에서 태어난 건지, 바깥은 어떤 풍경일지.... 그는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정작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 오자 두려워졌다.
이곳 틈새를 잠식하고 있는 심연 같은 어둠보다 훨씬 더 깊은 두려움이었다.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면 강요할 이유가 없지. 비켜라.”
“....응.”
비프론즈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의 자신은 눈앞의 상대와 싸워봤자 이길 수 없음을 그는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 탓에 골드히트의 머리통만 사색이 되었다.
“이, 이런 환장할....! 이 밑에는 히드라가 있단 말이다아!!”
죽어도 죽기 싫다.
이대로 머리통만 남아도 좋으니 죽는 건 정말 싫다.
사력을 다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골드히트였지만 소용없었다.
어둠에 몸을 맡긴 브라함은 이미 나락까지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