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10화
[<주작의 숨결>의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제련 난이도는 재료의 등급과 비례한다.
그리드는 사신의 숨결을 강화할 때마다 상당한 시간과 체력을 소비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화공을 얻으며 개화한 의지의 불꽃 효과 덕분에 그리드의 피로도는 기존보다 크게 줄었다.
그래야만 했다.
“.....”
강화된 주작의 숨결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어둡다.
현재 그가 느끼는 피로감은 어느 때보다 더 높았다.
원하던 결과물을 손에 넣는 순간 냉정을 되찾은 그의 이성이 날린 강렬한 경고가 갈등을 유발한 까닭이다.
‘이건 진짜 미친 도박이다.’
강화된 사신의 숨결은 무려 신화급 아이템의 재료.
가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물질이다.
그것을 허무하게 날릴 수도 있는 도박에 내던지는 일이 정녕 옳을까?
실패할 경우 덮쳐올 상실감이 벌써부터 두렵다.
“....이제 와서 고민은 개뿔.”
일단 시도해보겠노라 결정한 상태다.
근데 또 새삼스럽게 고민하면서 시간을 끈다?
쓸데없는 낭비임을, 그리드는 알고 있다.
갈등을 접고 <신력이 깃든 주작궁>을 꺼낸 그가 강화된 주작의 숨결을 부여했다.
솔직히 말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긴 했다.
식은땀이 흘렀고 침은 진즉에 말라 갈증을 느꼈다.
<주작의 수호자> 퀘스트 정보에 명시되어 있는 퀘스트 목적은 ‘주작의 숨결’ 20개를 주작궁에 부여하는 것.
‘강화된 주작의 숨결’을 주작궁에 부여한다고 해서 시스템이 인정해줄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래, 큰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드가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쿠웅!
강화된 주작의 숨결을 품은 주작궁이 어느 거대한 짐승의 심장처럼 박동하면서 붉게 달아올랐다.
용암보다 뜨거운, 그러나 생명을 멸하는 것이 아닌 태동시키는 불꽃이 피어오르며 그리드가 밟고 선 땅 위로 수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싹을 틔웠다.
“....!”
그리드의 눈앞에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태초 이전의 혼돈.
야탄과 레베카, 그리고 한울이 있었고 그들이 세상을 창조했다.
레베카는 세계수를 심어서 대지를 지탱하였고 날씨를 관장하는 신들을 빚은 한울은 대지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야탄은 심연으로부터 바알을 꺼내 파멸을 준비하라 명했다.
어떤 특별한 의의를 품은 행동이나 계획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규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태엽과도 같았다.
최초의 인류는 두려움에 떨었다.
전능한 신들을 공경하되 의지하진 못했다. 그들을 섬기며 깊이 알아갈수록 도리어 불안감을 느꼈다.
인류는, 새로운 신을 원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
자신들을 지켜줄 신을.
화르륵!
최초의 인류가 느끼는 절망을 표현하는 잿빛 풍경 위로 불꽃이 타올랐다.
레베카와 한울이 빚은 신들의 도움 없이도 생명을 싹 틔울 수 있는 불꽃.
인류의 염원으로부터 비롯된, 오로지 인류를 위해서 탄생한 수호신.
『...이여.』
불꽃이 일렁이며 음성을 토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리드는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 챘다.
주작이다.
『나를.... 닮은 이여.』
화르륵!
더욱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점차 주작의 형상을 갖췄다.
지슈카의 <날아오르라!> 스킬에서 표현되는 주작보다 족히 수백 배는 큰.
양 날개로 태산을 감싸 안을 수준의 크기였고, 물질적인 크기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리드는 압도당했다.
지긋이 자신을 응시하는 주작의 시선에 솔직히 위축됐다.
하지만 스스로가 티끌 같다거나 하는 식의 극단적인 감상까진 느끼지 못했다.
주작의 위엄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단지 그리드가 성장했을 뿐이다.
파앗!
그리드의 주변 풍경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붉게 물든 하늘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
갑작스러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 그리드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불타는 왕궁이 보였다.
수십만의 대군이 왕궁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군의 정체는 템빨군과 오크 연합군이었다.
“피아로 공! 지금 제정신입니까!!”
‘라우엘?’
라우엘의 음성을 포착한 그리드의 시선이 라우엘을 탐색했다.
라우엘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피아로와 나란히 선 그는 전장의 선봉에 있었으니까.
