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42화 (1,032/1,794)

템빨 54권 - 17화

“....!”

템빨군과 오크군, 구경꾼과 기자들, 그리고 피아로를 비롯한 기사들과 시청자들에 이르기까지 전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짧은 연설을 마친 그리드가 다짜고짜 몸을 날린다 싶더니 홀로 사막을 주파하는 게 아닌가?

‘뭐, 뭐 저런 황당한 녀석이!’

‘멀쩡한 60만 병력을 놔두고 왜 혼자 적진에 뛰어드는 건데?’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그리드의 기행에 당황하는 그때.

“저, 전원! 전하를 쫓....!”

피아로가 명령을 내리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나타난 브라함이 그의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고 있었다.

“그대는 전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피아로가 제아무리 강하다한들 브라함의 시각에서 봤을 땐 애송이에 불과하다.

전설이 된지 10년조차 안 된 새내기.

탄생설화를 제외하면 후세에 구전 될 이야기가 거의 없는 반쪽짜리가 바로 당대의 전설들이었다.

반면 그리드는 조금 달랐다.

“전설이란 단지 강한 사람을 뜻하는 칭호가 아니야.”

주변이 술렁이고 있었다.

모래폭풍의 용을 만들며 점차 멀어지던 그리드가 돌연 시야에서 사라진 까닭이다.

그나마 시청자들은 카메라를 통해서 그리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지평선을 넘어버린 그리드를 육안으로 쫓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마력으로 안력을 돋운 브라함이 순보의 후폭풍을 감당 못하고 출렁이는 그리드의 얼굴가죽을 확인하고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영원토록 소멸하지 않고 구전되는 이야기. 바로 불멸의 전언(傳言)을 써내려가는 자들을 세상은 전설이라고 부른다.”

수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이야기란 무엇일까?

일단 평범해선 안 된다.

상식에 기반을 둔 이야기처럼 흔해빠져서야 강렬하게 각인될 수 없다.

“단순히 강한 것을 넘어서 ‘일어날 수 없는 일’, 혹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을 체현하는 자가 바로 전설인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브라함은 그리드에게 말한 바 있다.

군대라는 개념은 전설 앞에서 무의미하다고.

전설이 쉽게 죽지 않는 이유는, 통상적인 개념이 전설에겐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쿠르르르르릉....!

사막이 흔들렸다.

사막 곳곳에 솟아있던 모래언덕들이 일제히 폭포처럼 내려앉는 장관이 연출되며 60만 연합군과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피아로는 이제야 간신히 지평선 너머의 그리드를 포착하고 있었다.

거의 10만에 육박하는 적들을 그리드 혼자서 휩쓰는 중이었다.

수만 자루의 창과 검, 그리고 수천 발의 화살과 마법을 돌파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전설적인 인물의 독보적인 존재감 앞에서 평범한 병사들의 존재감은 하염없이 옅어져만 갔다.

무수한 영웅담이 오직 영웅만을 조명하듯, 전장의 주역은 오직 그리드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드가 여태껏 쌓아올린 업적은 전대 전설들 못지않다. 다만 아직 공부와 경험이 부족해 자신과 동격 이상인 존재들과 1대1로 겨루면 필패하겠지만, 그건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봐둬라. 바로 저게 기적의 체현이며 진정한 전설이다.”

홀로 10만의 대군을 휩쓰는.

그야말로 전설에서나 서술될 비현실을 실현시키는 그리드를 보면서 브라함은 흐뭇하게 웃었고 피아로는 영감을 얻었다.

***

[공간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이런 염병!’

극악의 확률로 발동하는 순보.

사용자를 ‘시야’에 닿는 장소까지 한 걸음에 이동시키는 그 스킬 탓에 그리드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재수도 오지게 없지!’

사실 이번 전쟁엔 그리드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쪽의 전력이 워낙 우세한데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뭘 굳이 전쟁까지 참가한단 말인가?

그리드는 단지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칼춤 한 번만 출 계획이었다.

최대한 많은 적군을 시야에 담은 뒤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전개, 성대한 출정식을 열고 자신은 곧장 동대륙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근데 완전히 망해버렸다.

“헉!”

‘제길!’

가우스 왕국군 병사들이 기겁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모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선 그리드가 다급히 허리를 꺾어 검을 휘둘렀다.

“십만대군 학살검!”

스파앗-!

단 한 번의 참격.

그저 한 명의 인간이 검을 횡으로 베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파는 컸다.

그리드의 검이 지나는 경로에 서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방패, 갑옷과 함께 통째로 양단되더니 곧바로 이어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도륙 당했다.

