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59화 (1,049/1,794)

템빨 55권 - 9화

<그리드의 네 번째 서사시에 등장한 ‘무구의 비’의 정체는?>

<각국 방송사와 스트리머들 ‘그리드 무구 보유자’ 섭외에 혈안>

<그리드의 서사시가 신화를 언급.... 플레이어가 신이 되는가?>

<(칼럼)퀘스트 아이템을 통해서 알아보는 전설 등급과 신화 등급의 차이>

<‘그리드가 서사시를 쓰는 장면을 공개하라!’ 세계 수백 개 민간단체가 S.A그룹에게 촉구>

『그리드의 네 번째 서사시가 이례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리드의 서사시를 비공개하는 것은 플레이어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서사시는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사생활이므로 깊이 파헤쳐선 안 된다는 주장이 철저히 대립 중인데요.』

세상이 국대전을 잊었다.

1년 내내 국대전을 기다려온 사람들조차 그리드의 서사시에 집중할 지경이었다.

수십 억 인류의 축제가 그리드 한 명의 행보에 묻혀버린 셈이다.

올해 국대전 스폰서로 참가한 수백 개 기업들은 막말로 똥줄이 탔다.

국대전의 흥행성이 떨어지는 만큼 기업 홍보 효과도 떨어질 테니 기업들의 근심이 태산처럼 쌓였다.

단, 하나의 기업만큼은 예외였다.

“허허,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우리 사위 한 명 때문에 손해를 입게 생겼군.”

대진 그룹.

유라의 조부가 경영하는 그곳만큼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그리드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룹 홍보 모델이기도 했고, 세간에 그리드의 처가라는 인식이 새겨져있는 만큼 그리드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덩달아 거론되며 상승효과를 얻는 것이다.

“음, 어디보자....”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신문 1면을 도배하고 있는 그리드의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진명 회장이 위키X디아에 로그인했다.

그리고 그리드를 검색하더니 일부 항목에 링크되어 있는 대진 그룹 관련 내용을 재차 손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손주복 하나는 타고 났단 말이지.”

이제 이진명 회장은 유라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유라의 더 나은 게임 환경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유라는 역대 최고 수준의 성장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없는 올해도 한국은 국대전에서 활약할 것이다....

이진명 회장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에레지아 지하수로는 최고 난도의 인던 중 하나다.

하이 랭커가 최소 세 명 이상 파티를 짜지 않는 이상 공략이 불가능할 수준이었으니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곳을,

[레벨이 올랐습니다.]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를 혼자서 격파하셨습니다.]

[검성의 히든 피스 ‘끝없는 고행의 시작’을 달성하여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크라우젤 혼자서 완전히 정복했다.

악취를 풍기는 쥐들이 찔러오는 죽창을 예기와 이기어검술로 차단하고 지하의 왕을 자처하는 괴물들을 단죄한 그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감회를 느껴서가 아니다.

고작 이정도 수준의 업적은 그에게 일말의 감흥도 주지 못했다.

‘....덕공.’

눈 감은 크라우젤이 서사시의 현장을 떠올렸다.

그렇다.

크라우젤은 서사시의 현장을 목격했다.

아니, 체험했다.

그리드에게 빌려준 백호검의 시야를 공유한 그는 하늘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무구의 빗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신을 꿈꾸는 자의 눈빛에 투영됐던 공포를 엿봤다.

오싹!

크라우젤의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한 자루의 무기가 부서질 때마다 영혼에 새겨지는 고통을 인내하며 잠시나마 양반을 압도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목도한 그가 느끼는 감정은 전율 이상의 경외였다.

그는, 신이 된 그리드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이 불변의 미래임을 알았다.

자신이 추구해야할 길을 깨달았다.

신을 베는 검.

‘궁극의 참격을 만든다.’

플레이어가 신이 될 수 있다면, 플레이어가 신을 베는 일 또한 가능할 터.

확신하는 크라우젤의 머릿속 광경이 서서히 변해갔다.

무구의 빗속에서 그리드와 검을 맞대는 사람은 가람이 아닌 자신, 바로 크라우젤이었다.

***

화르륵!

주작궁과 주작의 숨결로부터 폭사한 빛의 형태는 점차 불꽃을 닮아갔다.

크게 일렁이더니 급기야 그리드의 전신을 불살랐다.

깜짝 놀란 그리드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조화지?’

빛이 해롭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평정심을 되찾은 그리드가 알 수 없는 사태의 발원지로 다가갔다.

작은 제단 위에 먼지가 가득 쌓인 정체불명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여전히 강렬한 빛을 쏘아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것은 작은 새의 모습을 본떠 만든 조각상이었다.

“이건...?”

조각상의 크기는 한 손으로 감싸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래서 ‘작은 새’를 본떠 만든 조각상인 줄 알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엉켜있는 거미줄과 먼지를 털어내자 뚜렷하게 드러난 형태는 그리드에게도 낯익은 것이었다.

“주작?”

순간.

번쩍!

주작상이 내뿜던 빛줄기가 더욱 강하게 폭사하더니 주작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르르, 진동하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주작궁의 변화가 느껴진다.

[<오랜 세월 방치된 주작상>에 깃들어 있던 <주작의 숨결>이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스며듭니다.]

[주작의 회복까지 19개의 숨결이 필요합니다.]

“....!”

흉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곳은 본래 주작을 섬기던 사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방신을 향했던 민간의 신앙이 양반에게 쏠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잊히고 급기야 버려질 것일 테지.

주작이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숨결을 나눠줬음도 모르고.

‘마냥 말도 안 되는 퀘스트는 아니었구나.’

