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19화
‘좀 애매한데?’
철강시의 머리통을 박살낸 그리드가 피에 젖은 황금 망치를 탐탁찮게 바라봤다.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 망치.
핵세타이아 신과 겨룰 때 만들었던 제작용 아이템이다.
성능이 워낙 탁월한 까닭에 <탐욕>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남겨둔 최후의 파브라늄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능이란 당연히 아이템 제작 관련 성능을 뜻한다.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 망치는 전투용 무기가 아니므로 공격성이 취약했다.
물리 공격력 870.
어지간한 에픽 등급 무기보다 나은 공격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다. 별도의 전투력 강화 옵션은 4대 신의 가호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도검’이 아닌 탓에 <그리드의 검무>의 패시브 효과 또한 적용받지 못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에엑!
키아악!
풀썩, 풀썩!
강시들이 너무 쉽게 쓰러졌다.
그리드가 너무 강한 탓이다.
펜릴을 레이드하고 405레벨을 달성한 그리드의 우월한 스탯과 각종 칭호, 그리고 ‘모든 종류의 무기’의 공격력을 상승시켜주는 웨폰 마스터리 스킬 탓에 그리드는 제작용 망치로도 철강시를 쉽게 박살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눈에 띄지 않을 것.
그리드가 이번 모험에서 지켜야할 기본 규칙에 어긋나게 생긴 셈이다.
‘이건 안 되겠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느낀 그리드가 슬그머니 아이템을 스왑했다.
신과 대적하는 대장장이 망치 대신 공격력이 290에 불과한 광룡망치를 꺼내들었다.
퍽퍽! 퍽퍽퍽!!
‘음, 이제야 얼추 맞는군.’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속도로 강시를 처치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칭호 <한 방에 한 놈!> 때문에 크리티컬 데미지가 너무 강하게 터지긴 했지만, 공격 속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 그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랭커라고 오해하지 않겠지?’
2초당 3회.
최대한 느리게 망치를 휘두르며 철강시들을 천천히 쓰러뜨린 그리드가 힐끔, 헤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그리드에게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뒤늦게 이유를 깨달은 그리드가 번헨 열도에서 습득했던 스킬들을 다급히 사용한 후 말했다.
“후, 강시들이 워낙 강해서 계속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까 마나 소모가 크군요.”
“스킬은 지금 처음 쓰신 거 아닌가요?”
“계속 썼는데요?”
“그, 그렇군요. 평타만 휘두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제가 워낙에 평범한 사람이다 보니까 스킬 임팩트도 평범해서 평타와 구분하기 힘드셨나 봅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신가 보구나.’
헤라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자꾸 평범함을 강조하자 말 못할 사연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상대방을 괜히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관심을 접은 그녀는 주변 탐색에 총력을 기울였다.
‘분명히 이 근처일 텐데.’
의원인 헤라가 굳이 동대륙까지 찾아온 이유는 약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구해야하는 약재는 총 7종류.
그중 수정 민들레의 뿌리와 하얀 도라지는 판게아 인근에도 자생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
“아!”
벌써 1시간 가까이 이동 중인데도 닿지 않는 지평선.
슬슬 지쳐가기 시작할 무렵 헤라의 두 눈이 반짝였다.
투명한 수정처럼 빛나는 민들레 꽃잎을 발견한 것이다.
혹 은인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까 염려한 그녀가 황급히 도구를 꺼내서 민들레 뿌리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한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채집 난이도가 너무 높아!’
수정 민들레 뿌리는 형태를 온전하게 채집해야만 약재의 효험을 발휘한다. 그리고 뿌리를 온전하게 채집하기 위해서는 민들레 꽃잎을 절대 훼손하지 말아야했다.
한데 수정 민들레의 꽃잎은 사람의 손끝이 살짝만 닿아도 온기에 녹아버렸다.
‘꽃잎에 안 닿고 뿌리를 채집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수정 민들레에는 줄기가 없었다.
꽃잎 아래로 바로 뿌리가 달려있는 형태였다.
즉, 꽃잎이 지면에 바짝 붙어있다는 이야기다.
꽃잎 주변의 흙들을 충분히 파내서 공간을 확보한 뒤에 캐내야 그나마 온전히 채집할 가능성이 생길 듯했다.
