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4화
상처는 아프고 하늘은 높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한결은 넝마가 되어 추락하고 나서야 새삼 자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신이 될 존재였기에.
“....내가 이런 외지에서.”
화르륵!
한결이 품고 있는 주작의 숨결이 불꽃을 토했다.
주작은 불과 생명을 관장하는 신.
생명의 불길이 한결의 몸에 새겨진 7개의 치명상을 회복시킨다.
콰앙!!
몸을 일으키는 한결의 모습이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청룡은 바람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
전광이 되어 돌풍에 몸을 맡긴 한결은 공간이라는 개념을 없앴다.
“이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당할 성 싶더냐!!”
키야아아아아-!
한결이 휘두르는 연검이 자욱한 연기를 피어 올리며 비명을 토했다.
물과 죽음을 관장하는 현무의 힘이 편린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직 신격을 쌓지 못한 한결은 난폭한 현무의 힘을 완전히 다스릴 수 없었으나 이 순간 한계를 초월해야만 했다.
때가 되면 자연히 현무가 굴종하리라 믿고 기다려왔던 그가 탄생 이후 최초로, 스스로의 의지로 벽을 깨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한결은 직감했다.
눈앞의 인간은 신께서 내게 내리신 시련.
나는, 이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개벽을 맞이하리라.
츠칵-!
휘리리리릭!!
그리드의 등을 베며 솟구쳐 오른 연검이 동아줄처럼 꼬이더니 궤도를 비틀었다.
마치 전갈의 꼬리 같은 형태를 이루어 그리드의 목 뒤 사각에 꽂혔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그리드와 시선이 마주친 한결이 음침하게 웃었다.
‘죽어라. 너의 살과 뼈가 꿰뚫리는 가락을 장송곡으로 삼....?!’
한결의 눈이 부릅떠졌다.
채챙!
채채채채챙!!
갑자기 나타난 4개의 흑금색 손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까닭이었다.
인간의 사각을 완벽히 노렸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얼굴을 구긴 한결이 신경질적으로 손들을 쳐냈다.
‘저토록 강력한 자아가 담긴 보패를 4개나 소유하고 있다고?’
사람마다 자아의 강도가 다르듯이 보패 또한 등급이 나뉜다.
스스로 움직여서 주인과 함께 싸우는 보패는 주인과 대화하며 자신의 시각, 혹은 경험을 공유하는 보패와 함께 최상등품으로 분류됐다.
‘정녕 까다로운 놈이다.’
한결의 경계심이 증폭됐다.
파그마의 검무를 파그마보다 능숙하게 사용하고, 검무를 출 때마다 마법을 동시에 전개하며, 사신수의 힘과 마안, 그리고 보패까지 보유한 인간을 그는 도무지 쉽게 여길 수 없었다.
쩌정-!
마침 쇄도해오는 연(聯)의 첫 타격을 한결이 막아냈다.
수십 개의 검광이 이어지며 한결을 전 방위 압박했지만 바람에 몸을 맡긴 한결은 유유히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문제는,
퍼펑!!
검무마다 섞여있는 변칙적이고 강력한 마법들이었다.
하지만 한결의 특기는 검술이나 체술이 아닌 도술이었다.
촤르르르륵!!
한결의 주변으로 펼쳐지는 부적들이 결계가 되어서 마법들을 원천 봉쇄했다.
검무에 귀속 된 브라함의 공격 마법들은 한결의 부적을 쉽사리 꿰뚫지 못했다.
기초 마법의 한계였다.
다만.
쩌어어엉!!
“큭....!”
버프 마법 인챈트 웨폰은 기초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브라함의 술식으로 강화 된 그리드의 검이 파그마로부터 계승해 발전시킨 검무를 펼쳐대자 한결은 자꾸 수세에 몰리고 상처를 입었다.
콰쾅!! 쿠콰콰콰콰쾅!!
채챙-! 채채채채채챙!!
“아, 안 보여....”
지상의 토끼들이 연신 두 눈을 껌뻑였다.
투기가 최대치에 도달한 그리드의 공세와 이를 막아내는 한결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그들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형형색색의 빛들이 번쩍번쩍 충돌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사방신이 봉인당한 후부터 계속 힘이 약해져온 토순이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양반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격을 쌓은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냐, 인간....
토순이가 의문을 품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어지럽게 나부끼던 푸른 검기의 꽃잎들이 폭발을 일으킨다 싶더니 한참을 얽힌 채 싸우던 그리드와 한결이 서로 거리를 벌리고 떨어졌다.
“허억.... 허억....”
이미 오래 전에 흑화가 해제된 그리드의 호흡이 거칠다. 물약을 꺼내 마시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쿨럭, 쿨럭!”
한결은 호흡을 유지하는 반면 피를 토했다.
옷고름이 풀어지자 펄럭이는 도포 사이로 드러난 그의 단단한 상체에는 깊은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한결은 주작의 숨결을 운용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리드와 공방을 펼치는 내내 현무의 숨결을 운용한 후폭풍이다.