그리드의 검에 베인 병사들 ‘각자’의 반경 30미터를 일시에 휩쓰는 반월의 검기가 일으킨 파장이었다.

곁에 있던, 그리고 앞에 있던 전우가 덧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십만대군 학살검>이라는 외침을 똑똑히 들은 일부 병사들이 극한의 공포에 질렸다.

저 검술이 이름 그대로 자신들을 몰살시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이미 모두 죽은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을 품고 현실감각을 잃어 주저앉는 병사들이 속출할 지경이었다.

“....!”

“....!”

사막을 진동시키는 파공성에 이어서 전열의 일부가 부채꼴 모양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한 사령부가 발칵 뒤집혔다.

진영 후위 언덕에 설치한 천막에 모여앉아 적군의 공격을 기다렸던 그들은 작금의 사태가 너무나도 황당했다.

분명히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건만,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천 병력을 잃은 것이다.

[악마력이 올랐습니다.]

[악마력이 올랐....]

[악마력이....]

[전쟁 중에 적군을 쓰러뜨렸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전쟁 중에 적군을 쓰러뜨렸습니다. 소량의 경험....]

[전쟁 중에....]

그리드의 시야 구석에는 알림창이 끝없이 갱신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죽음을 상징하는 잿빛의 기둥 수천 개가 일제히 솟구쳤다가 흩어지자 전장을 안개가 뒤덮는 듯하다.

라우엘이 곁에 있었다면 ‘크큭, 죽음의 연무인가....’라고 지껄였을 법한 풍경이었다.

“뭐, 뭣! 뭐냐!!”

울버스 공작.

가우스 왕국군의 총사령관인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외침에는 이 상황을 이해시키라는 뜻이 담겨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또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완전히 패닉에 빠진 사령부를 대신해서 일부 군사들과 기사들이 나섰다. 가히 낭중지추였다.

“적을 포위하라!”

“교전에 응하지 마라! 방진에 가둬두고 마법과 화살로 사격해라!”

“적의 숫자와 병종을 즉시 파악해서 보고하라!”

“총사령관님의 호위를 늘려라! 어서!!”

군사들이 세우는 깃발과 북소리의 신호를 토대로 현장의 기사들이 명령을 내렸다.

템빨국과의 전쟁을 대비해왔던 가우스 왕국군은 과연 정예군단이라 할 수 있었다.

전열에서 ‘적’을 직접 목격하고 패닉에 빠진 일부 병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사막의 깊은 모래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가우스 왕국이 몇 년 전부터 준비하고 보급해온 ‘신발’이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죄다 밑창에 바실리스크의 가죽을 덧댄 신발을 신은 가우스 왕국군은 모래를 마치 평지처럼 뛰어다녔다.

‘이거 진짜로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포위망에 갇힌 그리드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가우스 왕국군의 수준이 템빨국 수뇌부의 예상을 훨씬 웃돈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의 등골이 조금 오싹해졌다.

‘우리군이 압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가우스 왕국군이 진영을 펼치고 있는 이 장소부터가 절묘하다.

상당한 경사가 져있고 자이언트웜의 출몰지점을 팔방위에 장벽처럼 두르는 형태였다.

사막의 지리를 제집 안방마냥 꿰뚫고 있는 눈치다.

이날을 위해서 사막을 수백, 수천 번도 더 시찰했을 가우스 군사들의 노고를 가늠해본 그리드가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 휘두름에 불편함이 없을 듯한, 그런 적절한 규격의 묵색 대검이었다.

베기 공격력과 스킬 데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그리드의 대검과 열망의 무아검의 합체품이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군.’

하필 뭣 같은 타이밍에 터진 순보를 원망했던 그리드가 이젠 도리어 감사를 느꼈다.

피아로를 필두로 삼은 60만 연합군이라고 할지언정 피해 없이 이곳을 돌파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어스름족 오크는 더위에 너무 취약했고, 진즉부터 사막을 격전지로 상정해온 가우스 왕국이 원군을 파견하는 속도는 예상을 초월할 터이니.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자신을 포위한 채 방패를 세우고 있는 중장보병들을 쓱 훑어본 그리드가 어떤 기척을 감지하고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보고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훈련 받은 병사들이 그의 시야를 꽉 막아놓고 있었으니까.

아직 초월의 격을 쌓기 전의 그리드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정도로 수준 높은 방진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격을 쌓아올리고 기감이 확장 된 그리드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적들의 위치와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서쪽과 북쪽 고지에는 마법사 군단이, 약 1,500미터가량 떨어진 중열과 3,000미터 이상 떨어진 후열에선 궁병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

마력의 흐름, 대기의 떨림,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 화살촉에 굴절 된 햇빛의 각도, 급기야 내게 향하는 풍향, 기다렸듯이 울려 퍼지는 깃발의 펄럭임, 느슨해지는 포위망.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전장을 관조하던 그리드가 <베리드의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세계는,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악마의 재림을 목격하게 되었다.

