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11화
“미물 따위가....! 금수만도 못한 놈이!!”
본래 가람의 계획은 간단했다.
그리드를 갈기갈기 찢어 죽인 다음 초왕을 찾아가 징벌할 예정이었다.
그리드를 비호하려했던 꼽추 노불담이 초왕의 신하였으니 초왕에게 책임을 무는 건 당연한 행사였다.
하지만 일정이 꼬이고 말았다.
이따위 몰골로 인간들을 만날 순 없었으니까.
“....!”
“가, 가람?”
천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백린목이 웅장하게 늘어선 길목.
환국의 입구 근처에서 산책을 즐기던 남녀 한 쌍이 다가오는 가람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가람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비녀를 꽂아 상투를 틀거나 곱게 빗어 내리고 다녔던 장발이 산발이 되었고, 주름 하나 지지 않고 깨끗해야할 도포는 잔뜩 구겨지고 찢겨진 채 피에 얼룩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도포를 적신 피가 가람 본인의 피라는 점이었다.
그의 한쪽 귀가 잘리고 없었다.
대체 무슨?
도대체 어떤 재앙이 있어서 신이 될 자의 옥체가 상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서 치료부터 하자!”
가람의 곁으로 달려온 남녀가 소란을 피웠다.
그들 또한 양반이었고 환국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같은 어버이 밑에서 태어나 자란 형제 가람을 진정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가람은 그들이 하찮았다.
신의 자격조차 얻지 못한 주제에 초조해하기는커녕 사랑이나 속삭이는 쓰레기들을 형제로 인정할리 만무했다.
차라리 우리를 규탄했던 파그마가 이놈들보다 백배, 천배 낫다....
푸화하핫-!
“....!”
소리 없이 허리의 연검을 풀어 휘두른 가람이 남녀의 목을 베었다.
자신의 추레한 몰골을 목격한 그들을 살려두기에는 가람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제길.... 제기랄!”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이들의 원망어린 시선 속에서, 가람은 욕설을 토했다.
그는 어떤 두려움과 초조함에 짓눌려 있었다.
자신과는 다른 형태. 정확히는 보다 나은 형태로 신의 자격을 갖춘 그리드로 인해서 그의 미래에 엿볼 수 없는 암운이 드리웠으니까.
짤랑-
바득바득 이를 가는 가람의 머리 위에서 방울 소리가 울려왔다.
“진짜 신을 보았구나.”
익숙한 음성이 이어졌다.
서슬 퍼런 눈을 치켜뜬 가람은 장승의 머리를 밟고 선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목걸이에 큰 방울을 매단 사내였다.
비죽비죽 솟은 머리카락과 탈 너머 매서운 눈빛이 강렬하여 가람을 위축시켰다.
“치우....”
가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필이면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한심한 꼴을 들켰으니 끔찍한 불만을 느꼈다.
못 본 척 해 달라.
차마 그 한 마디 부탁을 꺼내지 못한 가람이 도리어 이죽거렸다.
“진짜 신? 그럼 가짜 신도 있소? 신은 신이오. 애초에 그놈은 신이 아니고 말이외다.”
수호신의 신화는 가람 또한 알고 있었다.
혼돈부터 존재했던 삼신, 그리고 그들에게 빚어진 대다수의 신들과 달리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탄생한, 보다 순수한 존재들.
눈앞의 치우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했다.
힘을 원했던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태어난 무(武)의 결정체.
레베카가 빚은 무신 제라툴조차도 결국은 치우의 복제품에 불과했다.
“두렵고 불안할진데 애써 부정하는 꼴이 가엽군.”
치우가 쓰고 있는 탈이 들썩거렸다.
탈 너머 얼굴에는 조소가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닥치시오!!”
가람은 알고 있다.
자신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제된 신앙으로부터 비롯한 신은 결국 전능할 수 없다.
하지만 가짜라고 구분되고 조롱받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일까?
아니다.
신은 신이다.
권능의 고하는 있을지 모르나 거룩함은 같다.
“설령 놈이 신이 될지라도 사방신의 수준에 그칠 것이오. 놈 또한 사방신과 마찬가지로 ‘지키겠다.’는 추상적인 이유로 태동한 존재에 불과해.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먼 옛날 사방신을 봉했듯이 나는 놈을 반드시 봉할 것이오!”
‘신을 이길 힘’, 혹은 ‘신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구체적인 염원을 통해서 탄생한 치우는 규격 외의 괴물인 반면 사방신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도 양반처럼 한계가 있었다.
