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54화 (1,044/1,794)

템빨 55권 - 5화

-데미안이네.

-맞네. 데미안이네.

-그러게.

<교황 데미안, 국대전 불참을 선언>

각국 언론이 호들갑을 떨면서 속보를 쏟아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담담했다.

올해 마왕의 정체를 이미 예견했던 까닭이다.

데미안의 국대전 불참 선언은 자신이 마왕이라고 시인하는 꼴밖에 안 됐다.

-아ㅋㅋ이제 와서 누가 속냐고~ 나였으면 그냥 침묵하거나 솔직하게 밝혔다.ㅋㅋ

-쟤 그리드 팬이라서 그리드 따라하는 거임.ㅋㅋ

-데미안 솔직히 귀여움.

데미안이 국대전에 불참할 이유는 없다.

논외 그리드, 천외천 크라우젤을 제외하고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뉘는 하이랭커 계급도에서 데미안은 천상계에 속하는 최상위 포식자.

그리드가 없는 올해의 국대전이야말로 그가 최고로 활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애초에 마왕전은 데미안에게 특화 된 종목이다.

각종 버프 스킬과 퍼센트 힐을 보유하고 있는 데미안이 마왕의 생명력 증폭 효과까지 얻으면 그야말로 불사의 대마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데미안은 유능한 인재를 대거 거느리고 있지.

레베카의 딸.

백화 상태에서만큼은 그리드의 기사들과 최소 동급이라는 최강의 NPC 세 명, 그리고 힐링 능력만큼은 데미안을 넘어선다는 교황청의 고위 장로들이 모조리 데미안의 부하인 실정이다.

그들이 사천왕이 되어서 마왕성으로 향하는 관문을 지키는 이상 플레이어들은 결코 쉽게 마왕성을 침범할 수 없었다.

-심지어 최근에 템플러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던데.

템플러는 모든 사항이 베일에 싸여있는 레베카교의 비밀 기사단이다.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이 유출한 정보에 따르면 별도의 사조직으로 운영됐던 템플러가 최근 데미안을 지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네임드 NPC일 가능성이 높은 템플러의 수장까지 사천왕으로 등장할 경우 올해의 마왕 데미안은 무적의 위용을 선보일 것이다.

작년의 마왕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데미안이 노망이라도 들지 않은 이상 국대전에 불참할 이유가 전혀 없음.

사람들의 결론이었다.

누구 하나 마왕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데미안만 고생이었다.

‘작년의 그리드 님처럼 감쪽같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놀래킬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엄밀히 따지면 아레스 때문이다.

그나마 아레스의 국대전 참가 소식이 없었을 때까지만 해도 올해 마왕은 아레스일 거라는 추측이 절반이었는데 아레스가 갑자기 국대전에 참가하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깜짝 쇼가 물 건너가다니....’

어느 채널을 틀어도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인 TV를 멍하니 쳐다보던 데미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 주변에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Satisfy에 접속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귓속말이나 외침이 쇄도해왔고 방문객으로 위장한 기자들이 교황청 곳곳에 잠입해 있었다.

이쯤 되자 제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질렸다.

‘어그로가 너무 많이 끌리니까 피곤하구나.’

데미안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타쿠의 기본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어떤 시선으로 쳐다봐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이 한창 반 그리드 감정으로 물들어있었을 때도 대놓고 그리드를 찬양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관심은 천하의 데미안이라도 부담스러웠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자 상상 이상으로 불편한 부분들이 많았다.

‘역시 그리드 님은 스고이네...’

그리드는 매일 이 이상의 관심을 받아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내색 한 번 않고 묵묵히 중심을 지켜왔다는 점이 데미안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과연 내가 인정하는 단 한 명의 남자다워.’

그리드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새삼 떠올린 데미안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의 목표는 그리드 다음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그러려면 무조건 마왕 토벌전에서 성과를 거둬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남은 한 달 내에 꼭 오르비스의 반지를 구해야하는데.’

마왕 토벌전을 앞둔 데미안이 걱정하는 부분은 화상, 출혈 등으로부터 유발되는 치유 감소 효과와 치유 불가의 저주다.

유니크 클래스 <여신의 대행자>이자 교황으로써 성장을 거듭해온 그는 무려 82퍼센트의 상태이상 저항률을 자랑했지만 그리드와 달리 완전 저항하진 못했다. 상태이상 저항률을 낮추는 디버프에 당하는 순간 크게 약화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약점을 원천 봉쇄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 바로 오르비스의 반지였다.

