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 2화
하늘이 캄캄하다.
밤?
아니, 이곳은 어딘가의 지하다.
그리드가 빛의 정령을 밝혔다.
‘....동굴이군.’
심지어 아주 좁은 동굴이다. 몸을 움츠리지 않으면 어깨가 쓸리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천장에 정수리가 닿는다.
빛돌이의 인도에 따라서 구불구불한 길목들을 이동하기 시작한 그리드는 이곳이 아주 거대한 개미굴이나 토끼굴 같다고 생각했다.
“안전하다냥. 함정도 없고 몬스터도 없는 걸 이 위대하신 노에 님께서 확인하셨다냥.”
그새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노에가 말했다. 과연 지옥 제일 마수답게 모든 감각이 발달한 녀석은 레벨이 오를수록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해져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는 중이다.
[판게아 북쪽 지역의 세 번째 관문을 최초로 돌파하였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군락의 지배자 <청호>가 당신에게 호의를 베푼 덕분입니다.]
[칭호, <판게아의 신성>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의해서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주작의 수호자>
★히든 퀘스트★
주작은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동대륙의 남방을 수호해온 수호신입니다.
하지만 쫓겨난 신들에게 봉인당하고 오랜 세월 착취 당해온 주작의 힘은 이제 꺼지기 직전의 등불처럼 미약해졌습니다.
활 속에 잠들어있는 주작의 영혼이 회복할 수 있게끔 보호해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신력이 깃든 주작궁을 2년 동안 인벤토리에 보관
퀘스트 클리어 보상:<주작의 1,000번째 심장> 획득. 청호와의 호감도 크게 상승.
퀘스트 실패 조건:2년 내에 3회 사망
퀘스트 실패 시:신력이 깃든 주작궁을 환국이 회수
★또 다른 퀘스트 클리어 조건★
신력이 깃든 주작궁에 주작의 숨결 20개 부여
퀘스트 클리어 즉시 주작 해방
퀘스트 클리어 보상:<주작의 숨결>을 육체에 흡수. <주작의 999번째 심장> 획득. 청호, 주작과의 호감도 크게 상승.
동방인들은 사방신과 사신수라는 명칭을 혼용해서 쓰는 경향이 있었다.
신수는 신령스러운 동물을 뜻하는 단어로 신과는 엄연히 달랐으니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향한 사람들의 신앙이 그리 깊지 않다는 뜻이 됐다.
‘그래서 당연히 신보다 아래 등급의 존재들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제 보니 사방신도 엄연한 신이었다.
심지어 오존들이 이곳 동대륙으로 쫓겨나기 전부터 동대륙을 수호해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에게 신 취급조차 못 받았다는 건 오존과 양반들의 수작질 때문이겠지.’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청호의 말을 떠올렸다.
주작궁 등의 사신기가 사실은 사방신을 가두는 봉인이라 했던가.
양반들이 사신의 숨결을 다루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양반들은 사방신에게 도움을 받아온 것이 아니라 사방신을 지배하고 그들의 힘을 빼앗아온 것이다.
‘그래놓고 대악마가 출현하지 못하게끔 설치한 결계라고 사람들을 속이다니.... 그랜드마스터의 마지막 희망이 고작 그런 놈들이라는 게 웃기네.’
알면 알수록 음흉하고 질 나쁜 놈들이다.
대놓고 감정에 충실한 서방의 신들이 순수해보일 지경.
물론 악신 야탄과 빛의 여신 레베카는 논외였다.
그들은 함부로 재단하기가 어렵다.
인간의 관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만 생각하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복잡한 생각을 털어낸 그리드가 갱신 된 칭호의 효과부터 확인했다.
<판게아의 신성> 3단계
1단계 효과:판게아의 주민들로부터 비교적 쉽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2단계 효과:판게아 지역에서 퀘스트 획득률이 상승합니다.
3단계 효과:판게아의 모든 영물이 당신에게 호의를 품습니다.
*북쪽에 형성 된 몬스터 군락을 하나 파괴할 때마다 칭호의 단계와 효과가 상승합니다.
결국 또 판게아에서만 적용되는 효과가 생겼다.
하지만 이 가치는 결코 낮지 않다.
이빨 빠진 호랑이 군락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린 그리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호랑이들.... 괜찮으려나.”
사실 돌이켜보면, 굳이 파그마의 후예가 아니었어도 호랑이들과 적대했을 가능성은 낮다.
이빨 빠진 호랑이들과의 교류는 게으른 소 군락을 돌파한 시점부터 정해진 수순이었고, 청호는 인간을 무작정 해칠만한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착한 녀석들인데....’
