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43화 (1,033/1,794)

템빨 54권 - 18화

첫 번째 전쟁은 템빨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드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가우스 왕국군은 템빨군과 오크군의 진격을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역전을 꾀하고자 간신히 끌어들인 뱀파이어 군단이 사실은 그리드의 백성이었던 시점부터 가우스 왕국군의 패배는 필연이 되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아!!”

60만 연합군의 환호성이 밤하늘을 밝힌다.

전쟁 통에 나부낀 황사가 함성에 걷히자 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찬란한 별빛이 연합군의 마음을 대변했다.

“우리가 이겼어! 이겼다고!!”

“갓리드! 격하게 사랑한다!!”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죽음이 도사리는 전쟁.

낯선 사막에서의 혈투.

여러모로 힘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리드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하고 보상을 얻었다. 그리드의 손위에서 놀아난다는 생각에 불쾌했던 기분을 씻어내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다만, 자국민들의 비난이 걱정이다.

“....크흠.”

환호하던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신세가 그들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지금 막 첫 번째 교전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템빨 연합군의 대승! 레이단 사막에 집결했던 가우스 왕국군은 흔적도 없이 궤멸한 반면 템빨 연합군의 사상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어스름족 오크와 연합한 템빨국의 군사력은 제국의 군사력을 연상케 했으며....”

“플레이어 홀로 군대와 맞서 싸우는 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반 NPC의 성장 한계치는 명확하니까요. 불과 몇 년 전을 떠올려 보십시오. 각국의 병사들은 플레이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요? 셀 수 없이 많은 플레이어가 병사들의 스펙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오늘, 그리드는 플레이어의 잠재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해보였습니다. 지존 그리드의 모습이 바로 몇 년 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각국 방송사의 기자들이 몰려와 연합군을 등진 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중국인 기자들도 있었다.

한데 어째 멘트가 이상했다.

“오크족 플레이어들의 저 늠름한 자태를 보십시오! 바로 저들이 그리드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번 전쟁의 주역입니다! 박수 받아 마땅한 영웅들이죠!!”

“....?”

왜 호의적이지?

그리드에 대한 중국 여론이 반전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오크족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우리를 띄워주고 방심시킨 다음 정체를 공개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분명해.”

“제길, 역시 방송국 놈들은 음흉하다니까. 무서워서 못 살겠군.”

“얼굴 잘 가려. 정체가 발각 당했다간 내일 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될 수도 있어.”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중국 방송국들을 경계하며 수군거리는 사이 기자들은 이미 전장에서 쫓겨났다.

다짜고짜 난입해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외부인들을 병사들이 잠자코 지켜볼 리 만무했다.

다만 병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카메라들은 여전히 현장에 남은 채 뱀파이어 무리를 포커싱했다.

가우스 왕국군에게 절망을 맛보여준 뱀파이어 무리가 그리드 앞에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숫자는 3만이 채 안 됐지만 상위종 특유의 기세를 발산하는지라 템빨군, 오크군에게 밀리지 않는 위용을 뽐냈다. 특히 선두에 있는 놀과 티라멧의 존재감이 독보적이었다.

“왕이시여, 명령을.”

이번 전쟁은 뱀파이어들에게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가우스 왕국군을 포식하고 레벨이 적잖게 오른 그들의 얼굴엔 하나 같이 기름기가 반질반질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심정은 썩 편치 않았다.

뱀파이어가 템빨국 소속 NPC가 됐다는 사실은 본래 극비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훗날 플레이어들을 유인해서 뱀파이어들에게 먹이로 던져주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골치가 아파서 미간을 좁히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속삭여왔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잘 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왜?”

“세상에 미련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뱀파이어를 아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뱀파이어의 도시를 습격할 바보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뱀파이어의 식량난을 걱정하실 필요가 없는 거죠.”

“도리어 그게 문제 아니야? 아직 뱀파이어들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어. 이때 랭커들이 침입했다간 뱀파이어들이 역으로 잡아먹힐 텐데?”

“직계 뱀파이어와 진혈족 뱀파이어를 포함한 도시의 정예 뱀파이어 전부를 입구 쪽에 배치하면요?”

“....!”

대개 던전이란 공략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소다.

