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38화 (1,028/1,794)

템빨 54권 - 13화

‘착란을 겪는 건가?’

그리드가 국대전 불참을 결정한 이유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분, 1초도 낭비할 수 없던 그는 한속봉과의 대담이 끝나자마자 대장간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되새겼다.

‘일곱 명이라니?’

이질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한속봉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계에서 활동한 양반의 숫자가 7명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그리드가 처음 양반과 조우했을 당시 목격한 양반의 숫자는 10명이 넘었다.

정확히 13명이다.

그건 기억의 왜곡 따위가 아니었다.

양반을 서대륙의 전설과 비슷한 존재라고 인식했던 그리드는 양반의 숫자가 서대륙의 전설보다 많아 놀랐던 기억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증인이 존재한다.

“브라함, 그때 본 양반의 숫자가 열세 명이 맞죠?”

비밀 통로의 깊은 지점.

드워프 케를이 템빨성을 증축하는 과정에 새롭게 만든 미로를 그리드와 함께 걷던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간만에 인피면구를 벗은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만인을 매혹할만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몇 번을 되묻는 거냐?”

그리드가 동대륙을 처음 방문했던 시기에 브라함의 영혼은 멀쩡히 깨어있었다.

당시엔 그리드와 친구도 뭣도 아니었고 서서히 호감을 품어가는 단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브라함은 그리드의 두 눈을 통해서 그리드가 보는 세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하며 체험했다.

“열세 명이 맞다.”

“하지만 한속봉 자작은 일곱 명이라고 말했어요.”

“거짓을 지껄인 거겠지. 꺼림칙한 놈이니 조만간 쳐내라.”

“그건 아닙니다.”

그리드가 보아온 한속봉은 그리드를 기만하거나 배신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야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드의 눈빛에 깃든 확신을 읽은 브라함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한속봉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동방인들이 단체로 어떤 암시에 걸려있을 수도 있겠군.”

“암시?”

“일곱 명의 양반을 제외한 다른 양반들은 인식 못하는 암시라던가.”

“그런 암시를 걸어야할 이유가 뭐죠?”

“서방의 신들이 동대륙에 풀어놨을 감시자들을 의식한 거겠지. 오존과 치우가 신이라고 해봤자 싸움에 지고 쫓겨난 개에 불과하니 서방의 신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게 정상이잖느냐. 네 생각처럼 양반이 복수를 위해 육성 중인 군대라면 더욱 더 전력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 거다.”

“아....”

굉장히 그럴 듯했다.

수백, 수천 만 명의 인간을 단체로 속이는 일이 무슨 수로 가능하냐고 딴지를 걸기엔 상대가 신이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아주 타당하다. 대천사의 숫자가 정확히 일곱이니까 그에 대립하는 양반의 숫자 또한 일곱이라 하면 서방의 신들이 굳이 의심을 품지 않을 테니.”

말하며, 그리드의 손목을 붙잡아 세운 브라함이 그리드를 자신의 등 뒤에 세웠다.

드워프 놈의 장난기가 발동해서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든 미로를 그리드가 헤매자 친히 인도해주는 것이었다.

“저기, 브라함.”

브라함의 옷깃을 붙잡은 채 뒤따라 걷던 그리드가 의문을 꺼냈다.

“양반이 신의 위엄을 쌓을수록 강해질 거라는 제 추측이 맞다면, 양반은 최대한 많은 대중에게 스스로를 노출하며 숭배 받아야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한데 일곱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은 숭배는커녕 인식조차 되지 못하니 신위를 조금도 쌓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일곱 양반을 제외한 나머지 양반은 가람보다 뒤떨어진다는 뜻이 되는 게 맞죠?”

“정확하다. 환국에 머무는 양반의 숫자가 설령 수백, 수천이라 해도 모두 다 네 생각만큼 강하진 않을 거다.”

“하....”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양반이 최소 가람처럼 강할 거라고 추측하고 근심해왔는데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라함이 경고했다.

“안심하지 마라. 오존과 치우가 서방 신들의 감시를 떨쳐내는 순간 모든 양반들이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낼 테고 신격화되기 시작할 테니까.”

그때는 가람에게 찍힌 그리드도 무사할 수 없게 된다.

그리드는 자신과 템빨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환국이 진짜로 신계가 되는 것을 막아야하는 입장에 선 셈이다.

‘선민의식에 찌들어있는 양반들과 그들을 만든 오존, 치우보다야 고작 한 개의 죄를 범했을 뿐인 현재의 신들이 낫....’

....아니, 아니다.

