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3화
이빨 빠진 호랑이 군락.
콰르르르르릉!
고인돌이 무너져 내렸다.
청호의 짓이었다.
“터무니없는 녀석이로구나.”
피와 땀에 젖어 엉겨 붙은 장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긴 가람이 실소했다.
날카롭게 치켜진 그의 두 눈이 상처 입은 청호와 무너진 고인돌을 번갈아 쳐다봤다.
“신의 원한을 산 인간이 살아남은 전례는 없다.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십이지간의 교류 수단을 부숴가면서까지 내 발목을 붙잡아봤자 그리드는 죽게 되어있다. 놈이 설령 몇 번을 다시 부활할지라도 영원히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다가 수천수만 번의 죽음을 겪을 테지.”
어리석은 네놈의 희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게 비웃는 가람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당장 그리드를 놓쳤다고 해봤자 결국 다시 찾아내 처단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솔직히 이쯤 되자 즐거웠다.
다음에는 굴속에 숨어든 너구리가 스스로 기어 나올 때까지 연기를 피워놓고 기다리는 사냥꾼들의 재미를 느껴볼까 싶었다.
초국을 볼모로 잡아서 말이다.
청호가 이죽거렸다.
“어흥. 너 역시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면서 신을 자처하는 꼴이 딱하구나.”
“....”
가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과 양반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평등하게 대해야한다....
어떤 미친놈의 궤변이 가람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시 조용히 청호를 노려보던 그가 벌벌 떨고 있는 10마리의 호랑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살(神殺)은 불가능하니 대신 저놈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여서 화를 달래야겠군.”
“어째서 무의미한 살생에 집착하는 것이냐?”
눈을 부릅뜬 청호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자 가람이 콧방귀 뀌었다.
“내 화를 달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만?”
촤르르르륵!
가람이 연검을 채찍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리 속에 가둬놓은 청호를 마음껏 고문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즐거움에 몸을 떨었다.
다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는 청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자 보다 못한 호랑이들이 외쳤다.
“어흥! 다른 양반이 인간을 뒤쫓아갔다흥!”
“....?”
가람과 청호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호랑이들이 설명해주었다.
“두, 둘이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흥! 갓을 쓴 양반이 갑자기 나타나서 고인돌을 넘었다흥!”
“말릴 틈도 없었다흥!”
“....!”
거짓이 아님을 간파한 가람과 청호의 눈앞이 노래졌다.
청호는 그리드와 주작궁이 걱정이었고, 가람은 자신의 치부를 들키게 됐다는 사실에 초조해졌다.
‘갓 쓴 놈들 중에서 내 기감을 속일 수 있는 놈은 한결뿐이다.’
갓 쓴 놈들.
치우의 시련에서 8등 미만의 성적을 거둔 양반들을 뜻한다.
경쟁에서 밀려 신앙의 대상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한 그들은 가람을 비롯한 7인에 비해서 많이 약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이었다.
한낱 인간 따위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특히 한결은 도술을 다루는데 능숙해서 가람의 기감마저 속이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드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암습을 가하는 일쯤이야 그에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이런 빌어먹을....!”
그리드는 이미 제압당했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 값싼 목숨에 집착하며 나의 치부를 한결에게 낱낱이 고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가람이 다급히 몸을 날렸다.
청호와 호랑이들은 더 이상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다른 양반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입지가 약해지고 7인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는 바.
가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결의 입을 틀어막아야했다.
고인돌이 부서진 이상 토끼 군락까지 이동하려면 꽤 긴 시간이 소요될 테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다.
털썩.
청호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떠나가는 가람을 붙잡지 않았다.
굳이 무리해서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드는 죽었을 테니까.
그에게 주작궁을 양도한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파그마.... 내가 너의 후인에게 위험을 떠넘기고 말았다....’
커다란 죄책감에 사로잡힌 청호가 눈물을 글썽였다.
***
그리드는 양반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감은 서대륙의 전대 전설들을 연상시켰고 그리드는 위축됐었다.
그래, 양반은 강한 존재였다. 신의 피를 이은 그들이 약할 리 만무했다.
한결이 등장함과 동시에 끓어오르기 시작한 투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살(極殺).”
그리드는 승산을 점쳤다.
몇 년 전과 달리 한결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강해졌고, 양반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역시나.
푸우우우욱-!
“윽!”
한결은 그리드의 공격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허용하고 말았다.
양반의 치명적인 약점.
바로 자만심에서부터 비롯된 실수였다.
인간 따위가 감히 양반을 공격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한결은 그리드의 기습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허용하는 굴욕을 당했다.
“낙오자의 검무라.... 큭큭! 가람도 이것에 허를 찔렸던 것이냐? 녀석이 눈에 불을 켠 이유를 알겠구나.”
“....!”
살과 극살에 이어서 제(制)를 연계하려던 그리드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텅-!
그리드가 서있던 자리에 파공성이 발생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강타가 일으킨 현상이었다.
‘이 힘은....’
그리드를 묵사발로 만든 전력이 있는 기술이다.
퀘스트를 발동시켜서 그리드를 동대륙으로 유인했던 과거의 가람은 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강타를 연달아 사용해서 그리드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었다.
그리드가 가람을 두려워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형태조차 없는 공격을 남발해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괴물을 플레이어가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생각하며, 그리드는 좌절했던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진실을 엿보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강타.
