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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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5권 - 1화
가까이서 본 청호의 체격은 이빨 빠진 호랑이들보다 훨씬 더 컸다. 183센티미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그리드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이마의 王 무늬를 간신히 엿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청호에게 위압되지 않고 도리어 매료당했다.
청호는 아름다웠다.
끝이 백색으로 빛나는 푸른 털은 그리드의 왕관에 박혀있는 보석들을 경박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품격이 있었고, 호랑이를 상징하는 흑색의 줄무늬는 그리드의 손기술로도 재현하지 못할 복잡성과 미학을 겸비하며 푸른 털과의 조화를 이뤘다.
“파그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청호가 양팔을 뻗어왔다.
역삼각형의 우람한 등과 푸른 털 너머로 꿈틀거리는 근육들 모조리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스파아아앗....
떨어지는 낙엽들과 함께 나부끼던 푸른 검기의 꽃잎들이 목적을 잃고 흩어진다.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그리드는 청호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익숙한 눈빛이다.
칸과 몇 달 만에 재회할 때면, 칸이 늘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반겨주곤 했었다.
강산이 수십, 수백 번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왔을 청호의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것은 그리움, 그리고 환희였다.
“파그마!!”
와락!!
거리가 좁혀지자 껑충 뛰어오른 청호가 그리드를 힘껏 끌어안았다.
휘청, 청호의 무게가 몸을 짓누르자 그리드는 쓰러질 뻔했지만 온 힘을 다해서 버티고 섰다. 그리고 얼굴에 뺨을 마구 문질러오는 청호의 행동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파그마! 살아있었구나!!”
청호가 엉엉 울었다.
평소에는 세월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을 검은 눈동자가 눈물로 일렁거렸고, 분홍색 코끝에는 투명한 콧물이 찔끔 맺혔다.
그리드의 것보다 3배 이상은 넓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길 잠시.
“킁킁! 킁킁? 히야악!!”
그리드를 껴안은 채 울고, 물고, 빨고, 비비고 난리를 치던 청호가 갑자기 쭈뼛 털을 세우며 기겁했다.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네, 네놈! 파그마가 아니로구나! 어흥!!”
“....이제 와서 두 눈 부릅뜨고 위협해봤자 안 무서운데.”
뒤로 황급히 물러나더니 두 발로 서서 포효하는 청호를 그리드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흉터들이 청호의 몸 곳곳에 가득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흉터들이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들이었다.
청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정말.... 정말로 파그마가 아니구나.”
당연히 파그마인 줄 알았다.
곰방대나 뻑뻑 빨며 천박하게 행동하는 다른 양반들과 달리 정숙한 몸짓으로 춤사위를 펼쳤던 파그마의 모습과 눈앞 인간의 모습이 잠시 겹쳐보였었으니까.
하지만 눈앞 인간은 파그마가 아니었다.
호랑이인 청호는 인간의 생김새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눈치 챘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 갇혀 숨죽여 울고 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파그마의 상냥한 목소리와 햇살처럼 따스했던 냄새를, 청호는 수백 년 동안 잊지 않고 그리워했기에.
“인간. 네가 왜 파그마의 춤을 추는 것이냐?”
으르렁거리며 그리드를 경계하던 청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헛된 거짓말은 상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기만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파그마가 죽으면서 남겼던 기술을 내가 물려받았다.”
“어흥.... 그렇구나. 파그마는 결국 죽었구나.”
의외로 청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소식을 접하듯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다만, 피어오르는 슬픔을 감추진 못했다.
우람한 체격과 달리 동글동글한 녀석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 동굴로 돌아갈까흥?”
“그, 그러자흥. 가서 마늘이나 까자흥.”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눈치를 보던 이빨 빠진 호랑이들이 살금살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멀쩡한 이빨을 뽑힌 경험 탓인지 청호를 어지간히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한데 귀를 쫑긋 세운 청호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어흥! 마늘? 이빨 빠진 놈들이 무슨 수로 마늘을 씹어 먹겠다는 것이냐?”
눈을 매섭게 뜬 청호의 얼굴에서 귀여운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제왕의 위엄이 드러나며 그리드마저 긴장시켰다.
호랑이들이 사색이 되었다.
“따, 딸꾹! 트, 틀니! 틀니로 씹어 먹는다흥!”
“틀니?”
그리드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청호가 뒤늦게 호랑이들의 이빨을 발견했다.
“어흥! 틀니를 어디서 난 것이더냐!!”
“어, 어떤 인간이! 불쌍하다고 줬다흥!”
“....!”
청호가 매우 놀랐다.
북두산 일대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그는 방문자의 기척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한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호랑이들에게 틀니를 선물해준 사건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호의 기감을 속일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밖에 없었다.
“어흥. 혹시 패랭이를 쓴 인간이더냐?”