그리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믿고자 노력하는 가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치우가 어느 먼 곳을 가리켰다.
“봐라.”
“....!”
삼신에 버금가는 권능이 발동했다.
치우의 신력에 의해서 가람의 시선이 적해 너머 서대륙으로 옮겨졌다.
흑발의 사내가 보였다.
검과 교감하는 사내였다.
치우의 발언이 의미심장했다.
“신을 벨 아이다.”
“....?”
“네가 오늘 만난 아이는 저 아이와 긴 세월 경쟁할 것이며 점차 더 강하고 뚜렷한 염원의 대상이 될 테지.”
“....!”
“외면하지 마라. 그들이 진짜 신이며 종국에는 너희 가짜 신을 멸할 터이니.”
“네놈!!”
허황되고 모욕적인 발언을 일삼는 치우를 가람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치우를 향한 최소한의 공경과 나락과도 같은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살신의 의지를 표출했다.
동시에.
“....?”
가람의 모든 감각으로부터 치우가 사라졌다.
이어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짤랑-
“흡!!”
소리를 통해서 뒤늦게 치우의 위치를 파악한 가람이 황망히 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목표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치우의 손가락이 가람의 미간을 점했다.
치우의 탈이 다시 한 번 들썩였다.
“파멸을 피하고 싶다면 발악해라.”
따악!
치우가 손가락을 퉁기자 가람의 시야가 여러 개로 분산되었다.
머잖아 신을 벨 거라는 황당한 놈과 바알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한심한 녀석의 모습이 그리드의 모습과 함께 연달아 교차하며 가람을 자극시켰다.
“혹시 또 아느냐? 덫에 걸리고도 버둥거리는 짐승과 같은 심정으로 저들과 대적하다 보면 너 또한 진짜 신이 되어 나를 벨 자격을 얻을 지도.”
짤랑-
그리고 방울 소리가 다시 울렸을 때, 치우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홀로 남은 가람의 눈이 붉게 충혈 됐다.
그리드, 그리고 검성과 바알의 계약자.
저들을 반드시 멸해야함을 그는 직감했다.
***
시야의 끝에 걸리는 지평선을 주시한다.
저곳이 곧 내가 선 땅이기를 염원한다.
[공간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큭!”
얼굴 가죽이 뒤집히는 후폭풍과 함께 그리드는 조금 전 시야에 담았던 지평선 위에 서있었다.
공간 이동 스킬 <순보>의 발현이다.
네 번째 서사시 보상으로 초월의 격을 한층 더 쌓아올린 그리드의 순보 발동 확률은 이제 거의 20퍼센트에 육박하게 되었다.
‘극악의 확률’로 표기됐던 시절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발전인 셈.
‘....도약하는 거리가 멀수록 자원 소모가 커지는군.’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하는 그리드의 마나와 스태미나는 각 절반씩 감소해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최대 거리’를 도약했을 때의 소모량이다.
5미터 내의 거리를 도약할 경우에 발생하는 마나 소모량은 2천이며 스태미나 하락도 없었다.
다만 도약 거리 5미터 이상부터는 무슨 택시 미터기마냥 자원 소모량이 급격히 증가하긴 했지만 이는 초월의 격을 쌓을수록 해결 될 문제로 보였다.
“흠....?”
기분 탓인가?
몸이 지칠수록 주작의 심장이 기뻐하는 눈치다.
주작의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회복되는 스태미나를 느끼며, 그리드는 새롭게 나타난 지평선 너머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누각들을 시야에 담았다.
어느새 카라스에 도착한 것이다.
고작 반나절 만이었다.
순보의 덕이 크긴 했지만, 서사시 보상으로 새롭게 얻은 칭호 <옛 신의 땅의 수호자>의 덕도 컸다.
<옛 신의 땅의 수호자>
옛 신의 땅에서 활동 시 <의지>가 1.5배 상승하고 지형 적응력이 100퍼센트로 유지됩니다.
지형 적응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지형의 편차에 따라서 행동이 제약되고 속도도 저하되게 마련인데 지형 적응력을 100퍼센트로 보장 받을 경우 그런 물리적인 한계점들이 사라졌다.
‘옛 신의 땅은 판게아 말고도 세 군데가 더 있겠지?’
청룡도, 백호창, 현무보옥이 봉인돼 있는 장소들 또한 판게아와 마찬가지로 옛 신의 땅으로 분류될 터.
그리드는 이번에 새롭게 얻은 칭호가 다른 사신기를 얻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근데....”
