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15화
어스름 왕국.
오크 로드 테루찬이 바이올렛 왕국을 정복하고 세운 오크들의 나라다.
“쿠륵. 수웩!”
“수웩수웩! 수웩~”
패왕의 대전이 마력으로 들끓었다.
수십 명의 오크 주술사들이 각기 다른 주문을 외우자 소용돌이치던 마력이 하나로 얽히며 법리를 상징하는 도형을 그렸다.
“스웨그!”
주술사들의 시선이 모인다.
제단 앞으로 다가선 테루찬이 크게 소리쳤다.
“우리들의 왕께서! 쿠륵! 명하셨다! 쿠르륵!!”
오크 로드의 외침이 곧 오크의 법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 활동 중이던 오크족 플레이어들의 뇌리에 테루찬의 음성이 울려온다 싶더니 알림창이 떠올랐다.
[오크 로드 ‘테루찬’에 의해서 종족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어스름족의! 자랑스러운! 쿠륵! 전사들이여! 레이단으로! 쿠륵! 집결하라! 우리는! 쿠르륵! 왕의 명령을 받들어! 쿠륵! 가우스 왕국을! 침략한다!!”
“....?”
뭐?
우리가 왜?
‘그리드가 느그 왕이지 우리 왕이냐?’
누군가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고,
“하....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군.”
테루찬이 그리드를 섬기기로 맹세했을 때부터 오늘날의 사태를 예견한 누군가는 우울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모두의 시야에 퀘스트 정보가 떠올랐다.
<가우스 왕국 침공전>
★종족 퀘스트★
어스름 왕국의 왕이자 위대한 전사, 오크 로드 테루찬이 템빨왕 그리드의 뜻에 따라 가우스 왕국을 정벌하겠노라 선언하였습니다.
48시간 내에 템빨국의 도시 ‘레이단’으로 집결하여 템빨국 군대와 합류하십시오.
*이 퀘스트에는 강제성이 없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가우스 왕국 점령
퀘스트 참가 보상:템빨국 국민들과 호감도 상승
퀘스트 클리어 보상:
1.개인 보상
전투 공헌에 따른 <전사의 증표> 차등 보상.
2.공통 보상
가우스 소속 마을, 요새, 도시 정복 성공 시마다 점령지 규모에 따른 <전사의 증표> 차등 보상.
퀘스트 실패 조건:가우스 왕국 점령에 실패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 없음
★이번 전쟁의 총군사 ‘라우엘’은 충분한 식량과 보급로를 확보해놓았노라 장담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식량의 한도를 감안한 전쟁기한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
전사의 증표는 오크 로드가 직접 부여하는 퀘스트를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보상이었다.
그리고 오크족 플레이어들은 전사의 증표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자원인지 이제 잘 이해하고 있었다.
대부분 중국인으로 구성된 오크족 플레이어들은 템빨국을 위해 싸우는 병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전사의 증표의 유혹이 워낙 강렬했다.
“....제기랄, 참전할까?”
“으으음.”
중국인 플레이어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전사의 증표가 탐나긴 했지만 이대로 템빨국의 병사가 되어 전쟁에 참가하면 그리드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셈밖에 되질 않는다.
도대체 우리가 왜 그리드를 위해서 싸워야한단 말인가?
심히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상대가 그리드가 아닌 다른 랭커였다면 전사의 증표를 핑계로 자존심을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드에게만큼은 굽혀선 안 돼. 이번 퀘스트에 참가했다가는 순식간에 매국노로 몰리고 사회에서 매장당할 거다.”
중국인들의 정서가 문제였다.
지난 4년 동안의 국대전에서 그리드는 중국에게 수많은 좌절감과 모멸감을 맛보여준 흉한.
중국이 매해 국대전마다 미국이나 한국에게 밀렸던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의 영웅이었던 하오가 그리드 앞에 무릎 꿇은 사건은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줬을 정도로 끔찍한 오욕이었으니 상당수의 중국인들은 그리드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오크족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그들은 이번 퀘스트에 강제성이 없다는 점에 커다란 아쉬움과 원망을 느꼈다.
차라리 강제성이 있었다면 이를 핑계로 퀘스트에 참가해서 인민들의 비난을 피하고 전사의 증표를 챙길 수 있었을 터인데.... 쓸데없이 자유를 줘서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역시 하형의 말을 들었어야했어.”
“맞아. 중국 정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기관이라고 해도 Satisfy에 대해서만큼은 따거보다 잘 알 리 없으니까.”