우는 자들의 대지에서 36시간에 한 번씩 리젠되는 밴시퀸이 극악의 확률로 드롭하는 아이템.

치유 감소와 치유 불가 효과를 면역시켜주는 레전드리급 액세서리다.

데미안은 벌써 세 달 전부터 그 반지를 노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교황의 권한으로 ‘오염 된 대지를 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성기사들을 동원, 사냥터를 봉쇄하고 독식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못했다면 오르비스의 반지를 노리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밴시퀸을 노리는 랭커들과 치열한 경쟁까지 벌여야했을 테니까.

사망 후 36시간 뒤에 ‘필드 어딘가’에서 리젠되는 밴시퀸은 본래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인 유형의 필드 보스였다.

‘....기자들이 계속 나를 쫓아다니다보면 내가 사냥터를 독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이건 심각한 문제다.

뉴스가 범람할 테고 여론의 비난이 들끓을 것이다.

데미안이 밴시퀸을 독식하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 뻔했다.

‘어디서 새로운 기사거리 안 터져주나?’

자신에게 집중 된 기자들의 이목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뉴스.

‘....뭐, 그런 엄청난 뉴스가 쉽게 터질 리 없지.’

갑자기 또 대악마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다.

‘며칠 동안 사려야겠어. 그리고 기회를 틈타서 교황청을 빠져나가자.’

한숨 쉰 데미안이 1시간 앞으로 다가온 밴시퀸의 리젠 타이밍을 애써 외면하려는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반신을 살해하였습니다.]

“....??”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월드 메시지 한 줄이 떠올랐고,

“헉! 특종이다!!”

“시, 신? 이건 또 뭐야? 이번에도 그리드야?”

교황청 곳곳에 잠입해있던 기자들이 소란을 떨더니 앞다퉈 교황청을 빠져나갔다.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개미떼의 행렬을 보는 듯했다.

“.....”

데미안의 넋이 나가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가 이내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갓리드! 오오, 신이시여!!”

교황 데미안.

오직 레베카 여신을 숭배하며 여신을 위해 기도해야하는 그가 그리드를 숭배하며 그리드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실로 천벌 받아 마땅한 짓이었다.

레베카교의 검이되 신앙의 파수꾼이기도 한 레베카의 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죄악이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모르는 척 잠자코 있었다.

그녀야말로 가장 먼저 그리드를 신격화했던 사람이기에.

***

동대륙, 노력하는 토끼 군락.

“허억.... 허억....”

한결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그리드가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시야 한쪽에 빼곡히 떠오르는 알림창을 그는 일단 무시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친 탓에 온몸의 진이 빠지고 눈까지 침침해진 그는 글씨를 읽을 여력조차 없었다.

‘딱 여기까지가 한계구나.’

몸이 쉰다고 해서 머리까지 쉬는 건 아니다.

집중력을 끌어올린 그리드가 전투를 복기하며 스스로를 점검했다.

‘아껴뒀던 스탯 포인트랑 스킬 창조권을 사용할 때가 온 것 같다.’

한결과의 대결에서 발동한 신장의 횟수는 총 3회다.

특히 화회(花回)와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썼을 때 터졌던 신장이 전황을 굳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드가 거둔 승리에서 행운이 차지한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뜻이다.

‘운이 안 따라줬으면 힘들었을 거야.’

본래 그리드는 아직 신격을 쌓지 못한 양반들을 상대로 충분한 승산을 점쳤었다.

그들이 신의 피를 이은 반신이라고 해봤자 그들의 탄생 이유와 존재 의의는 ‘소모품’에 그쳤으니까.

그래, 소모품.

신격을 쌓지 못한 양반들은 가람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오존이 계획 중인 신들의 전쟁에서 잡병 역할이나 수행할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서대륙의 그랜드마스터와 달리 어떤 특별한 스토리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한계가 명확한 존재들.

그리드는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엿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500레벨 정도만 찍어도 양반들과 싸울만할 거라고 말했던 거겠지.’

진정한 네임드 NPC들은 유저 이상의 성장력을 자랑한다.

만약 크라우젤이 양반들을 전부 다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했다면 비벼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3차 국대전이 끝났던 날 크라우젤은 분명히 말했었다.

양반은 번헬리어만큼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양반을 상대하는 전제 조건은 500레벨이라고.

그리고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말했던 조건을 이미 충분히 충족하고 있었다.

