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21화
‘역시 갓 핸드가 최고야.’
게으른 소 군락을 돌파하고 밀림에 진입한 그리드는 낭패를 느꼈었다.
긴 세월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우거진 밀림의 상태가 엉망이었던 까닭이다.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 눈과 피부를 찌르는 수풀, 입과 귀로 파고드는 독충, 불쾌한 습기와 찌는 듯한 열기, 덩굴에 숨겨진 늪지대 등등.
단지 밀림을 이동할 뿐인데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어지간한 인던 클리어 난이도와 비견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갓 핸드가 있었다.
촤륵!
촤촤촤촤촥!!
각자 한 자루씩의 검을 쥐고 회전하는 갓 핸드들의 위력은 군대에서 돌리던 제초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수풀을 베어내며 그리드에게 시야와 안전을 제공했다.
“시원하다.”
그저 걷기만 하면 길이 열리니 마냥 즐겁다.
지금의 그리드에겐 뜨거운 검풍조차도 신선한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갓 핸드를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해보면서, 그리드는 뒷짐 진 채 느긋하게 걸었다.
그는 흑우에게 얻었던 전리품들을 점검해보는 중이었다.
<어리석은 도박꾼의 주사위>
등급:유니크
내구력:5/5
*1회 사용 시마다 내구력 1 감소
*수리 불가
흑우의 한이 서린 주사위입니다. 원하는 숫자를 반드시 뽑을 수 있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0.1
우선 주사위.
용도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순 오락물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하는 숫자를 반드시 뽑는다.’는 기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특정 상황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물건이야. 그리고 흑우의 뿔은 미노타우로스의 뿔의 완벽한 상위 등급 재료고.’
현재 시장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명궁은 미노타우로스의 뿔로 제작한 것이다. 그보다 상위의 재료인 흑우의 뿔로 만드는 활은 ‘최소’ 레전드리 등급이 보장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론은 주사위와 흑우의 뿔 모두 대단한 명품이라는 뜻.
게으른 소 군락 정벌은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성취감 이상의 아쉬움을 느꼈다.
원인은 칭호에 있었다.
<판게아의 신성> 2단계
1단계 효과:판게아의 주민들로부터 비교적 쉽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2단계 효과:판게아 지역에서 퀘스트 획득률이 상승합니다.
*북쪽에 형성 된 몬스터 군락을 하나 파괴할 때마다 칭호의 단계와 효과가 상승합니다.
‘역시.... 단계를 아무리 높여봤자 판게아 내에서만 쓸모 있는 칭호일 것 같은데.’
이름부터가 판게아의 신성이니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아쉽다.
지금의 판게아는 완전히 유령도시였으니까.
퀘스트 획득률 상승?
아무 의미 없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민 자체가 없는 마당에 퀘스트는 개뿔....
저벅저벅.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쉬지 않고 풀을 베며 길을 열던 제초기들. 아니, 갓 핸드들이 저 멀리 허공에 둥둥 떠오른 채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대기하는 것을 보아 밀림의 끝에 도달한 듯싶었다.
“방어 태세.”
그리드가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자 갓 핸드들이 일제히 검날을 세웠다. 그리고 이내 그리드의 주변을 빠르게 선회했다.
일종의 검막이다.
검성 크라우젤과 비반의 검막처럼 절대방어의 효력을 자랑하는 거창한 기술은 아니었지만, 갓 핸드를 응용해 펼친 그리드의 검막 또한 충분히 훌륭했다. 그리드를 덮쳐오는 모든 위협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기세였다.
“와....”
갓 핸드의 안내를 받아 밀림의 끝에 도달한 그리드가 탄성을 터뜨렸다.
확 트인 시야를 덮쳐오는 명미한 풍광이 그를 감탄시켰다.
붉은 토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단풍이 자색 하늘을 배경 삼아 신비롭고 몽환적인 색의 조화를 이룬다. 풍경의 중심에 우뚝 솟은 민둥산은 태양과 대칭을 이루어 황금처럼 빛났다.
서대륙의 경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풍치였다.
‘이곳이 이빨 빠진 호랑이들의 군락....’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던 그리드가 언덕을 껑충 뛰어내렸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방인의 발길에 놀란 것일까.
적색의 토지가 점토처럼 꿀렁이며 그리드를 경계한다.
‘....큰 문제는 없겠군.’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까지 맡아가며 지질을 파악한 그리드가 판단하는 그때였다.
어흥~!