<전광>을 전개, 창공 높이 올라 카라스를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과 달리 카라스의 풍경이 무척 평화로운 까닭이다.
천만 다행인 일이긴 했지만 의구심이 들었다.
‘가람 그 미친놈이 발칵 뒤집어놨을 줄 알았는데?’
가람은 초왕을 비롯해 그리드를 비호하는 세력을 모조리 찾아내 벌하겠노라 선언했었다.
그리드가 숨겨진 주작의 사당들을 수색하기보다 카라스부터 방문한 이유다.
다시 가람과 싸워서 목숨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자신을 은밀히 돕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외면할 수는 없던 것이다.
‘내가 사당에서 지체한 시간을 감안하면 가람이 나보다 늦게 도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근데 어째서 카라스는 평온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본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뻔해. 함정이야.’
그리드가 가람을 두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음흉함에 있다.
그리드 한 명을 붙잡겠답시고 서대륙의 모든 대장장이를 동대륙까지 유인했던 놈의 계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정말로 함정일까?
어떤 계기만 있으면 내 위치를 금방 포착할 수 있는 놈이 굳이 번거롭게 함정을 파가면서까지 내가 오길 마냥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드는 가람의 성격을 주목했다.
상대가 약자일수록 더욱 더 콧대를 높이는 녀석.
자신은 인간을 쉽게 해치는 주제에 인간의 비수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자존심 덩어리.
‘....그런 놈이 봉두난발에 피칠갑이 돼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지.’
녀석은 우선 환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충분히 몸가짐을 정돈한 후에 카라스를 방문할 예정일 테지.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
결론을 내린 그리드가 지체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비행 상태 그대로 카라스 중앙에 우뚝 선 왕궁까지 몸을 날렸다.
“웬 놈이냐!”
“적이다!”
시작부터 난관이 찾아왔다.
왕궁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던 부적들이 그리드의 침입을 감지하고 온갖 주술을 걸기 시작하더니 무사들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수준이 높긴 높아.’
과연 동대륙을 대표하는 4개의 국가 중 하나답다.
템빨성 못지않게 훌륭한 카라스 성의 방비가 그리드를 크게 감탄시켰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감탄 이상의 감흥을 느낄 겨를도 없이 병사들의 추적을 따돌린 그리드는 왕의 대전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신선이시오?”
뒷짐 지고 선 사내가 그리드를 맞이했다.
초왕이었다.
찰랑이는 금관 너머의 눈동자가 호수처럼 깊다.
그를 곁에서 호위하는 무사들과 장막 뒤에 숨은 도사들, 그리고 그림자 속 살수들의 숫자와 수준을 대충 헤아려본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물려주시오.”
초왕이 정확히 어느 편에 섰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초왕의 근위대 중에 양반 광신론자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으므로 그리드는 초왕과 단 둘이 된 후에야 인피면구를 벗고 싶었다.
“네놈이 제정신이냐!”
침입자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거센 분노를 드러낸 무사들이 참지 못하고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림자 속 살수들은 비수를 던져서 무사들을 지원했고 장막 뒤의 도사들이 외우는 주술은 대전에 메아리치며 그리드의 정신을 현혹시켰다. 어떤 주술은 무사들의 담력과 용력을 상승시키는 형태로 작용하기도 했다.
확실히, 정예 중의 정예였다.
평균 레벨이 최소 400대임이 분명했다.
특히 그리드의 통찰력과 감각으로도 위치를 정확히 읽기 힘든 상대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그가 초왕의 그림자 무사이며 준 전설급의 실력자 같았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가람에게는 한 줌의 먹잇감조차 안 되리라....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탐식의 룬을 개방했다.
“화신의 폭풍.”
<전격 마기의 폭풍>의 변형.
주작의 심장과 화공이 순환시키는 불꽃을 발출하는 이 장렬한 폭풍은 더 이상 날씨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전보다 더 파괴적이다.
콰르르르르르륵!!
“....!?”
침입자를 중심으로 발생한 불꽃의 소용돌이에 놀란 무사들이 기세를 잃고 주춤거렸다. 그들은 초국 최고의 무사였지만 감히 저 불꽃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충격과 혼란 속에서.
“주작의 불꽃....!”
초왕은 화색이 되었다.
침입자의 정체가 일생일대의 귀인임을 알아본 것이다.
대앵, 대앵, 대앵....
저 먼 성벽에서부터 아득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카라스 신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멈춰있던 동대륙의 시간과 역사, 그리고 운명이 다시 태동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