<자동 연성>

패시브 스킬

투사체의 표적이 될 경우, 이를 방어하는 금속의 방어막이 실시간으로 자동 생성.

방어막 당 데미지 흡수량 1만.

*지속 시간 1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22위 대악마 베리드의 연금술.

베어지지도, 꿰뚫리지도 않는 매끄러운 금속을 무한히 생성했던 놈의 절대적인 권능을 템빨왕 그리드가 재현한다.

터텅━ 터터터터터텅!!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화살의 물리적인 위력도, 물리력과 궤를 달리하는 마법의 기운도.

결국 ‘투사체’인 이상 그리드의 몸에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리드는 고고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제(制).”

쿠웅-!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위압감과 믿기지 않는 신비가 전장을 뒤덮었다.

누구도 감히 그리드에게 접근할 수 없었으며, 사막을 구성하는 모래의 성질이 바뀌었으니 사방팔방에 엉덩방아를 찧는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파(波).”

그리고 연(聯), 살(殺), 극(極), 락(落), 회(回), 화(花), 초(超)로 이어지는 단일 검무들.

수만의 병력이 굳건히 버티고 섰던 전장의 중심부까지 순식간에 진입한 그리드가 쏟아지는 적들의 공세를 화회(花回)로 다시 맞받아친 뒤 신장의 효과를 등에 업은 초연화(超聯花) 2연타로 일대를 초토화 시켰다.

이때 빛의 정령은 서쪽 마법사 군단의 눈을 멀게 하고 있었다.

터엉-!

기회를 틈탄 그리드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최대한 높이, 더 높이.

머잖아 그는 넋이 나간 귀족들과 깃발 아래 군사들, 이를 악 문 채 군대를 지휘하는 기사들과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선 병사들의 모습을 대부분 시야에 담았다.

콰콰콰콰콰쾅!!

마법과 화살 세례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진다.

갓 핸드들과 노에, 랜디, 템빨골들 덕분에 어떻게든 버텨낸 그리드가 참격을 날렸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마법사들이 아군의 희생도 불사하지 않는 파괴적인 마법을 선보인지 오래였다.

적진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왕> 효과마저 상실한 그리드의 입장에서 생명력을 소모하는 이십만대군 분쇄검은 위험부담이 큰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설, 그리고 초월의 격을 쌓았다곤 하나 결국 그는 플레이어였고 스태미나에 한계를 느꼈다.

소극적으로 버티다가 허망하게 자멸하느니 아직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베는 편이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쏟아지는 마법을 모조리 집어삼킨 참격이 전장에 아로새겨졌다.

적진을 반으로 갈라버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아... 아아아....”

가우스 왕국군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중국인 시청자들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다.

“머, 멋지다....!”

“굉장해...! 굉장하다고!”

인간의 본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질투와 시기, 그리고 차별과 반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굴을 맞대지 않고 지껄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선 수많은 악의와 적의가 범람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보다 더 노출 된 사람일수록 인터넷에서 취약해지게 마련이다.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중국인들의. 아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의 악의와 적의의 표적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순간 형세가 바뀌었다.

홀로 전장을 지배하는 그리드의 절대적인 무력.

하나의 국가를 압도해버리는 그의 무력은 부정적이었던 중국의 여론조차도 뒤엎어버렸다.

-내가 오크였어도 그리드 따랐을 듯.

-신형! 너무 멋지다고!

-진정한 따거는 한국에 있었군.

-신이다....! 신형은 신이야!!

-한반도가 중국의 4천년 역사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반도가 매 시대마다 신형 같은 인재들을 배출해온 덕분이겠지!

-아시아의 자랑! 그리드!!

***

“고마워. 정말 1초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야.”

그저 칼춤 한 번 추려고 했을 뿐인데 일이 너무 커졌다.

어쩌다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리드가 루비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회복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적의 잔당을 정리한 60만 대군과 그들을 이끄는 기사들이 마침 도착한 적의 원군과 용맹하게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연속되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의 사기가 100퍼센트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만큼 그리드가 보여준 활약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바보. 무리하기는.”

루비가 새침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오빠의 활약이 기쁘긴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마음을 졸였던 탓에 힘겨운 그녀였다.

“미안.”

히죽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템 내구력이 엉망이다.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탓에 타격, 공격 ‘횟수’가 너무 많이 누적되어 모든 아이템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전투 내내 아이템을 스왑하지 않았다면 장비의 태반이 파괴되었으리라.