한데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성문을 열고 몰려나오는 적군과 곁에 선 피아로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요란하게 떨렸다.
“....!”
그리드가 아찔해졌다.
라우엘이 동요하고 있는 이유를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피아로를 비롯한 템빨국의 기사들과 병사들 상당수가 빈손이었다.
전쟁 중에.
심지어 적군을 코앞에 마주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무기를 버렸다.
그리드의 <원덕구>에 호응했기 때문이리라.
“내 정신은 멀쩡하오. 내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전쟁이 아닌 전하의 안위요, 재상.”
“....쩝, 총사령관의 뜻대로 하십시오.”
두 손 두 발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라우엘의 손에 들려있던 철선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사실 그 또한 피아로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플레이어인 그리드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그리드의 위기를 외면하지 못했다.
‘라우엘 저 녀석이 말리기는커녕 한 술 더 떠?’
그리드가 도끼눈 뜨는 순간.
파앗!
그리드의 주변 풍경이 또 다시 변했다.
“...흡.”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숨을 참았다.
끈적이는 열기가 지배하는 땅.
이 불쾌한 공간의 정체를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지옥?’
그곳에서.
“감히 의식을 방해하다니! 괘씸하도다!”
상처투성이가 된 유라는 홀로 달리고 있었다.
왕관을 쓴 커다란 개구리가 턱을 잔뜩 부풀린 채 껑충 뛰어 그녀를 뒤쫓는 중이었다.
“유라!”
즉각 칼을 뽑아 쥔 그리드가 몸을 날렸다.
유라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개구리를 베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현재 그리드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했으니 개입하지 못했다.
쐐액-!
왕관 쓴 개구리가 토해낸 기다란 혀가 그리드를 지나 유라의 등에 꽂혔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걸음을 멈춘 유라가 총을 발포해 반격하며 예비용 장검을 뽑아 방패삼아 세웠다.
지옥에서 발생하는 버프 덕분인지, 그녀는 그리드의 동체시력으로도 쫓기 힘든 쾌속의 혀가 날아오는 궤도를 비교적 정확히 읽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혀와 검이 맞닿기 직전, 유라의 검이 그녀의 손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예비용 장검은 그리드의 작품이었기에.
푸욱-!
유라의 심장이 혀에 관통 당했고,
“전대만 못하도다.”
왕관 쓴 개구리는 그녀를 조롱했다.
철컥!
유라의 손에 들린 총이 녹빛의 검으로 변환됐다.
5초 동안 그녀는 묵묵히 싸웠다.
잿빛으로 화하게 되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표정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라....”
그리드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자신과 나란히 서길 바라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고 벼랑에 떨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어떠한 책임감을 느꼈다.
풍경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수백 마리의 괴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던 도중에 활을 잃은 지슈카가 괴물들에게 둘러싸이는 모습이 보였고, 칼집을 잃고 이야루그트의 폭주를 감당 못하게 된 극검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도 보였다.
계속해서 변하는 풍경 속에 등장하는 다른 동료들의 사정 또한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 모두 그리드의 원덕구에 호응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다.
“이런... 이럴 수가....”
그리드가 탄식했다.
자신의 권능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를 책망했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급기야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는 그의 눈앞엔 어느새 다시 거대한 주작이 나타나 있었다.
『인간들의 염원으로 신이 되려는 이여.』
『그대의 권능은 전능하지 못하며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할지니.』
『이를 몰라 과신하여 절망과 후회에 매몰되지 말라.』
『강인한 정신력과 결단만이 그대를 지탱할지며 섭리를 바꾸는 계기가 되리라.』
너는 우리처럼 되지 마라.
주작은 그리 충고하는 듯했다.
주작이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느꼈던 절망과 후회를, 그리드는 주작의 눈동자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그리드가 질문했다.
“저를 믿고 따라주는 사람들의 희생을 받아들여야만 신들에게 맞설 수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주작이 침묵했다.
긍정을 뜻했다.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드가 신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그들을 외면하는 순간 길을 걸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저는 저들을 희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꿈틀.
주작의 부리가 들썩였다.
미소처럼 보였다.
『고귀한 이여. 그대에게 나의 심장을 나눠줄지니. 이 심장은 그대의 의지를 양분 삼아 성장해 온전한 그대의 힘이 될지며 그대의 앞날에 작은 보탬이 되리라.』
쏴아아아아아━
등장은 거룩했던 반면 퇴장은 초라했다.