하지만....
‘기다려달라고 부탁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헤라가 철강시들과 싸우고 있는 켄트릭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생김새와 달리 상냥한 그는 이미 충분히 헤라에게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더 빨리 평야를 돌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라의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춰주느라 자신 또한 일정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에게 약재를 채집해야하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헤라는 낯이 두껍지 못했다.
‘수정 민들레 뿌리는 카라스에서도 구할 수 있을 거야.’
카라스는 초국의 왕도다.
각지의 상품이 집결하는 장소이니만큼 민들레 뿌리를 구할 방도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었다.
판단한 헤라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약재를 구하러 오셨던 겁니까?”
마침 철강시들을 막 쓰러뜨린 그리드가 헤라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의뢰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탕약의 재료를 찾는 중이에요.”
“이건 당신이 찾는 약재가 아닌가 보죠?”
그리드가 수정 민들레 꽃잎을 가리키며 묻자 헤라가 쓰게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채집에 너무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에?”
설명하던 헤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켄트릭이 맨손으로 흙을 조금 파내더니 수정 민들레 뿌리를 순식간에 뽑아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헤라가 작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민들레 꽃잎과 뿌리가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했던 까닭이다.
탕약의 재료로 필요한 수정 민들레 뿌리의 등급은 ‘상급’ 이상이었는데 지금 막 켄트릭이 캐낸 수정 민들레 뿌리의 등급은 최상급, 아니 특등급으로 분류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를 자랑했다.
“부, 부업으로 약초 캐시나요?”
도구를 왕창 챙겨도 온전히 채집하기 힘든 수정 민들레 뿌리를 고작 몇 초 만에, 심지어 맨손으로 완벽하게 채집하다니...?
멍청한 표정을 짓는 헤라에게 그리드가 수정 민들레 뿌리를 건네주었다.
“값은 시세대로 쳐주세요.”
“무, 물론이죠!”
보통 특등급 약재는 왕실이 독점하게 마련이다.
카라스에서도 특등급 약재를 구하긴 힘들 거라고 확신한 헤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고급 약초 채집>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약초 채집 속도가 상승하고 채집하는 약초의 등급이 높게 판정 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나쁘지 않군.’
광물을 캐다보면 채광 스킬이 활성화되듯이 채집 스킬 또한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활성화되는 공통 생활 스킬이다.
하지만 대개 초급부터 활성화되게 마련인데 그리드의 채집 스킬은 무려 고급부터 시작했다.
채집 난이도가 上으로 분류되는 수정 민들레 뿌리를 벌써 몇 개나 온전하게 채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착한 일을 하니까 복이 오는구나.’
드디어 지평선을 넘은 그리드가 인벤토리 구석에 쌓여있는 민들레 뿌리 12개를 흐뭇한 표정으로 확인했다.
헤라가 하나의 뿌리를 구매하는데 지불한 대가는 53골드.
한화로 6만원이 조금 넘는다.
‘약초 몇 개 캤다고 한 달 영양제값이랑 식대를 벌어버리네.’
아, 프로틴까지 살 수 있을 듯하다.
국가 세수 외의 수익 창출은 오랜만이었던 그리드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면서 번 돈 중에 가장 손쉽게 번 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었다.
헤라가 그런 그리드를 괴물 보듯이 쳐다봤다.
‘이 사람 대체 뭐지?’
당연한 얘기지만 수정 민들레 뿌리는 귀한 약재다. 시작의 도시 판게아 인근에 서식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급 약재와 비교하면 희귀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번식량 자체가 적었다.
실제로 평야를 이동하는 2시간 동안 헤라가 발견한 민들레는 최초의 1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켄트릭은 1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무려 12개의 민들레를 발견하고 그걸 모조리 완벽하게 채집해버렸다.
채집을 잘하는 거야 채집 스킬이 높나보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저 말도 안 되는 탐색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둔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걸 보면 어쌔신 계열 직업군도 아닐 텐데.
“뿌리, 더 필요 없으십니까?”
강시들이 출몰하던 황량한 평야를 벗어나자 새롭게 나타난 들판.
이별을 눈앞에 둔 그리드가 질문하자 헤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구매한 거로 충분해요.”