일대의 단풍이 흔들린다 싶더니 10마리의 호랑이가 등장했다.
신기하게도 인간처럼 이족 보행하는 호랑이였다.
신장은 그리드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어깨는 곰보다 넓었다. 과연 호랑이 아니랄까봐 온 몸의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까지 보태 굉장히 위협적인 생김새를 자랑하는 녀석들이었다.
‘뭐야? 멀쩡하잖아?’
게으른 소들은 이름 그대로 게으른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호랑이들은 이름과 달리 이빨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을 넘어서 보기 드문 건치였다. 치석 하나 끼지 않고 하얗게 빛나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그리드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들하고 달라. 힘든 상대가 될 수도 있겠어.’
갓 핸드에게 묠니르를 쥐어주고 열망의 무아검을 양도 받은 그리드가 기수식을 취했다. 호랑이들에게 포위당하지 않게끔 거리를 조절하며 언제라도 검무를 펼칠 수 있도록 대비했다.
“떡!”
“...?”
“떠억!”
“....!”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금방 덮쳐올 줄 알았던 호랑이들이 생뚱맞은 단어를 외쳐댔으니 놀랄 수밖에.
“떡! 떡! 떡! 떡!!”
그리드를 포위하려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호랑이들이 연신 소리친다.
자꾸 요상하게 움직여서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그리드를 성난 눈으로 노려보던 놈들이 이내 짜증을 표출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말 좀 하자, 말 좀! 말 좀 하게 가만히 있어봐!”
“....!”
“나 때는 말이야! 인간들이 호랑이 꼬랑이만 봐도 놀라서 꼼짝도 못했다 이거야!”
“....!”
“네놈도 좀 가만히 있어라! 방정맞게 촐싹거리지 말고!! 체구를 보아 성체 같은데 다 컸으면 엉덩이가 묵직할 줄 알아야지!! 엉덩이 가벼운 수컷을 어느 암컷이 좋아하겠느냐!! 네놈 그러다가 평생 짝짓기 못할 걸!!”
“....”
Satisfy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몬스터가 어디 한둘인가?
호랑이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드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호랑이들의 말투가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수 시절에 살던 동네 어르신들의 말투를 연상시켰다.
자꾸 으름장을 놓는 녀석들을 그리드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드디어 그리드를 포위하는데 성공한 녀석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어흥!!”
“파(波).”
다수를 상대할 땐 이게 최고다.
이제 거의 즉발기로 변한 단일 광역 검무를 즉시 전개하여 검기를 사방으로 발출한 그리드가 왼쪽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곧바로 평타를 연계해서 우측에 있는 호랑이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한데.
쩌엉-!
“....!”
그리드의 기습은 사전에 차단되고 말았다.
호랑이가 자신의 목으로 꽂혀오는 열망의 무아검을 단단한 이빨로 물어 막은 것이다.
부르르, 상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보아 그리드보다 근력은 낮지만 큰 차이는 없어보였고 민첩성은 거의 비등해 보였다.
앞서 만났던 게으른 소들의 능력치는 체력에 편중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대인전에 특화된 능력치다.
“가만히 서서 경청하라니까 다짜고짜 칼을 휘둘러...!? 하여튼 요즘 것들은....!”
‘과연 호랑이다 이건가.’
그리드는 호랑이들의 외침에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놈들과의 대화에 괜히 집중했다가는 정신이 황폐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맹수의 왕답게 종족 보너스가 우월한 것 같으니 정예 몬스터라고 생각하자.’
판단한 그리드가 대장장이의 분노로 근력을 증폭시킨 후 열망의 무아검을 회수했다.
그러자.
“아흥!”
열망의 무아검을 물고 있던 호랑이가 비명을 토했다. 찔끔, 눈물마저 글썽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틀니?”
건치의 비밀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무아검 검면에 박혀있는 틀니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그리드에게 호랑이들이 숙연한 얼굴로 말했다.
“떡.... 우리는 부드러운 떡이 먹고 싶다....”
[<판게아의 신성> 효과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떡 하나 주자>
★히든 퀘스트★
이빨 빠진 호랑이 군락의 호랑이들은 이빨을 잃은 뒤부터 본능을 거세당했습니다.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고, 떡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의 신세를 가엽게 여긴 큰 영웅이 그들에게 틀니를 선물해주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떡을 그리워합니다. 옛날 옛적에 지나가는 장사꾼들을 협박해 빼앗아 먹던 말랑말랑한 떡 말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빨 빠진 호랑이들에게 떡을 제공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빨 빠진 호랑이들과의 호감도 상승
퀘스트 실패 시:이빨 빠진 호랑이들과 적대
“.....”