중국인 플레이어들은 종족 변경에 보다 신중하라고 경고했던 하오의 말을 무시했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리드에게 무릎 꿇은 인민의 수치 따위가 뭐가 잘나서 지껄이느냐며 하오를 손가락질했던 스스로를 욕했다.
종족 변경을 권유했던 정부에게 살짝 반감을 느끼긴 했지만 차마 표출할 순 없으니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뭐,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기도 했고.
그래,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아이디 가리면 신상 털릴 일 없잖아?’
‘복면 두르고 투구 눌러쓰면 내가 NPC인지 플레이어인지 구분도 못할 거야.’
‘애초에 전쟁이면 수 만, 수십 만 단위로 움직일 텐데 거기 나 하나쯤 끼어도 들킬 리 없지.’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의 숫자가 수십 만. 정확히 43만이라는 점에 있었다.
***
“휘유, 소문이 사실이었군.”
조만간 템빨국이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다.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정보를 반신반의했던 기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사막 도시 레이단.
템빨국 제2의 수도라고 불리는 거대한 그곳에 강줄기처럼 퍼져있는 대로마다 군대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고 각 연병장마다 병력이 가득 차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지?”
전문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템빨국의 정복 전쟁을 예견해왔다.
템빨국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땅이 필요했으니까.
더군다나 가우스 왕국의 서방 3영토를 취하는 순간 템빨국은 운하를 건설할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템빨국과 인접한 가우스 왕국이 십중팔구 정복 전쟁의 첫 번째 표적이 될 거라고 장담했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여기까진 다 예상대로인 셈.
하지만 시기가 묘하다.
국가대항전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 아닌가?
국대전 참가자들이 성장에 마지막 박차를 가해야할 시기다.
그리고 템빨국 상위랭커 17인이 이미 국대전 참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템빨국의 주력은 이번 전쟁에 참가하기 어렵다는 뜻.
실제로 레이단의 영주도 변경된 상태였다.
국대전 참가 준비를 위해 한시적으로 영주직을 물러난 제드노스를 대신해서 냥멍이가 영주 대리를 맡고 있었고 이는 레이단의 도시 정보에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국대전이 끝난 후에 전쟁을 선포해도 충분할 텐데 왜 굳이 주전들이 빠진 상태에서 전쟁을 하려는 걸까?”
템빨국의 군사력이 가우스 왕국을 상회한다는 게 정론이긴 하다.
하지만 가우스 왕국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우스 왕국은 제국과 에트날 왕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버티며 국력을 키워온 나라.
훌륭한 자원 생산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겸비했다는 증거다.
그들의 군사력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거대할 공산이 크다.
어스름 왕국의 오크 군세가 템빨국을 적극 지원할 경우 가우스 왕국의 군사력을 쉽게 압도하겠지만 솔직히 그건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였다.
중국 정부가 오크족 플레이어들에게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말 것’을 노골적으로 권고했기 때문.
대부분이 중국인인 오크족 플레이어들은 이번 전쟁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인의 정부를 향한 충성심의 저변에는 두려움이 깔려있었기에.
‘애초에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워낙 세기도 하고.’
중화사상을 지닌 콧대 높은 중국인들이 고작 퀘스트 보상에 눈이 멀어 그리드의 뜻대로 움직인다?
어림없는 일이다.
“가만?”
수군거리던 기자들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템빨국이 굳이 지금 전쟁을 시작한 이유를 알겠네.”
“그러게. 변수를 억제하려는 거였어.”
국대전은 템빨단에게만 적용되는 이벤트가 아니다.
가우스 왕국 소속 랭커들 또한 이번 국대전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선 왕국의 위기보다 국대전 보상이 더 중요했다.
“병사의 질은 그리드 세트를 무장한 템빨군이 가우스군을 가볍게 웃돌아. 가우스군이 템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플레이어들을 전쟁에 참여시켜야하는데 랭커들이 빠진 상황에서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전쟁에 참가할 엄두가 날까? 괜히 개죽음만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위축되지.”
“반면 템빨국에는 그리드가 있어. 그리드가 선두에 있는 이상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들은 위축되기는커녕 기세가 오를 거야.”
“이야.... 그리드가 국대전에 참가 안 한 이유가 이거였구만.”
“국대전의 허점을 이번엔 자기가 역으로 찌르네.”
자신에게 심적 고통을 안겼던 상황을 고스란히 역이용할 줄이야.
보통 독한 게 아니다.
“....어?”
그리드에게 내심 감탄하고 있던 기자들이 두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두리번두리번.
무슨 수배범마냥 복면과 투구를 눌러써 얼굴을 감춘 오크들이 레이단 곳곳에서 출몰했기 때문.
