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14화
절묘한 숙성으로 부드럽게 씹히는 살코기와 고소한 지방이 일품이다.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단맛과 짠맛의 양념은 고기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게 하며 입안에 맴도는 견과류의 향기가 풍미를 더해준다.
미슐랭 가이드에 실린 내용이다.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청기와 양념갈비>의 돼지갈비는 오래 전부터 미식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미슐랭 가이드에 별 3개로 등재되기 전부터 해외 정재계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필수 코스로 꼽힐 정도였다.
“혜, 혜수야.”
올해 나이 칠순이 넘은 김우석은 청기와 양념갈비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청기와 양념갈비가 아직 작고 볼품없던 시절 주방장으로 취직한 그는 전대 사장과 함께 비법양념을 개발했고 이상적인 고기 숙성 조건을 발견하는 등 식당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전대 사장이 작고하고 그의 아들이 새로운 사장이 되자 김우석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우석이 여러모로 불편했던 새 사장이 그를 쫓아낼 계획을 세운 탓이다.
본래 김우석, 사장, 후계자 세 사람만 공유했던 비법양념 레시피와 숙성 조건을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전수한 새 사장은 김우석을 주방에서 쫓아내고 숯불 관리와 철판 관리를 맡겼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뜨거운 숯을 달궈 손님상까지 옮기고 무거운 철판을 닦는 일은 20대 청년에게도 힘든 중노동이었으니 김우석이 금방 관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우석은 꿋꿋이 버텼다.
자신의 청춘을 바쳤던 일터에 그나마 자신의 역할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며,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고된 업무를 수행했다.
물론 자식들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자식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눈이 뒤집혀서 식당을 찾아와 뒤집어엎었을 테니까.
조용히 은퇴하고 싶었던 김우석은 침묵했고 그것이 문제였다.
“할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하고 있어?”
식당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 철판을 닦던 김우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혜수와 마주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왜 요리를 안 하고 철판을 닦고 있냐구!”
얼마 전 고등학교에 입학한 혜수는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할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지금의 청기와 양념갈비를 만드셨다.
역대 대통령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손을 맞잡고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 식당의 끝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면 장인의 얼굴로 요리 중이신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친구들에게 실컷 자랑한 혜수는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할아버지 몰래 식당을 방문했고 그 탓에 작금의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다.
김우석과 혜수 서로에게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요리사라고 하지 않았어?”
“청와대에도 초청 받으셨다면서....”
숯검정에 범벅이 된 얼굴과 허름한 옷차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산처럼 쌓인 철판을 닦고 있는 김우석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혜수의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아이들에겐 사태의 이면을 엿볼만한 능력이 없었다. 혜수를 거짓말쟁이취급하며 모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혜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때였다.
“어르신, 괜히 제가 방문한다고 연락드리는 바람에 직접 숯불까지 피워주시고 송구합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나타나 김우석에게 꾸벅, 90도로 허리 숙여서 인사했다.
이쪽을 등지고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목소리가 익숙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년소녀들의 두 눈이 이내 휘둥그레졌다.
“영우 군.”
김우석이 사내를 반겨주었는데 소년소녀들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던 까닭이다.
“체력 관리 때문에 종종 설거지도 직접 하신다더니, 오히려 허리에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여전히 허리숙인 사내가 김우석에게 두 손으로 악수를 건넸다.
이를 맞잡으며 일어난 김우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내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와...!”
“진짜 그리드다!!”
김우석과 나란히 선 사내의 얼굴이 조명에 비치자 소년소녀들이 열광했다.
그들이 혜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불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드랑 서로 아는 사이라니! 너희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시잖아!!”
“부럽다아~”
그리드, 신영우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인지도만 놓고 보면 S.A그룹 임철호나 미국 대통령과 맞먹을 정도였고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혜수의 할아버지에게 사적으로 찾아와 예의를 다하고 있었으니 혜수의 친구들은 자기가 다 기쁘고 뿌듯해졌다. 자신들이 혜수의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갈비 먹고 싶을 때마다 강남까지 달려오기 힘들어서 그런데 저희 건물에다가 직접 식당을 차려주시면 안 됩니까?”