스스로 심장을 뽑아낸 주작은 급격히 작아졌고 순식간에 불꽃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멍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의 주변 풍경은 어느새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알림창이 떠올랐다.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강화된 주작의 숨결>을 부여한 효과로 숨겨진 이야기가 발생했습니다.]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봉인 된 주작의 힘이 크게 회복되었고 당신의 능력과 의지에 탄복한 주작은 당신에게 큰 호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주작의 수호자★의 숨겨진 보상으로 <주작의 9번째 심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주작의 9번째 심장>
주작의 힘의 근원이 담긴 10개의 심장 중 하나입니다.
주작이 끝까지 지켜온 심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심장은 당신의 의지에 반응하며 당신과 함께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거룩한 불꽃에 피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앞으로는 쉽게 지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생명력 치유 효과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태미나 회복 속도가 항시 2배 상승합니다.]
[당신의 체내에 잠재돼 있는 <암흑의 룬>이 뜨거운 열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폭주합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암흑의 룬>을 주목합니다.]
[<암흑의 룬>이 자신을 숨기고자 시도합니다.]
“....!?”
치유 효과 상승과 스태미나 회복 속도 상승.
심장을 막 얻었을 뿐인데 상상 이상의 혜택을 얻게 된 그리드였지만 기쁨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암흑의 룬.
폭발적인 저력을 발휘하는 히든카드가 주작의 심장과 상극으로 작용하는 듯했으니 기쁨보단 낭패가 컸다.
안 그래도 사라진 악마력 탓에 암흑의 룬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으므로 더욱 더 불안했다.
“윽!”
몸속의 열기가 급격히 팽창하자 고통을 느낀 그리드가 주저앉았다.
작금의 사태를 유발시킨 신력이 깃든 주작궁은 얄미울 정도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거, 크게 잘못 됐....’
Satisfy에서 상성은 매우 중요하다.
선(善)으로 규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인 주작과 암흑의 룬이 상극으로 작용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섣불리 심장을 받아들여선 안 됐다.
정말로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은 그리드가 어떻게든 냉정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그때였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이 순환시키는 거룩한 불꽃이 <암흑의 룬>을 포착하고 정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화공>이 순환시키는 의지의 불꽃이 거룩한 불꽃에 호응해 <암흑의 룬>을 지배합니다.]
[당신의 일부가 된 후에도 당신에게 해악을 끼쳤던 <암흑의 룬>이 당신에게 완전히 복종합니다.]
[<암흑의 룬> 사용 시 발생했던 악마력 상승 페널티가 삭제됩니다.]
[<암흑의 룬>에 귀속 된 힘 중 마기를 요구했던 힘들이 앞으로 의지의 불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일부 스킬의 이름과 효과, 연출이 변경됩니다.]
[<암흑의 룬>을 개방한 상태에서 일반 공격, 스킬 공격 시 추가됐던 암흑 속성 공격력이 심 속성 공격력으로 변경됩니다.]
[<암흑의 룬>의 고유 지속 효과가 강화됩니다. 앞으로는 네임드급 마족, 마물, 악마뿐만 아니라 천사, 반신, 신을 해치울 경우에도 확률적으로 대상의 고유 특성을 흡수합니다.]
[<암흑의 룬>의 이름이 <탐식의 룬>으로 변경됩니다.]
“.....”
룬은 계정당 단 1개만 보유할 수 있는 귀속 아이템이다.
그리고 Satisfy에서 귀속 아이템은 해제나 거래가 불가능했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세상에는 수백 종류의 룬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룬을 갖게 되는 플레이어는 평생 되돌릴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큰 이득을 본 편이다.
대악마의 힘마저 흡수하는 암흑의 룬은 분명히 최상위급 룬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신의 힘마저 흡수하는 룬으로 업그레이드 돼버렸다.
탐식의 룬.
그리드의 성향과 목적에 영향을 받아 발전한 듯한 새로운 룬이 그리드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밥상 한 번 제대로 깔아주는군.”
오래간만에 속 편한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주작의 수호자> 퀘스트 현황을 확인했다.
퀘스트는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현재 11개의 숨결이 부여된 상태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1개의 강화된 숨결을 10개의 숨결로 판정했다는 뜻.
그리고 동대륙에는 아직 수많은 양반과 잊힌 주작의 사당들이 남아있었다.
‘하나. 딱 하나면 된다.’
그리드가 초국의 수도 카라스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자신을 도우려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