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63화 (1,053/1,794)

템빨 55권 - 13화

“이것이 진짜 신을 부활시키는 열쇠였다니....”

보고의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주작의 숨결.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꽃을 품은 그 신비한 구슬을 마주보고 선 초왕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신의 숨결은 사신들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앞길을 축복해 주고자 나타날 때 인계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알려져 왔소. 하지만 실상은 다를 테지.”

초왕은 한 명의 신선을 만나보았다.

당시 그는 양반들에게 굽히지 않고 오히려 대립각을 세웠지만 오존의 뜻에는 거역할 수 없는 눈치였다.

즉, 신선 또한 오존의 하수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들의 등선을 사신들이 축복해줬을 리 없다.

“이 숨결은 판게아에서 보관하고 있던 3개의 숨결과 같되 다르오.”

“같으나 다르다?”

“판게아에서 보관했던 숨결들은 ‘주작궁의 관리’를 명목으로 양반들이 하사했던 것이지만 이 숨결은 아주 먼 옛날 건국왕 시절부터 존재해왔던 우리나라 고유의 국보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소.”

“....건국왕 시절?”

“아직 주작궁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먼 옛날이외다.”

“주작이 실존하던 시절이었겠군.... 주작이 당신의 선조께 직접 선물했던 건가?”

“그럴 테지. 여태껏 몰랐지만 말이오.”

실록은 말한다.

주작의 숨결의 거룩한 불꽃이 있었기에 이 땅이 풍요를 누렸노라고.

먼 옛날 주작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숨결을 나누었을까.

자신이 수호하는 이 땅의 인간들을, 그는 대체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잊혔으니 어찌나 슬프고 원통했을까.’

한탄한 초왕이 주작의 숨결을 손에 쥐었다.

주작궁이 사실은 주작을 봉해놓은 도구이며, 주작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숨결이 필요하다고 하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부디.... 부디 주작 신을 부활시켜주시오.”

“....”

초왕이 건네준 숨결을, 그리드는 한동안 잠자코 바라보았다.

특별할 게 없는 숨결이었다.

여태껏 그리드가 보고, 만져온 다른 주작의 숨결들과 똑같았다.

하지만 초국의 신민들에게는 각별한 물건이다.

이 숨결이 있었기에 지금의 초국이 존재하는 거라고 그들은 믿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소중하게 다루겠소.”

그리드는 맹세했다.

“허....”

초왕이 탄복했다.

그리드의 올곧은 눈빛에 담겨있는 각오를 읽은 것이다.

“속봉은.... 판게아의 백성들은 행복하겠구려.”

“글쎄. 나야 모르지.”

서방의 왕과 동방의 왕이 마주보고 웃는다.

본래라면 없었을 이야기다.

만약 그리드가 없었다면 제국은 지금쯤 적해를 건너 초국과 전쟁을 벌였을 테니까.

***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가우스 왕국이 멸망하였습니다.]

[템빨국이 가우스 왕국의 영토를 모조리 점령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피아로와 라우엘, 그리고 테루찬이 이끄는 템빨연합군이 가우스 왕국을 완전히 정복한 것이다.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나라 하나 먹는데 2주도 안 걸릴 거야? 심지어 그리드도 없이?

-그리드가 왜 없음?

-전쟁은 라우엘한테 맡기고 다른데서 혼자 서사시 쓰고 있었잖아요.

-생각해보니까 맞네. 미친....

-이제 템빨국이 제국보다 센 건가?

-아직 그건 아니지. 가우스 점령했어도 영토 차이가 10배 이상인데.

-땅 크고 사람만 많으면 뭐함? 인재가 많아야지.

-응 아냐~ 제국이 인재도 훨씬 더 많아.

-당장은 그렇긴 한데 제국에는 전설이 없어서 결국 따라잡힐 듯.

-ㅋㅋㅋ템빨국 4전설 보유ㅋㅋㅋㅋ

-그리드, 유라, 피아로, 메르세데스였나?

-ㄴㄴ템빨국 이제 3전설임.

-왜요? 유라 탈퇴한다고 함?

-아뇨? 그리드가 신화가 될 거라서 3전설임.