그리드의 근심이 깊어졌다.
가람이 이빨 빠진 호랑이들과 청호를 도륙하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니, 괜찮을 거다.’
청호는 한 팔만 휘둘러서 그리드를 수백 미터 바깥까지 집어던진 용력의 소유자다. 사방신 중 하나인 백호의 후손이니만큼 타고난 격 자체가 양반에게 밀리지 않았다.
제아무리 가람이라도 쉽게 제압할 수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리드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베리드의 인피면구가 작동하면서 생김새와 체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리드가 선택한 모습은 노기사 단테였다.
‘그 새끼.’
그리드가 히죽히죽 웃던 가람의 얄미운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 그리드를 ‘우민’이라고 칭했던 놈이 이번만큼은 정확히 ‘그리드’라는 이름으로 불렀었다.
변장한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성격 진짜 개 같아.’
내가 예전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지금의 힘을 갖게 됐다면 가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소름 돋는 생각을 해보고 몸서리친 그리드가 문득 의문을 품었다.
‘가람은 이미 내가 그곳에 있다는 확신을 품고 추적해온 거였지?’
고작 인피면구로 가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아무리 기운을 숨겨봤자 신의 피가 흐르는 초월자인 가람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직접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가람은 그리드와 직접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의 위치를 알고 추적해왔다.
검문 당시에는 그리드를 알아보지 못했던 노불담이라는 꼽추 또한 뒤늦게 그리드의 정체를 파악하고 쫓아왔다가 가람에게 붙잡혔던 눈치였고 말이다.
‘어떤 정황을 근거로 내 정체를 알게 된 거 같은데....’
떠올릴 수 있는 정황은 하나뿐이다.
게으른 소 군락을 돌파한 것.
어쩌면 이 군락 곳곳에 감시망이 펼쳐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치가 이미 들킨 마당에 군락 토벌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청호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나머지 군락을 돌파하고 초국으로 간다.’
초국에 나를 비호하는 세력이 정말로 존재하는 건지, 초왕의 저의가 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초국은 한속봉과 수애의 소중한 고향이니까.
저벅.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는 비좁은 동굴을 드디어 탈출한 그리드의 시야가 광활한 논밭을 담았다.
사람처럼 차려입은 커다란 토끼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밭일 중이었다.
띠링~
[노력하는 토끼 군락에 입장하였습니다.]
지나온 동굴은 토끼굴이 맞았던 듯하다.
토끼들의 습격에 대비한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뽑아 쥐는 순간이었다.
“소의 등에 올라탄 덕분에 십이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쥐야 원래부터 자격이 부족했다지만, 흑우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군.”
그리드의 머리 위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기척을 이미 읽고 있던 그리드가 힐끔 시선을 올리자 쓸데없이 요염한 포즈로 나무에 걸터앉아 있는 토끼가 보였다.
그리드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감각에 날이 서있구나. 흑우의 야바위를 간파할만한 해. 애초에 청호의 호의를 받았다는 건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걸 테지.”
“쥐, 소, 호랑이, 토끼.... 십이지.... 아!”
그리드가 드디어 눈치 챘다.
이곳, 판게아 북쪽의 몬스터 군락은 십이지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본래 우리 십이지는 사방신의 신하이자 신수였다. 하지만 사방신들께서 양반들에게 속아 봉인 당하신 후 우리의 힘은 빠르게 약해졌지. 우리를 따르던 영물들도 상당수가 지성을 상실하여 요괴가 되었다.”
“.....”
“그나마 백호님의 후손인 청호와 청룡님의 후손인 지룡, 그리고 사방신들께서 특히 아끼셨던 나, 아름다운 토순이만이 간신히 이성과 힘을 유지하고 다른 십이지 무리들을 통제해왔지만 어느 날 청호가 양반에게 납치당한 뒤부터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아름다운 토순이?”
“토순이가 내 이름이다.”
“왜 하필 토순....”
“암컷이다.”
“....됐다.”
본인의 이름에 불만이나 의문이 없는 듯하다.
그리드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토순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청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대부분의 호랑이들이 요괴나 짐승으로 전락해 인간을 습격했다가 역으로 사냥 당했고, 그나마 영물의 자격을 유지한 10마리의 호랑이들도 옛 기억의 대부분을 상실해버렸으며, 원래부터 무리 없이 혼자였던 지룡은 청호가 없는 동안 호랑이들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나마 나도 간신히 내 무리의 절반만을 지킬 수 있었지.”