사실 여유분을 확보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특등품은 너무 비싸다. 재정적 여유가 없다.
아쉬움을 삼키고 대답하는 헤라에게 그리드가 2개의 민들레 뿌리를 건네주었다.
“언젠간 필요하실 텐데 그때 쓰세요.”
“엣....”
헤라가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큰 신세를 진 마당에 선물까지 받을 순 없어요.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전 유부녀고....”
“선물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하는 헤라의 말을 중간에 자른 그리드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 이건 보답이기도 하지만 투자이기도 하다.
약재를 구하기 위해 대륙을 넘어야할 정도로 난이도 높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의원이 어디 흔하겠는가?
헤라는 안 그래도 귀한 의원이면서 그중에서도 꽤 실력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 생각해본 헤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흔쾌히 뿌리를 건네받았다.
“오늘의 투자로 손해 보실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꾸벅, 몇 번이고 정중하게 인사한 헤라가 남쪽으로 향했다.
북쪽에는 몬스터 군락이 많아 사실상 이동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사실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힘들어도 길을 빙 돌아가야 무사히 카라스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언젠가 꼭 다시 봐요, 비공식 랭커님.’
헤라의 <붕대> 보유량은 켄트릭을 만나기 전과 똑같았다.
평야를 돌파하는 2시간 동안 ‘남들과 다르게’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켄트릭은 심지어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러모로 놀라운 사내였다.
***
“마력탐지.”
게으른 소 군락에 도착한 그리드가 색적 마법을 전개했다.
초월의 격을 쌓은 후부터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마법이지만 푸른 초원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황소의 숫자가 워낙 많아 정확한 정보 수집이 필요했다.
‘혹시 어디 숨어있는 놈들이 있으면 쉽게 고립당할 수도 있으니까.’
방심해선 안 된다.
큰 독 쥐 군락의 난이도는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여왕 쥐와 남편 쥐의 레벨이 400을 넘겼었을 정도니 이곳의 몬스터들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플레이어가 동대륙을 방문했음에도 여전히 멀쩡한 군락의 존재 자체가 바로 그 증거였다.
‘숨어있는 놈들은 없군.’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즉 눈에 보이는 소들이 전부다.
마력 탐지를 토대로 파악한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갓 핸드들을 불러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소를 유인해오라고 명령했다.
음머어!
다짜고짜 나타난 손들이 휘두르는 칼에 얻어맞은 황소가 눈을 붉히며 울었다. 콧김을 내뿜는 녀석의 시선이 그리드를 발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초에 불과했다.
쿠구구구구궁!
황소가 뛸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가까워질수록 녀석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났다.
‘우선 수준을 가늠해보자.’
3개의 뿔을 앞세워 박치기를 해오는 황소에게 그리드는 평타로 맞서볼 계획이었다. 녀석과의 거리가 적절한 수준까지 좁혀지기를 기다리며 집중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공격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달려오던 황소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추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간 까닭이다.
음머-
“.....”
조금 전까지의 분노를 잊고 다시 풀을 뜯어 먹기 시작하는 황소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깨달았다.
놈들의 이름이 왜 ‘게으른 소’인지.
그리고 왜 여태껏 아무도 이곳을 공략하지 못한 건지.
‘한 마리씩 유인해서 잡는 건 불가능하다. 스스로 초원에 뛰어들어서 다수를 한꺼번에 상대하거나 원거리에서 한 놈씩 차근차근 사냥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생명력과 회복력을 봐선 원거리에서 사냥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정말 강력한 원거리 스킬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은.
“음.... 초(超).”
잠시 생각해본 그리드가 검무를 전개, 평타의 위력을 2배 상승시킴과 동시에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파직-!
파지지직!!
강렬한 기파가 휘몰아치며 그리드의 흑발이 위로 솟구친다.
음머.
황소들이 제자리에 선 채 그리드를 쳐다봤다. 질겅질겅 풀을 씹는 모양새가 그리드를 비웃는 듯이 보였다.
씨익.
마주 웃어준 그리드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초당 9회의 검기가 황소들에게 쏟아지는 것이다.
음, 음머어어어!!
수백 마리의 황소 떼가 그리드에게 달려오다가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며 잿빛으로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