그리드가 청호에게 받은 <주작의 수호자> 퀘스트 난이도는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주작궁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뻔히 환국의 추적을 받을 텐데 2년 동안 죽지 않고-2회 이하- 버텨야한다는 조건, 혹은 20개의 주작의 숨결을 모아야한다는 조건 모두 보통 사람은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가능성은 존재했다.

동대륙 각지에 흩어져있을 사당을 찾는 방법으로 퀘스트 클리어를 노려볼 수 있었다.

‘이 힌트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작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건가.’

자신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깨달은 그리드가 잠시 복잡해졌던 머리를 완전히 정리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주작의 숨결을 꺼냈다.

‘궁금하네.’

퀘스트를 받았을 때부터 궁금했다.

주작궁이 강화 된 숨결을 흡수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일반 주작의 숨결이랑 차이가 없으면 그나마 망정이지.’

최악의 경우엔 판정 자체를 못 받을 수도 있다.

시스템이 주작의 숨결과 강화 된 주작의 숨결을 완전히 별개의 아이템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도해보자.’

주작의 숨결 하나 잃는 게 두렵다고 더 나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도전을 외면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남들과 달리 대량의 주작의 숨결을 확보할 수 있는 그리드의 경우엔 더더욱.

‘이곳은 안전할 테지.’

주작이 직접 인도한 장소다.

오랜 세월 잊힌 장소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람에게 쫓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판단한 그리드가 흉가 바깥으로 나가서 휴대용 용광로를 꺼냈다. 그리고 모루와 망치 등 각종 야장도구를 펼쳐놓던 중 숲 안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건?”

현재 판게아의 계절은 가을이다.

한데 길게 펼쳐진 대나무들 너머로 겨울의 풍광이 보였다.

새하얀 눈을 뒤집어 쓴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펼쳐져있다.

이 계절에 딱 저곳에만 눈이 내렸다고?

아니다.

저건 백린목이다.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신비의 나무.

용철처럼 단단하고 활화산처럼 흉포해서 벌목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리드에겐 템빨이 있었다.

[<신선의 벌목 도끼>를 장착하였습니다.]

‘안 그래도 구하려던 참인데 잘 됐다.’

떠엉!!

그리드의 도끼가 백린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만약 동대륙인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반으로 쪼개지는 도끼와 폭발에 휩쓸려 죽는 그리드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떠올리며 기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도끼는 멀쩡했다.

도리어 백린목의 기둥이 잘려나가며 폭발을 일으키기는커녕 잠자코 그리드의 장작이 되기를 선택했다.

떠엉! 떠엉!

그리드가 맨 처음 받았던 대장장이 퀘스트가 장작 패기였다.

그의 도끼질은 능수능란했고 백린목은 견디지 못했다.

순식간에 일대의 모든 백린목을 장작으로 만든 그리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아이템 2천 개는 만들 수 있겠네.’

시작이 좋다.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른 그리드가 주작의 숨결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화공>의 효과로 당신의 망치에 의지의 불꽃이 깃듭니다.]

[모든 작업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화공>

이 시대 최고의 명장입니다.

그의 망치는 무구를 빚고 그의 무구는 평화를 빚습니다.

결코 꺼지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이며 이는 때때로 독으로 작용합니다.

*의지 스탯 20퍼센트 상승.

*스태미나 소모속도 10퍼센트 감소.

*낮은 확률로 ‘과욕’ 발생.

★과욕이 발생할 경우 스태미나 없이도 최대 1분 더 활동할 수 있습니다. 단, 활동한 시간에 비례해서 체력 스탯이 영구히 소멸합니다. 스태미나 관리에 유의해주십시오.

*스킬 <의지의 불꽃> 생성.

<의지의 불꽃> 패시브

*아이템 제작 시 효과

모든 작업 속도 2배 상승. 제작하는 아이템에 <화공의 숨결> 귀속.

*전투 시 효과

착용하는 무기의 공격력이 의지 스탯에 비례하여 상승. 공격 대상에게 의지 스탯에 비례하는 심(心)속성과 화속성 데미지 추가. 심속성 공격은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관통합니다.

화공의 설명은 지공과 매우 흡사했다.

지공은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입니다.’로 시작한다는 점이 달랐지만 ‘때때로 독으로 작용합니다.’로 마무리되는 건 동일했으니 화공과 닮았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한 칭호였다.

반면 덕공은 달랐다.

<덕공>

이 시대 최고의 덕인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덕을 베풀어온 그를 만인이 우러러 공경합니다.

*체력 35퍼센트 상승.

덕공에는 부정적인 표현이 전혀 없었다.

기본 효과도 화공, 지공 못지않았다.

심지어 스킬 효과는 가장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스킬의 이름에 있었다.

*스킬 <원덕구> 생성

<원덕구>

덕을 베풀어온 대상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신이 직접 제작한 무구, 혹은 당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무구에게 도움 요청 시 효과

여태까지 당신이 제작한 무기를 모두 호출합니다.

호출에 응한 무기는 무기의 주인이 무기를 착용했을 때의 공격력을 따르며 당신이 지정한 대상을 공격합니다. 아이템 등급에 따른 공격 가능 횟수는 최소 1회에서 최대 6회이며, 공격 횟수 소모 시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갑니다.

이때 소모되는 내구력은 당신의 생명력과 마나 등의 자원으로 대체합니다.

*사람에게 도움 요청 시 효과

당신과 같은 세력에 속한 대상, 혹은 호감도를 쌓고 있는 대상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대상의 스킬이나 스탯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

사람들 앞에선 쓰기 힘들 것 같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리드의 손끝에선 어느새 강화된 주작의 숨결이 완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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