‘그래도 덕분에 펜릴의 망토의 경험치가 크게 올랐군.’

정말 엄청나게 올랐다.

아이템 경험치 획득량 상승 버프를 감안해도 기대 이상의 상승률이었다.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흡혈 효과를 발휘했던 엘핀스톤의 반지 또한 레전드리 등급까지 이제 고작 20퍼센트의 경험치만 남겨두게 되었으니 동대륙에서 열심히 사냥하다보면 머잖아 엘핀스톤을 해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럼 뒤는 피아로에게 맡기고 슬슬 출발해볼까.”

한속봉이 준비해준 동대륙 퀘스트 목록을 떠올린 그리드가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크큭....! 크하하하하! 오만한 템빨왕이여! 세상물정 모르는 병사들이여! 너희들 스스로 본인의 무덤을 파고 있었음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과연 네임드 NPC답게 이십만 분쇄검을 맞고도 비교적 멀쩡했던 울버스 공작.

가우스 왕국군의 총사령관인 그가 갑자기 전장이 떠나가라 대소를 터뜨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음을 느낀 그가 가우스 왕국의 병사들이 흘린 피로 완전히 붉게 젖은 대지를 가리켰다.

“사막의 지하에 뱀파이어들이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겠지?”

“아차...!”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석상처럼 굳었다.

가우스 왕국이 사막을 전장으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를 깨달은 그들은 절망했다.

“하하! 크하하하핫!! 오늘 이곳이 너희와 우리 모두의 묘지가 될 것이다!!”

아직 초저녁.

저 미친 템빨왕 때문에 일정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대낮이 아닌 게 다행이다.

태양의 기세가 약해졌으니 뱀파이어들의 활동이 불가능하진 않은 시간대였다.

생각하는 울버스 공작의 웃음소리는 더욱 더 커져만 갔고, 반면 위축 된 템빨군과 오크군은 뒷걸음쳤다.

스슥.

스스스슥....

붉게 물든 모래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요 속에 출렁이는 사막이 으스스한 공포를 자아냈다.

『헙....!』

어떤 방송사의 앵커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했다.

수천, 수만 개 지점에서 붉은 모래들이 들썩인다 싶더니 검은 인영들이 튀어나온 까닭이다.

창백한 피부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뱀파이어들이었다.

전장을 적시는 피냄새에 자극 받은 그들이 나태의 저주조차 잊고 잠에서 깨어나 지상으로 뛰쳐나왔다.

수많은 먹잇감을 보고 흥분한 그들은 이제 곧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리라.

사람들이 확신하는 그때였다.

“왕이시여!”

기세 좋게 튀어나왔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무릎 꿇었다.

깊이 숙여진 그들의 고개가 향하는 방향에는 그리드가 있었다.

“....XX, 진짜 못해먹겠네.”

템빨군과의 공멸을 기대했던 울버스 공작이 맥없이 주저앉더니 욕설을 지껄였다.

이제 그는 놀라기도 지쳐서 만사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 세계 방송사들이 동시에 광고를 내보냈다.

지금이야말로 질 좋은 방송을 위한 수신료를 뽑아낼 타이밍임을 직감한 것이다.

-XXX이 진짜 XX X같게 구네. XX XXX XX들.

시청자들의 불만은 당연히 폭주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설이 각국의 방송사로 쇄도했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당당했다.

그들이 내보낼 광고는 S.A그룹의 공식 영상이었으니까.

다름 아닌 국대전의 3차 오프닝 영상이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지금 화제인 그리드가 첫 장면부터 등장했다.

“지존도(至尊圖).”

쩌어어엉-!!

정체를 드러낸 마왕과 검성 크라우젤의 검이 맞물리면서 발생한 충격파가 상처 입고 쓰러져있는 랭커들의 옷깃을 요란하게 흔든다.

작년 국대전 마왕 토벌전의 중요 장면이 새로운 오프닝 영상의 처음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다시 봐도 지림.

화려한 공방을 교환하는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욕설로 도배됐던 시청자 채팅창이 잠잠해졌다.

마침, 전투를 근접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가 빠르게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사람이 점처럼 작게 보일 정도가 되자,

펄럭━!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는 효과음과 함께, 백색의 깃털 하나가 화면에 등장하며 점이 되어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이어서 올해의 마왕이 등장했다.

황금 구름에 걸터앉은 그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순백의 날개였다.

하지만 날개는 이내 검게 물들었다.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올해 마왕은 누굴까?

안 그래도 그리드의 활약으로 들떠있던 시청자들의 흥분이 증폭됐다.

Satisfy라는 가상현실게임 하나 덕분에 전 인류가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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