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8화
[그는, 다가온 재앙 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앙을 보았다.]
월드 메시지의 역대 최다 주인공은 크라우젤이다.
Satisfy 오픈 이후 3년 동안 지존의 자리를 유지했던 그는 대부분의 숨겨진 필드를 가장 먼저 탐사하고 히든 퀘스트라는 개념을 최초로 밝혀낸 선구자였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많은 업적을 세웠던 그는 ‘알 수 없는 누군가=크라우젤’이라는 공식을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리드가 크라우젤의 기록을 따라잡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활약했던 시점은 아직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있던 초창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드의 기록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초창기와 달리 고인물들이 넘쳐나는 요즘은 월드 메시지를 독식하는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아졌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라우젤의 업적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라우젤이 세운 업적들 상당수가 지금에서야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쉬워 보일 뿐이지 당시에는 20억 명 중 오직 크라우젤만이 세울 수 있었던 업적들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크라우젤이나 그리드 둘 모두 대단해 보였다.
“그리드가 이번에는 종교랑 얽힌 서사시를 쓰나 보네.”
“도미니언교가 뒤숭숭하다던데 거기 일에 끼어들었나?”
“야탄교를 소탕하는 걸 수도 있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요즘 야탄교 놈들이 너무 날뛰어서 사냥을 제대로 못하겠어.”
그리드의 네 번째 서사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그리드의 행적을 추측하며 아쉬움에 몸부림쳤다.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그리드가 테일렌 협곡에서 써내려갔던 최초의 서사시를.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더 체험하고 싶었다.
그리드가 서사시를 쓰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Satisfy를 즐기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감동과 전율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리드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서사시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작성됐다.
사람들은 오직 글귀만으로 그리드의 상황을 유추하고 모습을 상상해야했다.
그건 또 그것대로의 묘미가 있었지만, 직접 상황을 목격했을 때의 감동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했다.
“엥?”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193레벨의 평범한 플레이어 찰스빌.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던 그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포크를 떨어뜨렸다.
“왜 갑자기 바보 같은 표정을 짓냐.”
“설마 또 가스 밸브 안 잠그고 접속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그, 그리드.... 그리드가.”
“그리드가 뭐? 좀 제대로 말해.”
평소보다 천천히 이어지는 그리드의 서사시에 집중하고 싶었던 찰스빌의 친구들이 슬슬 짜증을 느꼈다.
그들에게 찰스빌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 그리드가 나한테 무기 좀 빌려달라는데?”
“....쯧.”
장난도 이렇게 생뚱맞을 수가 없다.
찰스빌의 친구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찰스빌을 노려봤다.
찰스빌은 억울했다.
“아니, 진짜라고! 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찰스빌이 허리에서 검을 풀어 손에 쥐었다.
제법 쓸만한 롱 소드.
대충 지은 것 같은 이름만큼이나 외양도 특별할 게 없는 160레벨제 레어 등급 무기다.
하지만 성능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순수 공격력과 내구력 면에서 동급의 다른 무기를 가볍게 압도했으니까.
실제로 이 검은 찰스빌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단지 성능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제법 쓸만한 롱 소드의 제작자는 ‘이름 모를 장인’으로 명시되어 있었고 이름 모를 장인의 정체가 몇 년 전 그리드를 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찰스빌은 자신의 애병이 그리드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누가 찰스 스프에 독 탔... 어?”
밥 먹다 말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모자라 검을 뽑아드는 찰스빌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친구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찰스빌의 검이 우웅, 우웅, 공명한다 싶더니 팟! 하고 사라져버린 까닭이었다.
격양된 찰스빌이 소리쳤다.
“어때! 봤냐?! 내가 그리드한테 검 빌려줬다!! 하하핫!! 그리드가 내 무기를 빌려갔다고!! 그 그리드가 내 무기를!!”
Satisfy 곳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기를 빌려달라고?”
“이거 진짠가....”
[플레이어 ‘그리드’가 당신의 무기 ‘+7양산형 한손 검’을 빌리기를 원합니다. 수락할 경우 ‘+7양산형 한손 검’의 소유권이 2분 동안 그리드에게 넘어갑니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당신의 무기 ‘+8멀리 쏘는 활’을 빌리기를 원합니다. 수락할 경우....]