“허허.... 젊은 친구가 수완이 참 좋군. 하지만 미안하네. 늙은이가 자식들 키우고 시집장가 보내다 보니 남은 돈이 적어 가게를 차릴 정도의 여력이 없다네.”
“어르신께서 가게를 차려주시겠다는데 설마 제가 자릿값을 받을까요? 공사비도 다 저희 쪽에서 부담할 테니까 꼭 진지하게 생각해주십시오.”
“자네....”
김우석의 얼굴이 굳었다.
부끄러운 상황에 맞물린 신영우의 도 넘는 호의가 동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큰손주뻘 되는 청년이 동정심에 감당 못할 말을 꺼내자 불쾌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영우는 진심이었다.
“제 부모님의 바람입니다.”
“.....”
영우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직접 배추를 심어 장사하시던 영우의 부모님은 큰 위기를 겪으셨다. 기존의 거래처가 풍년을 이유로 배추의 거래 값을 대폭 깎은 탓이다.
적자를 면치 못하게 생긴 영우의 부모님께서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김우석이다.
“어르신께선 이미 한 번 저희 집안에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한 번 더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하시고 부디 진지하게 고려해 주세요.”
영우는 간접적으로 못 박았다.
사업자금을 이쪽에서 출자하는 대신 수익은 공평하게 분배하겠다고.
그러므로 은혜라는 표현을 썼다.
제대로 알아들은 김우석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도록 하세. 나는 우리 예쁜 손녀와 친구들에게 고기 좀 구워줘야겠네.”
“이 예쁜 친구가 어르신의 손녀분이셨군요.”
“아니, 그 진짜 예쁜 아이 말고.... 아차.”
“앗.... 죄송....”
***
“오지랖이 넓네.”
혹 김우석에게 망신을 주진 않을까.
계산대에 불편한 얼굴로 서있던 사장에게 손녀 일행이 먹을 고기값까지 지불하고 나온 영우를 기다리는 여성이 있었다.
라이더 재킷과 청바지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적발의 미인, 지슈카다.
영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지랖이 아니라 작게나마 은혜를 갚은 거야. 나한테 이로운 일이기도 하고.”
“하긴, 고기가 엄청 맛있더라. 우리 동네에 이런 가게가 생기면 진심으로 행복할 것 같아.”
지슈카는 통역기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으로 이주하고 고작 1년 만에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이랭커들은 대개 천재라는 설이 맞는 듯했다.
‘물론 나 같은 바보들도 많지만.’
다른 하이랭커들의 면면을 떠올려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신영우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십삼이에 오르는 지슈카에게 재차 확인했다.
“근데 정말로 진심이야?”
“내가 허튼 소리 하는 사람이야?”
“흐음....”
부릉!
운전석에 앉은 신영우가 시동을 켜자 십삼이가 우렁찬 배기음을 토해냈다.
사이드 미러를 보니 김우석의 손녀와 그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차에 열광하기보다는 지슈카와 단 둘이 식사하고 차에 오르는 광경을 보고 흥분한 것 같았다.
SNS에 자랑하겠다며 사진 찍어달라는 녀석들의 부탁을 들어줬다가 진땀 뺐던 영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주행을 시작했다.
Satisfy에서 분신과 갓 핸드를 간접 조종하는 경험을 쌓아온 영우의 운전 실력은 이제 거의 카레이서 수준이었다.
“금메달 보상 중 하나를 내게 넘기겠다라....”
오늘의 데이트는 지슈카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그리고 저녁 식사 중 지슈카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국대전에서 획득하는 금메달 보상 중 하나를 영우에게 넘기겠다는 이야기였다.
명분은 있었다.
주작궁의 은혜를 갚겠다나, 뭐라나.
이미 넌 충분한 값을 지불했으니 그만 신경 끄래도 끝까지 집착하는 걸 봐선 절대로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다.
“좋아.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한참 생각해보던 영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슈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잘 생각했어.”
보고 있나? 유라.