판게아 ‘지역’에서 퀘스트 획득률 상승.
<판게아의 신성>의 제2단계 효과를 즉시 체험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잠시 침묵했다.
네임드 보스들이 퀘스트를 주는 경우가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보스도 아닌 일반 몬스터에게 퀘스트를 받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최초가 아닐까?
머리를 긁적인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인절미를 꺼냈다.
템빨단 2군 소속 요리사 쉐리가 만들어준 간식이었다.
템빨단원들의 출신이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해서 여러 나라의 전통 간식을 만들어온 그녀의 작은 배려가 큰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살살 녹는다흥.”
“옛날 옛적에 먹었던 송편보다 더 맛있다흥.”
“잇몸 안 아프고 좋다흥.”
달콤하고 고소한 콩가루 맛에 취한 호랑이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떡을 즐겼다.
‘의외로 귀엽네....’
어쩌면 호랑이들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영물이 아니었을까?
사악한 도사 아루베에 의해서 타락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리드가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히든 퀘스트★ <떡 하나 주자>를 클리어 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들과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습니다! 호감도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자, 이제 본전을 찾을 때다.
발톱 끝에 묻은 콩가루를 쪽쪽 빨아먹는 호랑이들에게 그리드가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빨은 어쩌다가 빠진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숲으로 내려온 북두산의 왕이 우리의 이빨을 죄다 뽑아갔다. 어흥.”
“북두산?”
“저기.”
호랑이들이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민둥산을 가리켰다.
어느덧 태양이 기운 까닭일까.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금색으로 빛났던 민둥산이 깊은 어둠의 그림자에 잠식되어 있었다.
“왕은 뭐하는 놈인데?”
“청호(靑虎).... 우리와 달리 털 색깔이 푸른 호랑이다.”
“파랑 호랑이라....”
“푸른 호랑이다. 사방신 중 하나인 백호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흥.”
“백호의 후손?”
여태껏 그리드가 만나온 군락의 보스들은 분명 하나 같이 강했다.
하지만 사방신의 후손까지 튀어나올 줄이야?
‘격부터 다른 존재잖아?’
이빨 빠진 호랑이들이 쥐, 소와 비교해서 유난히 수준이 높았던 것은 이를 위한 복선이었나?
그리드가 조금 긴장했다.
“놈이 너희들의 이빨을 왜 뽑아간 거지?”
“어흥.... 모르겠다. 왕은 아주 먼 옛날에 양반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부터 성격이 이상해졌다. 말수도 적어지고 산속에 혼자 틀어박혀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담배 피던 시절에는 같이 담배도 말고 아주 상냥했었는데....”
“양반...!”
희귀한 동물이랍시고 끌고 가 구경거리로 삼았던 건가?
가람의 성격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어쩌면, 청호는 양반에 의해서 망가졌을 수도 있다.
‘만나보면 알겠지.’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큰 영웅의 정체는 역시 신선인가? 너희들에게 틀니를 준 사람 말이다.”
판게아를 위기에서 구했던 영웅.
그는 큰 독 쥐의 군락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판게아를 구한 후 쭉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뜻.
무릉도원이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드는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자는 신선이 아니었다흥.”
“뭐?”
신선도, 양반도 아닌데 그토록 강한 존재가 있다고?
그리드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 여기서 썩 꺼져라!!”
커흐흥!!
북두산 꼭대기에서 천둥 같은 포효가 울리더니 숲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시대의 강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영웅왕의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초월자의 감각이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스카아아앗....!
숲의 풍경과 그리드가 동화되어갔다.
자색 하늘과 적자색의 투기가 뒤섞이면서 그리드의 존재감이 숲처럼 거대해졌다.
“처, 청호...!”
눈이 휘둥그레진 호랑이들이 사색이 되었고,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다만.’
산을 날 듯이 뛰어 내려오는 작은 점을 시야에 넣은 그리드는 엄숙하고 아름다운 검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그의 양팔이 나선을 그리자 푸른 검기의 꽃잎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가람을 쓰러뜨려야하는 내가 이런 곳에서 고꾸라질 순 없....?’
그리드의 머리가 굳어버렸다.
어느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청호가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고 있었다.
놈은, 분명히 그리드를 보고 울었다.
“파그마아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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