딴에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애쓰고 있었으나 몸집이 워낙 크고 숫자도 많아서 눈에 띈다.
“이런 미친....”
고층 건물 옥상이나 시계탑에 오른 채 레이단을 주시하던 기자들의 안색이 굳었다.
검은 피부를 지닌 오크들이 급기야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족히 수십 만 단위였다.
이미 연병장에 집결해있던 템빨국 병력보다 최소 배 이상 많은 숫자였다.
“이게 오크군이냐 템빨군이냐....”
속 뒤집어질 중국 정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자들이었다.
***
‘라우엘의 예상대로 됐군.’
국왕의 권한으로 대규모 국가 퀘스트 <가우스 침공전>을 발효한 그리드.
그에게는 퀘스트에 강제성을 부여할 권한이 없다. 보상을 미끼로 퀘스트 참가율을 높이는 정석적인 방법만이 그가 쓸 수 있는 수단이었고 이는 천문학적인 자원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반면 힘이 곧 법으로 통하는 오크세계를 통치하는 테루찬은 사정이 달랐다.
테루찬은 ‘오크 로드의 외침이 곧 법이다.’는 율법에 의거해 퀘스트에 강제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리드는 테루찬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라고 명령했다.
되도록 많은 오크가 우군으로 참전해야 전쟁의 승률을 높일 수 있었기에.
하지만 라우엘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오크 로드라도 퀘스트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떤 코스트를 소모할 것이 분명하다며, 테루찬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게 하려면 코스트 소모를 자제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강제력이 없어도 오크의 퀘스트 참가율은 매우 높을 겁니다. 테루찬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오크족 플레이어 대다수가 2년 후에 다시 종족을 바꾸려고 계획 중일 테니까요. 네, 뽕을 뽑겠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할 거라는 말입니다. 오크로 지내는 2년 동안 근력과 체력이라도 최대한 키워놓고 싶을 텐데 언제 또 다시 발생할지 모를 종족 퀘스트를 과연 놓칠까요?”
라우엘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레이단 외성 밖 사막을 빼곡히 채운 검은 피부의 오크들을 보니 대부분의 오크족 플레이어가 이번 전쟁에 참가한 듯싶었다.
죄다 아이디를 가리고 있는 꼴을 보니 딱할 지경이다.
‘보상을 놓치기도, 사람들에게 욕먹기도 싫을 테니.’
“모두 모였습니다.”
피아로가 성벽 위로 올라와 보고했다.
사하란 황궁을 침공했을 때처럼 갑옷을 무장한 그의 모습은 그리드조차 우러러보게 만들만큼 늠름했다.
오늘의 출정식 이후 동대륙으로 떠날 그리드를 대신해서 가우스 왕국을 점령할 총사령관다운 위용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전광> 스킬을 전개했다.
파지직!
청룡의 부츠에 뇌전이 흐르며 그리드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창천을 등지고 선 그가 사막 너머에 집결해 있는 가우스 왕국군을 시야에 한 번 담은 후 성벽 아래 단상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우와아아아아아!!!”
“쳇.”
그리드를 발견한 20만 템빨군이 함성을 내지르는 반면 40만 오크군은 투덜거린다.
“조용.”
“....!”
불만과 질시가 담긴 시선으로 그리드를 노려보던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경악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의 음성이 크게 울리기는커녕 낮게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또렷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확성기도 없이 이만한 인원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달하다니....?
‘위엄 스탯이 극도로 올라가면 저렇게 되는 건가?’
눈빛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그리드의 위엄 스탯을 유추해본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감탄을 거듭하며 저도 모르게 똑바로 섰다.
최초의 기사단을 세운 플레이어에게만 지급되는, Satisfy에 단 하나뿐인 아이템.
바로 <군주의 망토>의 존재를 알 리 없는 그들은 단지 그리드의 존재감에 집어삼켜질 뿐이었다.
같은 시각,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우리라고 아무 대비가 없었을 것 같으냐?’
가우스 왕실 소속의 어쌔신 군단이 음영을 틈타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소문 무성한 템빨국 농부들의 시선을 간신히 피해 외성벽 아래까지 도달한 그들은 이대로 왕궁까지 잠입해 템빨왕의 가족들을 납치할 계획이었다.
꿀렁. 꿀렁꿀렁.
감시망을 피했음을 확인하고 성벽 위에 손을 얹는 어쌔신들의 다리를 정체모를 덩굴이 휘감고 있었다.
갈대밭에 앉아 성벽을 지켜보던 미남자가 감자를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평화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