이게 바로 내조다.
엣헴, 입 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지슈카의 귓전에 영우의 혼잣말이 스며들었다.
“나는 국대전 출전도 안 하고 보상을 2개나 거저먹네.”
“2개?”
“유라도 내게 보상 하나를 주겠다고 했거든.”
“뭐?”
지슈카가 미간을 좁혔다.
농염한 미모에 강한 인상이 덧씌워지자 더 큰 매력이 느껴진다.
“유라가 너한테 보상을 준다고 했다고? 그 ㄴ... 걔가 왜? 무슨 이유로?”
“금메달 3개 딸 거라면서, 자기가 보상 하나를 구해다 주면 그 대가로 나머지 2개 보상으로 자기 아이템을 제작해 달래.”
당연히 거절했다.
영우는 동료들이 재료만 구해다주면 언제라도 무상으로 아이템을 제작해줄 의향이 있었으니까.
특히 그 재료가 금메달 보상급의 재료라면 영우로써도 귀중한 경험을 쌓을 기회였으니 무상으로 제작해줘도 이득이었다.
하지만 유라가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고 영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앞으로 유라가 원하는 아이템을 쭉 무상으로 제작해준다는 조건으로 보상 하나를 받기로 했어.”
“난 3개 다 줄게.”
“...뭐?”
“나도 금메달 3개 딸 거야. 그 보상 다 너한테 줄 테니까 앞으로 내 아이템도 네가 계속 제작해줘.”
“아니, 하나만 줘도 충분....”
“그건 주장국에 대한 보답이고.”
“주작궁.”
“그, 그래, 주장꾹!”
‘아직 어려운 발음이 좀 있나보네.’
계속되는 말실수에 뺨을 붉히는 지슈카가 귀엽다.
그녀의 작은 주먹이 떨리는 것을 엿본 영우가 손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난 정말로 괜찮아. 하나로도 충분하고 너무 감사해. 아니, 그저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그, 그리드....”
“그러니까 너도 정말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부담 갖지 말.... 우읍!!”
신영우가 운전 모드를 급히 자율 주행 모드로 바꿨다.
스킨십과 단어 선택을 조심해야했다.
도로를 따라 주행하는 십삼이가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이날.
녹초가 되서 집에 돌아와 Satisfy에 접속한 영우는 동료들로부터 쉬지 않고 날아오는 귓속말에 시달려야했다.
극검, 크리스, 반트너, 폰을 비롯한 십공신부터 코크와 제드노스, 라엘라, 툰에 이르기까지....
국대전에 참가할 예정인 템빨단원 전원 유라, 지슈카와 똑같은 뜻을 피력해온 까닭이다.
서로 말을 맞춘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모두가 똑같이 그리드를 걱정할 뿐이다.
바쁜 일정 탓에 국대전 불참을 선언한 그리드가 보상을 놓치게 됐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드가 아무리 거절해봤자 소용없었다.
템빨단원 중에 고집 없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결국 그리드가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금메달 3개부터 따고 말해. 2개 이하밖에 못 따는 사람은 아직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거로 간주하고 보상 안 받을 거니까.”
사실 템빨단원이라고 해도 금메달 3개 이상을 따는 일은 힘들다.
국대전 종목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지만 결국 수십 개 단위에 불과한데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금메달을 쟁취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템빨단원끼리 경쟁해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더군다나 세계에는 템빨단원 못잖은 강자들도 많았다.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금메달을 3개 이상 딸 수 있는 템빨단원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었다.
‘이 정도 조건이면 되겠지.’
한숨 돌리는 그리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템빨단원들의 금메달 획득률이 낮은 이유는 그놈의 호승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여태껏 템빨단원들은 대부분 PvP나 표적 맞추기 등 소위 말하는 메이저 종목 위주로 참가해왔고 그 탓에 서로 경쟁하게 되거나 크라우젤, 지발 같은 괴물을 만나 고배를 마셨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노골적으로 금메달만 노린다면 어떻게 될까?
템빨단원들의 금메달 획득률은 지금보다 최소 배 이상 치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