가람 자신은 권능이라고 표현했던 이 힘의 정체는 사실 무형지기였다.
심(心)을 깨우친 자들이 구현하는 의지의 힘.
양반들은 단지 타고난 격만으로 의지의 힘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스스로 그것을 권능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감이 좋은 녀석이구나.”
무형의 바람을 피해?
과연 보통 인간은 아니다.
무슨 수로 파그마의 검무를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한계를 탈피한 것이 분명하다.
판단한 한결의 태도가 조금 진지해졌다.
본격적으로 바람의 권능을 다루기 시작했다.
텅, 터텅! 텅!
팔짱낀 채 곰방대를 물고 있는 한결의 주위로 연쇄되는 바람의 기운이 점차 더 빠르고 매서워졌다.
그는 허리에 띠처럼 두르고 있는 연검을 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드의 칼에 이미 두 번이나 찔리고도 그리드를 쉽게 보는 것이다.
바보라서가 아니다.
양반은 최소 수백 년 동안 인간을 지배해왔다.
기분에 따라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렸고, 또한 구원해줬다.
양반 입장에선 인간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품는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한결이 입었던 상처들은 이미 빠르게 치유되는 중이다.
주작에게 빼앗은 숨결의 힘이었다.
아니, 주작의 숨결을 논할 필요도 없이 한결이 입었던 상처는 애초에 깊지 않았다.
한낱 인간이 발악해봤자 양반을 해칠 수 없다는 증거였다.
“하핫, 일단 두 다리를 분질러주마.”
유쾌하게 웃으며 외치는 한결의 성격은 가람과 많이 달랐다.
오랫동안 신격화 되어왔던 가람은 그리드에게 작은 상처만 입어도 일일이 집착하며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던 반면,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참고 견뎌온 한결은 사소한 상처 따위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성을 유지한 채 침착하게 그리드를 공략해나갔다.
터텅! 터터터터텅!!
무형의 바람이 세찬 기운을 담고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것은 신이 될 자의 권능.
위대한 권능 앞에서 인간은 무릎 꿇게 되어있....
“....뭐?”
단언하며 미소 짓던 한결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서겅-!
무형의 바람들이 그리드에게 닿지 못하고 도리어 찢겨나가고 있었다.
[견고한 의지로 대상의 무형지기를 무력화시킵니다.]
무형지기란 의지의 힘.
상대적으로 의지가 약한 대상, 혹은 의지가 없는 물질을 손쉽게 제압하는 힘이다.
강인한 의지를 지닌 대상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나핵의 확장을 통해서 의지 스탯을 개방하고 무형지기를 직접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리드를 무형지기만으로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던 한결이 다급히 연검을 풀어 쥐었다.
어느새 짙은 적자색 투기에 휩싸인 인간이 바람의 강타들이 집결되며 발생시킨 태풍 속에 유유히 선 채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 춤은 한결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초(超)!’
필시 검기를 일으키는 검무였다.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잠시나마 상황이 불리해진다.
판단한 한결이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드가 검기를 날리기 전에 접근해서 제압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초(超)━”
그리드가 검무를 완성하는 시간은 한결의 생각보다 빨랐고,
“━연살극(超聯殺極).”
심지어 허점도 없었다.
“....!?”
4개의 검무를 동시에 췄던 거라고?
아니, 그건 파그마도 못했던....
한결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동시에 쏟아진 수십 개의 검기가 각자 극의에 이른 살기를 담고 있었으니 뭔가를 생각할 겨를 자체가 없었다.
채챙-!
“큭....!”
한결은 연검으로 크게 원을 그려 수십 개 검기의 궤도를 모조리 비틀 계획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양반의 또 다른 약점.
바로 기술과 경험의 부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파그마의 검무에 브라함식 마법.
노련한 두 명의 전설의 힘을 하나로 만들어 다루는 그리드의 궁극기를 평생 게을리 살아온 양반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펜릴의 힘>의 효과로 지지 않는 투쟁심을 발휘합니다. 대상과의 격차를 극복합니다.]
촤륵-!
츠카카카카칵!!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의 공격력이 100퍼센트 온전하게 적용되어 한결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그리드의 공격력은 반신의 자격을 갖춘 초월자의 방어력마저도 꿰뚫는 위용을 보였다.
“크아악....!”
비명조차 시원하게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한결의 전신으로부터 붉은 선혈이 낭자한다.
그리드는 이미 초연화(超聯花)의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놈....!”
뭔가가 잘못 됐다.
이놈은 낙오자 파그마의 후계자 따위가 아니다.
파그마를 아득히 넘어선 괴물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한결이 발악적으로 <전광>을 전개, 뇌광에 휩싸여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한다는 일념뿐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보내주지 않았다.
“네, 네놈은 대체....!”
한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리드 또한 청룡의 힘을 다룰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바짝 뒤쫓아 오는 그리드에게 붙잡히게 생긴 한결이 백호의 힘을 꺼냈다.
주작의 숨결이 그의 상처를 바삐 회복시키는 중이었으니, 사방신의 힘 3개를 동시에 가동시킨 셈이다.
“쿨럭!”
무리를 느낀 한결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대로 인간의 손에 죽을 순 없었던 그는 사력을 다했다.
결코 깨어지지 않는 석벽의 보호막이 그의 주변에 펼쳐졌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
콰아아아앙!!
속절없이 추락한 한결이 대지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