[플레이어 ‘그리드’가 당신의 무기 ‘+6박살 메이스’를 빌리기를 원합....]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한날한시에 똑같은 알림창과 마주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이름 뭣 같은 무기의 소유자라는 점. 아니, 그리드가 직접 제작한 무기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찰스빌처럼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단지 수집품으로 보관 중인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받고 있었다.
[요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이 상황에 어떻게 수락해!’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사람들의 사정은 각기 달랐다.
찰스빌처럼 식사 중인 사람이 있는 반면 사냥터에서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거나 PK 중인 사람도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드의 요청에 누구나 다 응할 순 없다는 뜻이다.
물론 사정이 급하지 않아도 내켜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정말로 그리드가 내게 요청을 보낸 거라고? 그럴 리가.’
그리드가 아무리 지존이라지만 이런 생소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타인의 무기를 빌리겠다고 요청하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생소한 상황을 수상하게 여기며 경계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혹은.
‘내가 왜 빌려줘?’
별 이유 없이 외면하는 사람도 많았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사정이 어찌됐든 간에 자신의 물건을 타인에게 대가 없이 양도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애초에 그리드의 무기를 소유했다고 해서 다 그리드와 인연이 있는 건 아니다.
그리드가 만든 작품 중에서도 상등품들이 템빨단 내에서 유통될 뿐이지 그리드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었거나 하등품으로 분류되는 아이템들은 시장에서 드물게 유통되고 있었다.
현재 그리드의 요청을 받고 있는 플레이어 중 상당수가 그리드와 일면식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의 요청을 외면했다.
하지만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드와 인연이 없어도, 그리드에게 특별한 호감이 없어도 그리드의 요청을 수락한 사람들은 상황의 특수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서사시 작성 중에 이런 요청이라....”
“받아들여서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군.”
“몰라~ 그냥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빌려줄래.”
스팟-!
스파아아앗!!
수천 자루의 무기가 주인의 손을 떠나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
라우엘의 책략과 피아로의 전술,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을 비롯한 기사들의 용병술, 병사들의 분전과 오크들의 활약.
뭐 하나 부족함 없는 모습으로 승전을 거듭한 템빨국과 오크족 연합군은 순식간에 가우스 왕성까지 진격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적은 네메시스 왕이 직접 이끄는 가우스 왕실군 5만이 전부였다.
‘골드히트 공은 배신한 건가?’
최후의 요새를 수성하기 위해 떠났던 골드히트가 감감무소식이다 싶더니 어느새 적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네메시스 왕은 이미 진즉부터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허무한 결과에 큰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병사들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던 그는 굳건한 얼굴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최후의 전투다. 후회를 남기지 말고 싸워라. 가우스의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맹했노라고 세상이 회자할 것이다.”
“우와아아아!!”
네메시스 왕이 직접 선두에 서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적군의 병력이 자신들보다 10배 이상 많다는 건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미 진즉에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조국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고자 용맹하게 싸울 뿐이다.
“우와아아아....아?”
네메시스의 뒤를 쫓아 적진으로 돌진하던 가우스 병사들이 일제히 기세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섰다.
선두의 네메시스가 멈추라는 명령을 내린 까닭이다.
갑자기 왜?
가우스 왕국군이 머뭇거리는 사이 심후한 마력이 깃든 네메시스 왕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오? 좋소. 과인의 목 하나로 병사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지. 전군은 들어라! 앞으로는 템빨국의 백성으로 살아라!”
츠하하하학!!
네메시스 왕이 자결했다.
스러져가는 나라의 왕이 되어 오직 백성만을 보살펴왔던 젊은 왕이 최후의 순간에 병사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을 바쳤다.
“...허.”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피아로가 탄식했다.
네메시스 왕의 시신을 향해 묵념을 올리는 그의 비었던 손에 호미와 낫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 도열하고 있는 기사들과 선두의 정예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되돌아온 무기를 잘 추슬러 무장했다.
그렇다.
선두에 보이는 적군이 모두 비무장 상태로 서있는 모습을 목격했던 네메시스 왕은 그것을 포용의 의사로 해석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템빨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단지 자신들의 왕을 위해서 자신들의 왕에게 무기를 빌려줬던 것뿐이다.