섣불리 재단하지 말자.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은 다를 수도 있다.

“도착했군.”

그리드가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미로의 끝에 도착한 브라함이 두꺼운 철문 앞에 섰다.

철문에는 드워프들의 장기 중 하나인 영혼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

그리드라는 영혼을 지닌 그리드뿐이었다.

쿠르릉.

그리드가 철문 위에 손을 올리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두꺼운 철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풍경은 어느 대장간의 지하실 안쪽.

이곳에도 역시 영혼 각인이 새겨진 철문이 버티고 서있었다.

오직 그리드만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거 엄청 좋다.’

성과 대장간을 오갈 때마다 인파에 휩쓸렸던 그리드는 필연적으로 시간을 허비했었다.

하지만 케를 옹 덕분에 비밀 통로로 성과 대장간을 오갈 수 있게 됐으니 앞으로 쭉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선 탈출로나 벙커로도 활용할 수 있을 테니 아이린과 로드의 안전도 안심이었다.

‘역시 드워프는 굉장해. 꼬치구이의 활용법도 알았으니 동대륙을 다녀온 후엔 탈리마 방문 계획도 빠르게 세우자.’

이제 작업할 시간이다.

그리드가 템빨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막 지하실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 그리드 님! 큰일 났습니다!

“....?”

레이단의 영주 제드노스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뱀파이어의 도시에 방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지?”

불안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브라함의 메스텔레포트를 타고 뱀파이어의 도시 입구로 날아갔다.

***

“왕이시여!!”

“큭큭큭, 버러지들 주제에 혈왕은 알아보는구나.”

“....브라함, 말씀을 좀 삼가세요. 그러다가 평생 친구 못 사귀실까봐 걱정됩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 입장한 그리드가 현기증을 느꼈다.

모든 뱀파이어가 템빨국의 백성 판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마을화 된 놀의 도시의 뱀파이어들을 보는 듯했다.

제드노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모든 도시의 뱀파이어가 몬스터가 아닌 NPC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나 NPC를 적대하지 않게 됐고 말이지?”

“네, 마치 놀의 도시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실험 삼아서 공격해봤더니 국가 법규에 따른 상해죄와 PK시스템이 적용되더군요.”

템빨단원 전원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사냥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아직 갈구노스의 사원을 이용할 수 없는 중저렙 템빨단원들의 주력 사냥터가 뱀파이어의 도시였던 점을 감안하면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리드가 도시의 정보를 확인했다.

<뱀파이어들의 지하 도시(6)>

등급:B(일시적 격하 상태)

영주:없음

인구:5,987명

구성원:뱀파이어들의 사역마, 하급 뱀파이어, 중급 뱀파이어, 진혈족 뱀파이어.

혈왕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던전이 영지화되었습니다.

영주의 부재로 인해 영지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생산품과 특산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지 수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급 뱀파이어와 중급 뱀파이어가 낮은 확률로 사역마를 생산합니다.

*진혈족 뱀파이어, 혹은 직계 뱀파이어를 영주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진혈족 뱀파이어가 영주가 될 경우 침입자를 사냥하고 뱀파이어의 숫자를 서서히 늘려갈 것입니다.

*직계 뱀파이어가 영주가 될 경우 침입자를 사냥하고 뱀파이어의 숫자를 빠르게 늘려갈 것입니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진혈족 뱀파이어를 추가 생산합니다.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 지원이 시급합니다.

“음....”

“우선 놀에게 피감자 지원을 부탁하긴 했는데 도시가 12개가 넘다보니 놀의 도시에서 생산하는 피감자만으론 물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대론 뱀파이어들이 죄다 굶어죽을 겁니다.”

“피아로에게 각 도시를 순방하며 밭을 개간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것도 그렇지만 뱀파이어들을 밤마다 사막에 푸는 건 어떨까요?”

“뱀파이어를 풀어놓겠다고?”

“뱀파이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몬스터의 혈액을 섭취해서 허기를 채울 수 있습니다. 또한 NPC는 몬스터와 달리 성장하죠. 사냥 경험을 쌓을수록 뱀파이어들의 레벨이 올라갈 테고 인구 생산량도 빨라질 것이며 언젠간 군대로 발전하겠죠. 그때가 되면 플레이어들의 출입에도 제안을 두지 말고 침입자가 발생하게끔 유도한 다음 뱀파이어들이 침입자를 사냥하고 얻은 전리품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뱀파이어들이 도시에 틀어박힌 이유는 나태의 저주 때문이다.