“그, 그렇다흥. 커다란 봇짐을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 없는 물건이 없었다흥.”
“황길동 그 바보가....”
‘황길동!’
수 년 전, 크라우젤조차도 어쩌지 못했던 판게아를 위기에서 구한 큰 영웅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리드가 호랑이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내놓아라. 어흥.”
“뭘 말이냐흥?”
“틀니, 압수다. 어흥.”
“.....”
청호는 10마리 호랑이들의 틀니를 모조리 빼앗아버렸다.
덕분에 이름 그대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호랑이들은 의기소침해서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다.
일련의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그리드가 질문했다.
“호랑이들의 이빨을 뽑은 이유가 마늘과 관련이 있는 거야?”
파그마의 후인이기 때문일까.
청호는 그리드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정확히는 쑥과 마늘이니라. 10년 전쯤, 어느 사악한 도사가 영물을 미혹하는 신령한 쑥과 마늘을 북두산 일대에 뿌리고 도망쳤는데 그걸 못 먹게 하느라 녀석들의 이빨을 내가 죄다 뽑아버렸다. 어흥.”
“쑥과 마늘?”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설화를 떠올린 그리드가 설마하며 물었다.
“백일 동안 먹으면 인간으로 변하는?”
“어흥. 아니다. 10년 동안 먹으면 신선으로 변하느니라.”
“시, 신선? 뭐야? 신선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거였어?”
“어디까지나 영물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니라. 인간이 신선이 되려면 꾸준히 수행하여 등선하는 수밖에 없느니라.”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그리드의 머리가 도리어 복잡해졌다.
“사악한 도사는 판게아 일대의 짐승들을 흉포한 괴물로 만들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영물은 왜 도리어 신선으로 만들려고 한 거지? 신선은 선한 존재잖아? 수많은 사람들을 해친 사악한 도사가 어째서 신선을....”
사악한 도사는 정확히 두 명이다.
한 명은 큰 영웅 황길동에게 토벌당한 정체불명의 도사.
바로 그가 판게아 일대의 짐승들을 괴물로 만들고 북두산에 쑥과 마늘을 뿌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판게아 성 지하 던전에 숨어있던 사령술사 아루베.
아루베는 사악한 도사와 한 패였는데 철갑귀 부대로 판게아를 장악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드는 정체불명의 도사가 아루베에게 고용 된 용병쯤으로 인식해왔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전혀 아닌 듯했다.
정체불명의 도사는 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아루베는 단지 그 과정에서 이용당한 허수아비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청호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줬다.
“신선이 선한 존재인 것은 맞느니라. 하지만 인간이든, 영물이든 신선이 되는 순간 신들의 사회에 종속되고 만다. 신의 시야에 항시 노출되며 신의 뜻에 거역하기 힘들어지는 것이지. 어흥. 특히 영물은 인간에 비해서 지능이 낮거나 단순한 경우가 많아 더욱 더 신의 뜻에 거역할 수 없느니라.”
“....신선이 선해봤자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이 선하지 않은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가?”
“그렇다. 어흥. 그리고 공교롭게도 신들은 마냥 선하지 않느니라.”
그리드도 알고 있다.
특히 동대륙의 신들은 인간을 개떡으로 아는 양반들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인간의 관점에선 선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어흥. 사악한 도사의 정체는 환국의 하수인일 것이다. 신들의 명령을 받아 짐승들을 요괴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차단한 다음 신선을 육성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앞뒤가 맞는 추측이었다.
서대륙의 신들에게 복수해야하는 동대륙의 신들은 무력을 키워야하는 입장.
양반처럼 신선을 육성해서 군대로 삼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 사악한 도사가 판게아의 주작궁을 훔쳐갔다는데....?”
주작궁을 비롯한 동대륙의 사신기는 대악마의 출현을 차단하는 일종의 결계다.
양반들이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신기 덕분이었다.
사신기의 소실은 양반의 신격화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뜻이며, 실제로 양반들은 사신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한데 환국의 하수인이 사신기를 빼돌렸다?
어폐가 있었다.
청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흥? 주작궁은 내가 훔쳤느니라.”
“....!”
“갑자기 사라진 주작궁을 보고 당황한 인간들이 사악한 도사의 짓으로 여겼나보구나.”
뒤적뒤적.
청호가 자신의 풍성한 배털을 뒤지더니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주황색 활을 꺼냈다. 커다란 장궁이었지만 청호의 큰 손에 들리자 마치 단궁처럼 보였다.
“주, 주작궁...!”
파그마의 눈으로 활의 정보를 엿본 그리드가 경악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주작궁 원본을 만나게 될 줄이야?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를 빤히 쳐다보던 청호가 질문했다.