그렇기 때문에 입구 근처에는 약한 몬스터가 서식하고 심층부에 가까워질수록 강한 몬스터가 출몰했다.

도전자들은 우선 약한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던전의 환경에 적응하고 강해져서 심층부까지 도달하는 원리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스와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뱀파이어의 도시는 ‘입장 후 어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던전이다. 설령 랭커라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진혈족, 직계 뱀파이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다.

“기가 막힌 방법이군.”

라우엘의 묘안에 감탄한 그리드가 근심을 지웠다. 그리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명령했다.

“사막의 몬스터들을 사냥한 후에 복귀해라. 그리고 앞으로 각 도시 주인들과 측근들은 입구에서 생활하도록.”

“왕의 뜻대로!”

힘차게 대답한 뱀파이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드의 혈왕 효과에 영향을 받아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된 그들은 하나 같이 의욕이 넘쳤다.

모든 뱀파이어가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피아로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쥐었다.

“뒷일은 맡기겠다. 무운을 비마.”

“가우스 왕국을 전하께 바치어 충의를 증명하겠나이다.”

“절대로 죽어선 안 돼. 승리보다는 그대들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염려 마십시오.”

“명심할게요.”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미묘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기사가 받아야할 명령은 무릇 ‘목숨을 바쳐서라도 승리하라.’는 것일 텐데 그리드의 명령은 늘 달랐으니 기분이 묘했다. 결코 기뻐해선 안 될 일이건만 어쩔 수 없이 기뻤다.

“브라함, 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다니까?”

재차 당부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리드 탓에 짜증을 느끼는 그였다.

“앵무새도 아니고.... 쯧, 동대륙에서 얻어터지고 다닐 생각에 무서워서 뇌가 굳은 건가?”

“솔직히 긴장되긴 하네요.”

긴장만 될까?

가람과의 재회는 사실 무서울 정도다.

패배와 죽음이 새삼 두려워서?

아니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이 겪어본 패배와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혹시라도 가람과의 실력 차이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을까봐, 그 점이 두려운 것이다.

지는 게 당연한 상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력 차이가 여전히 압도적이라면 절망감을 느낄 것만 같았다.

대악마 베리드를 레이드하고, 서사시의 마검사가 되고, 탐욕을 창조하고, 탑의 결사를 만나 가르침과 용단을 얻는 등....

지난 1년 동안 그리드는 너무 많은 성장을 거듭해왔으니까.

가람이 ‘자연히 성장하는’ 초네임드 NPC라는 점을 감안해도 실력 차이가 아예 좁혀지지 않았다면 ‘플레이어는 초네임드NPC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공식이 성립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리드의 떨리는 흑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브라함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단언컨대, 나는 전대 전설 중에서도 수위에 꼽을 수 있는 강자였다.”

“네? 아.... 네.”

과연 브라함이다.

이 와중에 생뚱맞게 자기자랑을 하다니.

그리드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브라함의 태도는 여전히 진지했다.

“방심하긴 했어도 그런 내가 파그마에게 허를 찔려 죽었다.”

“....”

“그리고 최근 여러 가지 밝혀지고 있는 사실에 의하면 무패왕 그놈이 재능 면에선 뮐러보다 탁월했겠지.”

브라함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얼추 눈치 챈 그리드의 표정이 숙연해진다.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너는 그 천재들의 전인인 것이다. 긴장하되 두려워하지는 마라.”

“...고맙습니다.”

브라함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 중 하나가 파그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 용기를 심어주고자 스스로 먼저 그 이름을 꺼냈다.

숙연해진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뭐, 어찌됐든 네가 가람이라는 놈에게 쥐어터질 거란 사실은 변함없겠지만 말이다.”

로브를 깊이 눌러쓰며 인피면구를 벗은 브라함이 그것을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리드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그리드가 설령 가람에게 지더라도 좌절하지 않게끔 대비하도록 아직은 가람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양반이 강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브라함이 그리드의 동대륙행에 따라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괜히 그리드와 동행했다가 양반에게 당하기라도 했다간 그리드가 정말로 절망할 수도 있을 테니.

“자, 그럼....”

스파앗-!

스틱세이에게 받아온 대륙 간 이동 주문서를 찢은 그리드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기사들과 템빨단원 모두 그리드의 건투를 빌었다.