한 세력의 독주는 많은 반발을 사게 마련이다.

레이단을 공격했던 7대 길드가 자멸하고 템빨단이 독보적인 1위 길드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다.

템빨단을 견제할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많은 병폐가 발생할 거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사람들은 점차 비대해지는 템빨국을 굳이 시기하거나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템빨국이 지난 수년 동안 보여준 처신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일단 템빨국은 갑질을 일삼지 않았다.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는 누리되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들을 착취해서 더 큰 이득을 노린다거나 하는, 그런 ‘일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없었다.

많은 구독자를 거느린 스트리머가 온갖 선동과 내로남불을 일삼아 상대적으로 적은 구독자를 거느린 스트리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이 빈번한 요즘 사회에서 템빨국의 행보는 ‘모범적이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민심이 주는 힘은 거대한 법이다.

-템빨국 영토 늘어났으니까 백성 제한도 풀렸겠네. 당장 템빨국으로 이주한다.

-나도 지금 안 자고 버티는 중. 3시간 후면 로그인 제한 시간 풀려서ㅋㅋ

-3시간이면 아슬아슬 하겠는데? 이미 템빨국에 이민 신청하려고 모인 사람들 바글바글 하다던데.

-아무리 그래도 3시간 만에 수천 만 명이 모집되겠음?;

-....2시간 만에 완료.

-ㅠㅠㅠ

-너무 실망하지 마요. 어차피 라우엘이 또 사람 걸러내는 작업할 거임. 그때 빈 자리 생길 듯.

-살마 걸러내는 작업이 뭐임?

-라우엘 걔 중범죄 이력 있는 플레이어들 안 받아줌.

-갓우엘.

-쓰...,벌.... 갓우엘은 무신 헛소리여.... 사람이 겜 좀 하다보면 실수로 범죄 좀 저지를 수 있지.... 그걸 쫓아내....? 쓰레기....쉑....

-심지어 왕도 아니잖아? 그리드도 가만히 있는데 왜 지가 지랄임?

-네 다음 범죄자들.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템빨국의 인구가 2배 가까이 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사하란 제국에도 순식간에 전해졌다.

“템빨국의 저력이 대단하군요. 걱정이 되어 며칠 잠을 못 이뤘는데 오늘부터 편이 잘 수 있겠어요.”

여황제 바사라가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위에 오른 후 늘 지쳐있던 그녀가 오래간만에 미소를 보이자 3명의 공작들이 안도했다.

불사왕 그렌할이 허허 웃었다.

“템빨왕 그리드는 무신의 추종자와 대악마를 토벌한 장본인입니다. 가우스 왕국에 무슨 수가 있어 영웅 중의 영웅인 그의 진격을 막을 수 있겠나이까? 템빨국의 승리는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창성 레이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는 이번 전쟁에서 잠시 선봉만 맡고 물러났다던데? 그렌할 공,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그토록 정세에 어두워서 어쩌려고 해요? 요즘 너무 게을러진 거 아니에요?”

“별 걸 다 트집 잡네. 그렌할 공께서는 듀란달 황자를 감시하느라 바쁘신 것 모르나?”

맹수왕 모르이즈가 핀잔을 주었지만 레이첼의 강경한 태도는 꺾이지 않았다.

“불과 1년 전과 비교해도 무뎌진 건 사실이잖아? 템빨국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얻어서 기쁜 건 알겠지만 경각심을 품어야한다고. 우리에게 적이 어디 한둘이야? 이번에 죽은 네메시스 왕만 해도 대단한 인재였어. 우리 모두 그에게 꼼짝 없이 당해서 발이 묶였다고. 다행히 템빨국이 승리해서 망정이지 만약 잘못 됐다간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남았을 거야.”

템빨국과의 전쟁을 예견한 네메시스 왕은 가장 먼저 제국에 사신을 보냈었다.