네메시스 왕의 자결과 가우스 왕실군의 투항은 단지 네메시스 왕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황당한 사건이었다.
피아로가 기사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들의 긍지를 위해서라도 이 일은 영원히 함구하도록 하라.”
“....예.”
***
[자신을 믿고 섬기는 이들의 무구를 비로 내려 옛 신의 땅을 적신 그는,]
[신을 꿈꾸는 학살자와 덧없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언했다.]
[나의 신화야말로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리라.]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나의 자격을 증명하노라.]
서사시의 내용이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신화? 신화라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사시의 네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서사시의 완성에 기여한 플레이어 전원에게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미, 미친...”
“대박!”
“이런 제기랄!”
이내 서사시가 끝나자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리드에게 무기를 빌려줬던 이들은 궁극의 희열에 휩싸이는 반면 무기를 빌려주지 않았던 이들은 일생일대의 후회에 짓눌려 괴로워했다.
찰스빌은 전자에 속했다.
서사시가 끝나기 직전 되돌아온 무기를 손에 쥔 그가 감격에 몸을 떨었다.
[창조주 ‘그리드’와 교감하고 돌아온 당신의 무기 <제법 쓸만한 롱 소드>의 잠재력이 개화해 공격력과 내구력이 1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이 효과는 무기 당 1회만 적용됩니다.]
[<제법 쓸만한 롱소드>에 아직 다른 잠재력이 남아있습니다.]
[당신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네 번째 서사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동대륙 판게아 지역에서 지형 적응률이 50퍼센트 상승하고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네 번째 서사시를 노래하는 음유시인과 조우할 경우 특별한 버프를 얻습니다.]
***
“....?”
그리드의 부활 포인트는 라인하르트로 설정돼 있다.
하지만 가람에게 최후를 맞이했다가 부활한 그가 눈을 뜬 장소는 라인하르트가 아니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작은 흉가.
생소한 공간이다.
‘여긴 어디지?’
부활 포인트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엔 가장 가까운 도시나 신전에서 부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부활 포인트를 설정해놨을 뿐만 아니라 이곳은 도시나 신전 같지도 않았다.
창밖이 온통 대나무 숲에다가 인기척도 없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일단 자신의 상태부터 점검했다.
사망 페널티로 경험치 40.6퍼센트를 손실했고 인피면구 내구도가 1 하락했으며 이상적인 장검을 잃어버렸다.
타격이 크다.
잃어버린 무기야 언제라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인피면구는 수리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앞으로 죽을 것 같으면 인피면구부터 벗어야겠군.’
최소한 주작을 부활시키기 전까진 죽을 생각 따위 없지만 말이다.
죽기 직전에 가람의 한쪽 귀를 잘랐던 감각을 떠올린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덕공....”
여태껏 자신이 만들었던 모든 무기에 새겨진 인연을 이용하는 터무니없는 스킬이 개화될 줄이야.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과의 인연을 이용하는 스킬도 있다.
공의 칭호의 효력은 그리드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대단했다.
세컨드 클래스로 보유 중인 <지공>의 기능도 어쩌면 편린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긴, 내가 갖고 있는 지공은 진짜와 비교하면 부족하겠지.’
지공은 그리드가 쌓아올린 힘이 아니다. 브라함의 지식을 공유 받았을 뿐이며 실제 그 지식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면 덕공과 화공은 달랐다.
그리드 본인이 직접 쌓아올린 힘이자 그리드의 근간이었다.
“상태창.”
한결을 잡은 그리드가 달성한 레벨은 406.
경험치도 80퍼센트가 넘었었다.
덕분에 사망 페널티로 경험치를 40퍼센트나 날려먹었는데도 레벨 다운은 겪지 않았다.
근력과 민첩성 스탯만 글씨가 금색으로 변해있는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근력과 민첩성에 황금비가 존재하는 것처럼 다른 스탯들 간에도 황금비가 있지 않을까?’
앞으로 NPC들의 스탯 관찰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여야할 것 같다.
그리드가 계획하는 그때였다.
쏴아아아아!!
“...!?”
흉가 구석에서 어떤 물건 하나가 빛을 쏟아낸다 싶더니 그에 호응하듯이 인벤토리 속 주작의 숨결과 주작궁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