***

“?”

동대륙 시작의 도시 판게아.

과거와 달리 황량한 폐허가 된 그곳에 도착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온 플레이어 수백 명이 저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왔을 땐 다짜고짜 강시가 튀어나오더니.’

이젠 다짜고짜 죄인취급을 받는구나.

생각하며, 그리드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병사들에게 순순히 두 손을 내밀었다.

찰칵.

수갑이 채워졌다.

[양손이 구속되었습니다!]

[흡마석으로 만든 수갑입니다. 모든 스킬과 마법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당신의 힘을 주면 수갑이 부서질 것 같습니다.]

‘....그럼 안 되지.’

그리드는 작금의 상황을 대충 유추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내게 물먹은 가람 놈이 체통도 잊고 나를 수배한 것일 테지.

가람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초국은 서대륙인들의 필수 관문인 이곳 판게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한 걸 테고.

‘확실히 동대륙의 수준이 높긴 하군.’

방금 막 가우스 왕국군을 학살했던 참인 그리드는 가우스 왕국군과 초국 병사들의 상태를 확실히 비교, 파악할 수 있었다.

초국 병사들의 레벨과 무장 상태가 훨씬 더 뛰어났다.

물론 그리드 입장에선 가우스 왕국군이나 초국 병사들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말이다.

“다음.”

길게 늘어선 줄에 잠자코 서있자니 드디어 그리드의 차례가 왔다.

불룩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지지대 삼아 엎드리듯 선 살찐 꼽추가 그리드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그리드가 바로 그리드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베리드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그리드는 기사 켄트릭으로 변장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켄트릭으로 변정한 이유는 다양했다.

켄트릭은 동대륙 방문 이력이 없을뿐더러 긴 세월 도망자 신분으로 살아온 까닭에 서대륙에서도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더군다나 그리드와 체구가 비슷해서 켄트릭의 모습을 한 그리드는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몸이 편했다.

“....아니군. 다음.”

꼽추 노불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그리드를 통과시켰다.

그제야 수갑에서 해방 된 그리드가 기지개를 쭉 펴며 마을 출구 쪽으로 향했다.

출구 너머 확 트인 평야에서 강시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철강시군.’

철강시는 다섯 종류의 강시 중 가장 흔하고 아래 등급에 있는 강시다.

하지만 강시의 기본 특징인 ‘갑옷을 두른 것처럼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체술을 구사했으므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특히 물리 딜러에게 카운터로 작용하는 면이 있었다.

실제로 강시에게 쩔쩔 매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법사가 아닌 전사들이었다.

“흐음.”

평야로부터 시선을 뗀 그리드가 지도 한 장을 꺼내 펼쳤다.

한속봉이 며칠 밤을 지새가며 그려준 동대륙 지도다.

가야, 파국, 씽의 지리는 대략적으로 표기한 수준에 그쳤지만 초국의 지리만큼은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지도였다.

‘우선 게으른 소 군락부터 가봐야겠지.’

<판게아의 신성> 1단계

1단계 효과:판게아의 주민들로부터 비교적 쉽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북쪽에 형성 된 몬스터 군락을 하나 파괴할 때마다 칭호의 단계와 효과가 상승합니다.

그리드가 보유하고 있는 칭호 중 하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대륙에서 얻었던 칭호인데 성장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큰 독 쥐 군락>을 정벌하고 개방한 1단계 효과부터가 영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판게아가 망해버린 지금은 더욱 더 쓸모없어진 칭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기왕 다시 찾아온 동대륙이다.

가람을 만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겠노라 계획도 세웠다.

그리드는 우선 시험 삼아 몇 개의 군락을 정벌해볼 계획이었다.

혹시 또 아는가?

단계를 높이면 의외로 쓸모 있는 칭호일 수도.

“응?”

게으른 소 군락의 위치를 머릿속에 넣은 그리드가 지도를 집어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 입구 근처에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저는 의원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보답할 테니 저도 데리고 나가주세요.]라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쭈그려 앉은 여성이었는데 행색이 무척 꾀죄죄했다. 저 자리에서 며칠을 보낸 듯이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 참 야박하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여성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성의 아이디는 헤라였다.

“평야만 건너면 되는 거면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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