어깨를 으쓱인 토순이가 논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논밭에는 50여 마리의 토끼가 있었는데 그리드를 보고도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았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영물로 분류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악한 도사의 저주를 피하기란 요원했다. 지룡과 청호, 그리고 우리 토끼무리를 제외한 모든 십이지와 그들의 부하가 저주를 피하지 못하고 요괴로 전락해버린 실정이다.”
토순이의 요구는 간단했다.
“청호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인간아. 이 뒤는 혼란뿐이다. 잠들어있는 지룡의 군락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며, 지룡의 군락 이후부터 너를 기다리는 것은 이성을 상실한 요괴들의 적의와 살의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다오. 부디, 제발. 부디 주작께서 회복하실 때까지 양반들의 시선을 피해서 숨어 지내다오.”
“....”
신화급 아이템을 공짜로 얻었을 때부터 영 이상하다 싶었다.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이다.
솔직히 불쾌함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도리어 책임감을 느꼈고 의욕에 휩싸였다.
상대가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와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양반만큼은 예외였다.
양반이라는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을 뿐더러, 파그마의 후예인 자신이 양반과 엮이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자.’
그리드가 퀘스트 내용을 되짚어봤다.
신력이 깃든 주작궁을 2년 동안 보관하되 그 동안 3회 이상 사망하지 않을 것.
<주작의 수호자> 퀘스트 난이도는 다시 돌이켜봐도 터무니없이 높았다.
2년 동안 안전한 장소에서만 활동해야했고 설령 안정한 장소에 숨어 지낸다 해도 양반들이 보내는 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 뻔했다.
2년 동안 2회 미만의 사망 횟수를 유지해야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퀘스트 클리어 조건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주작의 숨결 20개를 획득하는 순간 즉시 클리어가 가능했다.
보통 사람들 입장에선 2년 동안 안 죽고 버티는 일보다 주작의 숨결 20개를 얻는 일이 훨씬 더 힘들고 불가능하게 보이겠지만 그리드는 반대였다.
그리드에겐 국대전 금메달 보상을 양도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동료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더군다나 주작의 숨결 획득 루트는 국대전 뿐만이 아니다.
“양반들을 죽이면 놈들이 품고 있는 사신의 숨결도 토해내겠지?”
“....!”
“맞지?”
“서, 설마, 너....! 신들과 직접 싸울 작정이더냐!”
토순이가 기겁했다.
아무리 청호의 선택을 받았다지만 그래도 인간에 불과한 그리드가 양반과 맞서 싸울 생각을 품고 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계획은 바뀌지 않아. 남은 군락을 모조리 돌파하고 힘을 키운 다음 양반을 사냥한다.”
“궤, 궤변이다...! 허무맹랑하고 기고만장하다!!”
순간.
콰아아앙!!
그리드가 지나왔던 토끼굴이 폭발하며 추적자가 등장했다.
가람과 똑같은 청색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사내였는데 그를 본 토순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양반....!”
양반, 한결이 씨익 웃었다.
“가람의 뒤를 밟았다가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군. 우민이여, 네놈은 가람에게 어떤 수모를 안겼던 것이냐? 도대체 뭘 어쨌기에 가람이 너를 보고 눈이 뒤집어졌던 거지? 자세히 말해보거라.”
“어서 피해라! 우리가 시간을 벌겠다!”
토순이와 토끼들이 그리드의 앞으로 나섰다.
죽음마저 결사한 표정들이었으나, 한결은 그들이 하찮다는 듯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자, 어서 말해보아라. 가람이 얼마나 바보 같은 녀석인지 내게 낱낱이 고하라. 너의 말 한 마디로 내가 가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양반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자만이 신민들에게 모습을 공개하고 신격화된다.
소수에게 신앙을 집중시켜서 빠르게 신을 육성하겠다는 오존들의 계획이었는데 한결처럼 선택 받지 못한 입장에선 매우 분하고 억울한 처사였다.
“하하! 어서 고하라!”
급히 환국을 떠나는 가람을 우연히 발견하고 추적해왔다가 건수를 문 한결은 한껏 들떴다. 자신이 가람을 대신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상상하자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는 그였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애송이가.”
“....?”
“....?”
한결과 토끼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경악에 휩싸였다.
전광에 휩싸인 그리드가 어느새 한결의 후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이 기술은....!? 크, 크아아아악!!”
아직 신격을 쌓지 못한 양반.
그리드에게 선공을 허용한 녀석이 난도질당하며 피를 토하자 토끼들의 큰 귀가 쫑긋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