새 황제 바사라가 ‘평화의 시대’를 주창하며 이종족들을 풀어준 점을 예로 들며 가우스 왕국과 템빨국을 중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쟁은 또 새로운 전쟁을 낳으니 평화의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템빨국의 진격을 멈춰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템빨국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었던 제국은 온갖 핑계로 중재를 거절했고, 이는 제국 스스로 족쇄를 차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중재를 거부하며 제시했던 온갖 핑계 중 일부 탓에 제국이 템빨국을 지원할 명분을 잃은 것이다.

네메시스 왕의 재지가 워낙 훌륭했다.

돌이켜 분석해 보면, 네메시스 왕은 제국이 자충수를 둘 수밖에 없게끔 처음부터 유도했었다.

아직 변화를 겪는 과정에 있어 혼란스러운 제국의 허점을 완벽히 찌르는 한 수였다.

“네메시스는 분명 대성했을 인물이야. 보통 재능이 아니었던 건 확실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사하란 제국이 고작 한 사람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역사상 그 어느 천재가 감히 제국을 농락할 수 있었지? 어쩌면 제국은 역사상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걸 수도 있....?”

재차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던 레이첼이 입을 다물었다.

그렌할과 모르이즈의 듣는 태도가 영 별로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위기를 논하고 있는 이때 귀나 후비고 있다니?

레이첼이 버럭 소리치려는 때였다.

“레이첼 공, 객관적으로 보세요.”

바사라가 직접 나서서 레이첼을 제지했다. 그리고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한 사람의 농간으로 피아로와 적기사단을 잃었던 것이 우리 제국이며, 고작 한 사람의 개입으로 황제마저 바뀐 것이 바로 우리 제국이에요. 제국은 단 한 번도 완전했던 적이 없고 그럼에도 늘 자만했으며 수많은 오욕을 남겨왔죠.”

“.....”

얼굴을 붉힌 레이첼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한 발 물러나 보니 제국은 결코 완전한 국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만했고 자만해왔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레이첼에게 바사라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레이첼 공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 노력해야겠죠. 전에 없던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에요.”

제국은 견고해지리라.

전에 없는 평화와 번영을 이루리라.

바사라가 재차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

어찌나 큰 지진이란 말인가.

대전이 흔들리며 천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이 무슨....!”

황도에 자연재해가 생기다니?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최악의 흉조다.

황제와 공작들이 얼굴을 구기는 그때.

“여, 영원의 탑....!”

대전으로 달려 들어온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영원의 탑에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

***

“어, 어찌.... 어찌 나를....”

마법왕 골드히트.

브라함과의 만남을 끝나며 은밀히 가우스 왕국을 지원 갔던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죽어있었다.

머리만 남아서 문제지.

“브라함....! 어째서 나를!!”

원치 않는 죽음의 초월.

강제적으로 리치가 된 자신의 신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골드히트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소리쳤다. 아이들의 육체를 희생시켜 연명해온 백 년 이상의 삶 동안 축적해온 모든 적의와 악의를 브라함에게 표출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선 브라함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수백 년의 지식이 축적된 마탑에 전설의 대마법 메테오를 날려 붕괴시킨 이 미친놈은 얄미울 정도로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쓰레기 주제에 노려봐서 뭐 어쩌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나는 릴리스의 제자다! 네놈의 제자의 제자란 말이다!!”

증거까지 제시했다.

한데 강화 마법의 비결을 전수해주기는커녕 죽여 언데드로 만들다니?

하물며 영원의 탑마저 무너뜨려?

믿기지 않는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혼란해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골드히트의 관자놀이를 브라함의 손가락이 쿡하고 찔렀다.

그러자 골드히트의 이성이 되돌아왔고 브라함은 이죽거렸다.

“쓰레기 따위가 마법의 왕임을 자처했으니 죽어야지. 그리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하는 것 아니더냐? 영생을 원하는 네놈을 리치로 만들어주겠다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 것이냐?”

“이, 이 미친....! 읍! 읍읍!”

“흐음.”

골드히트의 입에 마력의 재갈을 물린 브라함이 딛고 선 지면을 내려 봤다.

아득히 먼 지하로부터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무저갱... 두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라....”

탐구심이야말로 브라함을 행동케 하는 힘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빛에 휩싸인 브라함의 모습이 이내 자리에서 사라졌고 당연히 골드히트도 함께였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