난폭한 숨결을 통제하느라 심력을 쏟은 한결은 잠시 정신적인 회복이 필요했다.
쉽게 말해서 마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귀한 물건을 잃게 돼 슬프겠구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한결이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현무의 숨결은 물건을 부식시키고 생명을 시들게 하는 독이다.
여전히 비명을 토하며 안개를 내뿜고 있는 자신의 검과 수백 회의 공방을 교환한 그리드와 그의 보패들이 무사할 리 만무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유리하다.’
한결이 확신을 품었다.
그의 머릿속에 3초 후의 세계가 펼쳐졌다.
녹슨 갑옷에 몸을 옥죄여 고통에 떨 인간의 모습과 완전히 풍화돼 먼지처럼 흩어질 4개의 흑금색 손....
전황은 이제 곧 내게 유리해진다.
생각하며 공습을 준비하던 한결이 이내 당황했다.
“뭐?”
현무의 숨결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던 흑금색 손들은 한결의 예상과 달리 멀쩡했다. 풍화되기는커녕 조금도 녹슬지 않고 인간의 전면에 떠올라서 인간을 보호했다.
‘재질이 뭐기에?’
예상 범위 밖이다.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공습의 자세를 물린 한결이 다시 후퇴를 염두에 뒀다. 순보의 재사용이 가능한지 점검해봤다.
순간.
쩌적-!
쩌저저저저적!!
인간의 손에 쥐어져있는 묵색 검.
전투 중 계속 불꽃을 토하며 한결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그 빌어먹을 검이 요란한 비명을 토하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파삭!
오만하기 짝이 없던 왕관, 신속의 권능이 깃들어있던 장갑, 짙은 피 냄새가 배어있던 망토....
인간이 몸에 착용하고 있던 온갖 무구들이 현무의 숨결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빠르게 풍화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망가졌어야할 갑옷과 신발이 멀쩡하다는 점은 의아했지만 한결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겼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으니까.
“핫....! 크하하하하하핫!!”
인간에게 승리하는 일이 이토록 달콤한 것이었던가?
여태껏 당연히 누려왔던 권리에 처음으로 희열을 느낀 한결이 대소를 터뜨렸다.
“우민이여! 지금이라도 엎드려 애원해 보아라! 낙오자의 검무를 얻게 된 경위! 낙오자의 근황! 그리고 가람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내게 낱낱이 고하라! 적어도 네놈이 말하는 동안만큼은 내 너의 목숨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핫핫핫핫!!”
“.....”
그리드는 침묵했다.
사실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청룡의 숨결을 운용해서 하늘을 날고, 아무리 때려도 주작의 숨결로 회복하며, 치명상은 백호의 숨결로 차단하거나 순보로 피해버리는....
괴물 같은 양반 한결을 상대하면서 그리드는 굉장히 지치고 말았다.
특히 회복 불가와 부식의 저주를 거는 현무의 숨결에 상당한 위협을 느껴서 집중력이 소모된 상태였다.
‘거세안의 성공률이 100퍼센트였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거세안의 기본 효과는 대상의 이로운 효과를 ‘일부 삭제’하는 것이며 이때의 성공률은 100퍼센트다.
하지만 대상의 이로운 효과를 ‘전부 삭제’하는 효과는 확률성 발동이었기 때문에 항상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무슨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정말로 힘든 싸움이다.
한결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기캐릭터였다.
녀석은 전투 내내 성장하고 있었다.
싸우는 족족 검술 실력이 늘어 기술과 경험의 부재라는 약점을 극복하는 중이었다.
신격을 쌓지 못한 양반은 능력치와 스킬 면에서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를 넘어서되 종합적인 실력은 그 둘과 비등할 거라고 계산했던 그리드의 예상이 가볍게 깨진 것이다.
테루찬 이상의 레벨과 능력치, 그리고 메르세데스와 비견되는 권능을 겸비했던 한결은 이젠 심지어 기술마저도 피아로 수준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필패다.’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마치 소년 만화 주인공 같은 놈과 오래 싸워봤자 좋을 게 없다.
판단한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와 대장장이 망치를 꺼냈다.
전설의 대장장이의 ‘실력’으로 순식간에 용광로의 화력을 높인 뒤 또 다시 ‘실력’으로 망가진 아이템들을 빠르게 수리해나갔다.
따앙! 따앙! 따앙!
“....?”
한결이 잠시 멍해졌다.
싸우다 말고 갑자기 쪼그려 앉아서 망치질을 시작하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에 빠졌다.
그러다가 문득.
“미친놈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인간의 무구들이 엄청난 속도로 수리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욕설을 지껄이며 몸을 날렸다.
그를 갓 핸드들이 저지했다.
부식된 검들을 대신해서 묠니르를 꺼내 쥔 녀석들은 하늘을 질주하며 어지럽게 얽히며 한결의 사각을 찔렀다.
유성 같은 기세였으나 한결은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갓 핸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갓 핸드의 의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스카아악-!
“무의미한 발악은 관둬라!”