투기가 최대치에 도달한 상태의 그리드는 훗날의 500레벨 플레이어들도 감히 꿈 꿀 수 없을 스탯을 자랑했으며 렙차를 무시하는 <혈왕>으로 등극한 상태였기에.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어.’

정말 한 끗 차이였다.

신장이 한 번이라도 덜 터졌다면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덕분에 그리드는 주제 파악이 가능해졌다.

‘여력을 남겨두기엔 적들이 너무 강하다.’

펜릴을 레이드하고 405레벨을 달성한 그리드가 보유 중인 잔여 스탯 포인트는 606개.

그리고 평범한 플레이어가 레벨을 하나 올릴 때마다 얻는 스탯 포인트는 10개다.

그렇다.

그리드는 무려 60레벨에 가까운 저력을 숨긴 채 지내왔다.

‘고수는 힘을 숨기는 법이다.’는 클리셰를 의식해서가 아니다.

여태껏 힘을 숨기기는커녕 필요 이상으로 날뛰어왔던 그리드가 클리셰 따위를 의식할 리 없다.

그리드는 단지 신중했을 뿐이다.

근력과 민첩성의 1대1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는 400개의 포인트를 민첩성에 투자해야하는데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충분한 공격력과 한계치의 속도를 확보하고 있는 입장에선 역시 생명력 상승을 노리는 편이 여러모로 안정적이지 않을까?

차라리 지력을 높이면 검무에 각인 된 브라함의 마법들의 효력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등등.

그리드의 고민은 매일 같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잔여 포인트를 남겨두게 되었다.

참고할만한 대상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른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자신보다 상위의 플레이어를 참조해서 보다 효율적인 육성법을 찾게 마련인데 지존인 그리드는 가장 앞서가는 입장이었으니 참고할만한 대상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피아로, 메르세데스가 마냥 최고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스탯 상황을 참고했을 테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농부로 전직한 피아로의 스탯 비율은 검호였던 시절과 완전히 달랐고, <혜안>의 활용을 통해서 여러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메르세데스는 거의 모든 스탯을 다 성장시키는 밸런스형 기사였으므로 그리드와 성향이 매우 달랐다.

그리드는 오직 스스로 판단하고 개척해야했다.

지존의 고충이라는 것이다.

‘근력과 민첩 비를 1대1로 맞춘다는 전제는 무조건 깔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해.’

그리드는 검호 시절의 피아로를 잊지 못한다.

근력과 민첩의 비율이 완벽한 1대1을 자랑했던 피아로의 검술은 빠르되 묵직하여 궁극의 위력을 발휘했었다.

다만 이미 모든 속도가 최대치에 도달한 상태에서 400개의 포인트를 민첩성에 투자해야한다는 점은 아까웠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그냥 방치해두는 것보단 차라리 써버리는 게 당연히 이득이었다.

‘이후엔 체력에 몰빵하는 게 좋을 테고.’

혈왕으로 등극한 그리드의 공격력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드는 여태껏 싸워온 네임드 NPC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던 이유는 공격력이나 방어력보다 생명력에 있었다.

‘저력이라는 것도 일단 살아있어야 발휘하는 거지.’

연신 혀로 핥아서 스태미나 회복을 도와주는 템빨콘의 침 냄새가 슬슬 지독해지기 시작한다.

적당히 회복한 그리드가 알림창을 확인했다.

[양반 한결을 살해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주작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백호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청룡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현무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양반의 연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양반의 도포>를 획득하였습니다.]

[<양반의 갓>을 획득하였습니다.]

“....!”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양반이 숨결을 드롭할 거라고 믿긴 했지만 설마 종류별로 하나씩 다 드롭할 줄이야?

심지어 무기, 갑옷, 투구까지 세트로 드롭하다니?

과연 반신답게 부자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들뜬 그리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풍사’가 한결의 시체를 밟고 선 당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하였습니다.]

[★주의★ 당신의 기사 ‘단테’가 환국과 적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

[<반신 살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반신의 영혼이 <기묘한 마력의 돌>에 흡수되었습니다. <기묘한 마력의 돌>의 마력이 상승합니다.]

[<반신 살해> 업적을 달성하여 신위 스탯이 1 상승합니다.]

[당신의 업적을 목격한 <노력하는 토끼>들이 당신을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신위 스탯이 1 상승합니다.]

[당신의 신위가 10을 달성하여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몸 위로 빛이 내렸다.

토끼들을 절로 조아리게 만드는 신성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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