그리드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덕분에 저주를 극복한 놀, 그리고 혈왕이 된 그리드가 해방시켜준 덕분에 저주로부터 해방 된 티라멧을 제외한 다른 뱀파이어들은 여전히 저주를 앓고 있었다.

그리드 앞에 조아리고 있는 이 6천 명의 뱀파이어 또한 그리드가 떠난 후 잠시 뒤면 다시 각자의 관을 찾아 배회하게 될 것이었다.

“내가 밤마다 도시들을 순례하며 일시적으로 저주를 약화시켜주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현실적으로 힘들다.

매일 밤마다 뱀파이어들에게 몇 시간씩 할애하기엔 그리드가 입는 손해가 너무 컸다.

제드노스가 손사래 쳤다.

“아니, 방금 드린 말씀은 취소입니다. 뱀파이어들의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한 바람에 저들이 저주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네요.”

“이해해. 그럴 만도 하지.”

그리드가 힐끔 뱀파이어들을 돌아보았다.

그리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뱀파이어들의 붉은 눈동자가 모두 열정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태의 저주가 뭐냐는 듯이.

“당분간은 군대를 움직여서 뱀파이어들을 먹여 살리도록 하자. 몬스터를 포획해서 계속 도시에 공급해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드노스가 즉시 명령을 수행했다.

“.....”

그리드와 함께 도시를 빠져나온 브라함이 저 먼 곳을 응시했다.

마리로즈가 잠들어 있는 도시였다.

불길함을 느낀 그리드가 재촉했다.

“어서 빨리 대장간으로 가죠.”

남아있는 사신의 숨결이 있다.

그리드는 동대륙으로 떠나기에 앞서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 계획이다.

***

“아니군. 다음.”

번헨 열도, 켈레니안 해저동굴, 무너진 마탑의 뒷문 등.

대륙을 이동하는 수단이 하나, 둘 추가로 밝혀질수록 동대륙을 방문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동대륙 사회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

“아니군. 다음.”

판게아.

부푼 기대감을 안고 찾아온 플레이어들을 반겨주며 그들이 새로운 꿈을 꾸도록 도와주었던 동대륙 시작의 도시.

한때는 활기로 넘쳤던 그곳이 삭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줄지어 선 플레이어들을 반겨주는 것은 친절한 주민들이 아닌 고압적인 눈빛의 병사들이었다.

“아니군. 다음.”

예상과 다른 풍경에 긴장하는 플레이어들을 병사들이 살찐 꼽추 앞으로 인도했다.

ㄱ자로 완전히 꺾인 허리 탓에 돼지처럼 부푼 배가 바닥에 닿는 꼽추였다.

배를 지지대 삼아 엎드리듯이 선 꼽추는 자신 앞에 서는 플레이어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어떤 강박증이라도 앓는 것인지 코털과 모공까지 들여다본 후에야 고개를 젓는다.

“아니군. 다음.”

꼽추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자유를 되찾았다.

“검문이 끝났으니 자유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 플레이어의 손목에 채웠던 수갑을 풀어준 병사가 폐허 바깥으로 이어진 평야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앞서 검문을 끝내고 폐허를 탈출했던 플레이어들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강시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저, 저기. 저는 의원입니다.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제가 저곳으로 나갔다간 강시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데 조금 더 안전한 루트는 없을까요?”

자신의 직업을 밝힌 플레이어 헤라가 가여운 표정을 짓고 물어보았다.

의원은 성직자처럼 마법으로 대상을 즉시 치유하는 등의 기적을 행사할 순 없었지만 봉합이나 수술 등의 과정을 통해서 매우 큰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서대륙에선 상당히 귀하게 대접받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지만 병사의 냉담한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무조건 저 평야를 지나가야한다. 다른 이방인들과 협력해서 평야를 돌파 하던지 다시 서대륙으로 돌아가던지 그건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병사는.

아니, 이 동대륙 자체가 외부인의 접근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도대체 왜?

기대한 것과 너무 다른 대접에 의문을 품은 헤라가 다소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우리를 배척하는 거죠?”

“왜냐고?”

콧방귀 뀐 병사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헤라에게 던져주었다.

수배지였다.

신성모독, 사형수 탈취, 국가 전복 시도, 판게아 주민 납치 등등.

수배지 속 인물은 별 해괴한 죄목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특히 ‘수만 명’의 주민을 납치해갔다는 부분은 SF 영화에도 안 나올 황당무계한 죄목이었다.

‘사람들을 개돼지로 아나? 아무도 믿지 않을 누명을 씌워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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