갓 핸드의 방위선을 가볍게 돌파하고 그리드의 곁으로 도달한 한결이 검을 휘둘렀다.
단지 검이라는 물건을 세게 휘두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전투 중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만든 강력한 검술을 선보였다.
휘리리리릭!
연검이 힘껏 접혔다가 펼쳐지자 벼락같은 쾌속이 발휘되며 그리드의 미간에 절묘하게 꽂혔다.
그것을,
“캭캭!”
땅속에서 솟구쳐 올라온 템빨골들이 그리드 대신 맞아주었다.
“핫! 잡기를 많이도 익혔구나!”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 뀐 한결이 회수한 검을 다시 찔렀다.
파르르 진동하는 연검의 검날이 수백 개로 나뉘는 것처럼 화려하게 펼쳐지며 그리드를 베어나갔다.
“무엄하도다냥!!”
날다람쥐마냥 다리를 힘껏 벌리고 등장한 노에가 전격의 방진을 펼쳐서 한결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이어서 영혼 섭취를 시도하다가 역으로 베인 노에는 (XㅅX) 이런 얼굴로 널브러졌다.
“하하핫!”
벌써 몇 번의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은 웃었다.
그리드가 새로운 패를 꺼낼 때마다 도리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며 기쁨에 몸을 떨었다.
촤르르르르륵!!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앞선 공격들과 달리 기교를 섞지 않고 강력한 위력을 담은 일격이었다.
한결은 그리드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라도 그것과 그리드를 통째로 베어버릴 요량이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회(回)!”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하며 나타난 랜디가 반격해버렸다.
“큭!”
자신의 검에 베인 한결이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아!!”
도대체 내게 몇 번이나 치욕을 안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분노를 터뜨린 한결이 이를 악 물고 덤벼오는 랜디와 노에를 처참하게 베어 죽였다.
그리고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망치질에 집중하고 있는 그리드의 목에 검을 냅다 꽂았다.
푸욱-!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큭...!”
그리드가 토해내는 피가 망치와 모루를 적셨다.
하지만 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죽지 않았다.
대장장이의 인내심이 상승시켜준 방어력, 최초의 왕과 티라멧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보호막과 생명력 회복 효과가 그에게 한 번 더 견딜힘을 선사한 것이다.
“같잖은 놈이!”
한결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따앙-!
머리 위로 망치를 세운 그리드가 공격을 막아냈다.
드디어 수리된 열망의 무아검을 손에 쥔 그가 주변에 자욱하게 번져있는 현무의 안개를 확인하며 질문했다.
“너희들은 왜 매번 인간을 우습게 보는 거지?”
“....!”
분명, 그리드의 몰골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지만 한결은 도리어 위축됐다.
신격의 영향이다.
[신으로 칭송 받아 마땅한 대장장이의 위용을 과시합니다. 모든 대장장이 관련 스킬의 캐스팅 시간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삭제됩니다. 총 2회까지 적용됩니다.]
‘뭐, 뭐지, 이놈?’
발 뒤에 앉아있는 오존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신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위엄.
위대한 신들로부터 느꼈던 그것의 편린을, 한결은 이 순간 그리드를 통해서 느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하등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킨 한결이 반문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눈앞의 인간이. 고작 낙오자의 검무나 사용하는 하찮은 인간 따위가 신의 자격을 가졌을 리 없다며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더없이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도 필멸자 아닌가?”
“헛소리!”
필멸자라는 단어가 한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분노로 공포를 극복한 그가 그리드를 공격했다.
공작새의 꼬리처럼 화려한 파동을 일으킨 검기가 그리드의 가슴을 순식간에 난도질하였고 급기야 심장마저 꿰뚫었다.
오욕으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싸움이 드디어 끝나는 듯이 보였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두근! 두근!
“....!”
검을 타고 전해지는 인간. 아니, 도대체 뭔지 모를 놈의 심장 소리가 잦아들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거세지자 하얗게 질린 한결이 뒷걸음쳤다.
저벅.
그리드가 그를 뒤쫓아 걸었다.
아이템을 수리하며 명경지수 상태에 돌입했던 그리드는 찰나를 영원처럼 목격하며 깨달은 바 있다.
지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한결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이 회복되지 않고 있음이 바로 증거다.
“아이템 합체, 아이템 변신.”
열망의 무아검이 그리드의 대검과 합쳐졌다.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탐욕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쌍둥이처럼 꼭 닮은 두 자루의 검이 그리드의 양손에 나란히 쥐어졌다.
“전격 마기의 폭풍.”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현무의 숨결이 토해냈던 안개들이 먹구름의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천둥이 떨어지자 환하게 밝혀지는 안개에 한결의 가슴을 꿰뚫고 목을 떨어뜨리는 그리드의 그림자가 각인됐다.
새로운 신화의 서막이 세상에 기록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 으아아....”
상상조차 못해본 광경을 목도한 토순이와 토끼들의 귀가 쫑긋 섰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였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반신을 살해하였습니다.]
짧고 강렬한 문장 하나가 월드 메시지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