“인간, 파그마는 양반들에게 붙잡혀서 학대당하던 나를 구해준 뒤 그대로 적해를 건넜었다. 어흥. 솔직히 나는 파그마가 적해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왔느니라. 하지만 파그마는 무사히 적해를 건너 서방에 도착했던 것일 테지?”
“그래.”
“그곳에서.... 파그마는 어떻게 살아갔느냐? 거기서도 불에 철을 녹이고 망치로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조롱 받았느냐?”
“파그마는....”
파그마에 대해서 말할 거리야 수도 없이 많다.
누군가에게는 배신자였고, 누군가에게는 악인이었다.
하지만 영웅이기도 했다.
“파그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다. 그리고 세상을 구했어.”
“그렇....구나.”
방긋 미소 짓는 청호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리드는 급히 노에를 소환했다.
이대로는 노에의 입지가 약해질 것만 같다는 그런 묘한 불안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냥핫핫핫! 지옥 제일 마수 노에 님 등ㅈ....자냐아아앙!!”
뿅~!
짧은 팔 다리를 활짝 펼치며 등장한 노에가 털을 쭈뼛 세우더니 그리드의 등 뒤로 숨었다.
여태껏 노에가 두려워한 대상은 대악마와 드래곤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사방신의 후손이라는 청호의 격이 그들 못지않다는 뜻이 됐다.
“이,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
바들바들 떠는 노에를 품에 안은 그리드가 녀석의 작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였다.
“동대륙에 넘어온 이유가 뭐지? 어흥.”
청호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시선은 노에에게 꽂혀있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꼬랑지를 연신 살랑이고 있었다.
그리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해지기 위해서. 강해져서 가람을 죽이려고.”
잊지 못한다.
나 하나 잡자고 서대륙의 모든 대장장이를 판게아로 불러들여 대학살을 자행했던 놈의 사악함을.
그런 놈이 다름 아닌 나를 노리고 있다.
반드시 없애야한다.
없애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정말로 처참하게 짓밟힐 것이다.
“....닮았구나.”
그리드의 눈빛에 깃든 의지를 읽은 청호가 감회에 젖었다.
반드시 강해져서 돌아와 환국을 바로잡겠다고 외쳤던 파그마의 옛 모습을 떠올린 청호는 그리드를 보낸 사람은 파그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리드에게 주작궁을 건네줬다.
“인간들은 사신기가 대악마의 침입을 막는 결계라고 믿는 눈치이지만 사실은 사방신을 가두고 있는 결계니라. 네가 사방신들의 봉인을 풀어준다면 사방신들이 네게 양반과 대적할 힘을 줄 것.... 어흥!!”
[신화 등급의 아이템, <신력이 깃든 주작궁>을 획득하였습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무려 사방신의 힘이 깃든 신화급 아이템.
그것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물 받은 그리드가 얼떨떨해하는 순간 청호가 포효했고 폭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핫, 반가운 얼굴들이 나란히 모여 있구나.”
돌풍에 흩날리는 흑색 장발과 청색의 도포.
파직! 파지직!!
창공을 장악하며 등장한 사내는, 이제 그리드에게도 익숙한 청룡의 기운을 발산하며 숲을 격동시켰다.
“가람!!”
“피, 피하십시오, 템빨왕 전....”
콰착!!
기괴한 생김새의 꼽추.
판게아에서 서대륙 출신 플레이어들을 검문하던 노불담이 간신히 말하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의 두꺼운 목을 한 손으로 거머쥐고 있던 가람이 손에 힘을 주자 그대로 목이 꺾여 죽은 것이다.
손에 묻은 피가 더럽다는 듯이 털어낸 가람이 히죽 웃었다.
“그리드여. 동서남북,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온 누리에 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없다. 네가 적해를 넘어온 순간 너의 죽음은 필연이 된 것이다. 한속봉과의 인연 때문인지 너를 도우려했던 초국의 일부 잔당들과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초왕 또한 조만간 모조리 죽을 테고 말이지.”
“개자식이!”
파지직!
그리드가 청룡의 부츠에 귀속 된 <전광>을 가동시켰다.
“네깟 놈이 청룡의 힘을?”
가람의 눈살이 찌푸려졌고, 그리드는 그대로 흑화와 대장장이의 분노, 그리고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호가 한 발 빨랐다.
“파그마의 후예여, 우선 주작의 봉인을 풀어라.”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은 청호가 그리드를 숲 한가운데로 집어던져버렸다.
“윽...!”
무시무시한 힘.
의지와 달리 수백 미터를 날아 숲 한가운데에 떨어진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 청호와 가람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호랑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떡을 줬으니 은혜를 갚겠다흥!”
“뭐, 뭐? 잠깐!”
그리드가 어찌할 새도 없었다.
청호가 그리드를 집어던진 장소엔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유적이 존재했는데 호랑이들이 그리드를 그곳에 떠밀어 버리자 그리드는 어느새 새로운 장소로 워프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