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12화
“신 한속봉이 전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판게아의 영주였던 한속봉.
초국 최고의 충신이기도 했던 그는 다름 아닌 초왕에게 사형을 선고 받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양반이 수색 중이던 주작궁 제작자 즉, 그리드의 행방을 감히 함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형당하기 직전 그리드에게 구출된 그는 가족과 함께 템빨국으로 이주해왔고 이제는 어엿한 템빨국의 일원이 되어있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한속봉 자작. 고개를 드세요.”
그리드는 넙죽 절부터 올리는 한속봉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관뒀다.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고 수십 번을 말했는데도 한사코 저러는 걸 보니 보통 쇠고집이 아닌 것이다.
“국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자작의 노고에 늘 감사하고 있어요.”
“과찬이십니다. 소인이 어떤 공을 세운다 한들 전하께 받은 은혜에 일말의 보답이나 되겠나이까.”
“.....”
그리드가 한속봉의 은인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속봉이 사형수가 됐던 이유는 그가 그리드를 비호했기 때문이었으니 둘의 관계는 전문용어로 쌤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속봉은 그리드를 평생의 은인이자 귀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드는 감사하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다.
“험험, 조만간 동대륙을 방문할 생각입니다. 그에 앞서서 자작께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한속봉의 표정이 굳었다.
“전하께서는 불과 몇 해 전에도 가람 어르신.... 아니, 가람에게 큰 화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굳이 또 동방으로 가시어 위험을 자처하시려는 겁니까?”
“그 가람 때문입니다.”
“예....?”
“가람은 머나먼 타지에 있는 저를 함정에 빠뜨렸을 정도로 음흉하고 위험한 놈이죠. 놈이 살아있는 한 저는 두 발 뻗고 잘 수가 없습니다.”
“서, 설마 가람과 담판을 짓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긴 싸움이 되겠지만요.”
브라함에게 잠시 되돌려받은 인피면구를 착용한 그리드가 얼굴을 몇 번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더니 물었다.
“이 상태로도 동대륙에서의 운신이 힘들 거라고 보십니까?”
동대륙은 환국의 지배하에 있다.
환국의 백성에 불과한 양반이 다른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할 정도다.
가람에게 완전히 찍힌 그리드의 용모파기가 동대륙 전역에 퍼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그리드는 신중했다.
그리드를 뚫어지게 관찰해본 한속봉이 고개를 저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귀물이로군요. 얼굴은 물론이고 목소리와 체형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니 전하께서 동방에서 활동하신다 한들 누구도 전하의 정체를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리 모습을 바꿔봤자 고유의 기운과 습관까지 감추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동방인 중에서 그리드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죄다 템빨국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그리드를 특정할만한 동방인은 양반 가람 정도밖에 없었는데 양반은 그리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다행이군요.”
안도한 그리드가 인피면구를 벗으며 물었다.
“우선 동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기연들을 파악하고 싶군요. 일단 판게아 성의 지하 던전. 그곳에 더 얻을 게 남아있다고 보십니까?”
“기록에 따르면 판게아 성의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은사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기록에 없던 던전의 심층부까지 도달하신 바가 있지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곳에 무엇인가가 더 남아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저렙 사냥턴 아니니까 한 번 들러봐야겠군.’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이어서 질문했다.
“동쪽 가야에 있다는 청룡도, 서쪽 파국에 있다는 백호창, 북쪽 씽에 있다는 현무보옥을 제가 탈취하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예?”
“실제로 초국은 주작궁을 분실하지 않았습니까?”
주작궁을 분실한 당사자 한속봉이 뜨끔해선 답했다.
“힘들겠지만 불가능할 것 같진 않습니다. 사신수의 무기란 각국의 지보이기에 앞서서 ‘지옥의 균열을 방지하기 위한 결계’이므로 사방위 중에서도 가장 강한 지맥을 지닌 장소에 보관되게 마련이거든요. 남쪽에선 그곳이 판게아였고,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판게아는 지리적으로 요충지가 될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상비군의 숫자가 적었지요.”
“동, 서, 북쪽의 사정도 비슷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맥이 강한 땅은 그만큼 부작용도 많기 때문에.... 한데 전하께서 사신수의 무기를 탈취하시면...”
한속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신수의 무기들이 제자리를 잃게 되면 지옥의 균열이 열리고 악마들이 출몰하게 될 텐데 그럼 동대륙은 지옥도로 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안심시켰다.
“제가 주작궁을 복원했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제 욕심 때문에 수백, 수천 만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 생각 따위 추호도 없습니다. 만약 원본 탈취에 성공한다고 해도 모조품을 만들어 결계에 지장이 없게끔 하겠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사신수의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들의 위치를 표기한 지도와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 목록을 만들어 전하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드가 원하는 동대륙의 기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겠다는 뜻.
과연 한속봉은 기민한 사람이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사악한 도사를 처치하고 판게아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큰 영웅의 정체는 역시 우화등선한 신선일까요?”
작은 영웅의 정체는 크라우젤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한속봉이 힘을 합쳐도 쓰러뜨릴 수 없었다는 사악한 도사를 일격에 쓰러뜨린 큰 영웅의 정체는 도통 알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큰 영웅에게 대놓고 프라이팬을 빼앗겼다던 이단조차도 큰 영웅의 특징을 기술하지 못했다.
“큰 영웅이라.... 저는 요즘도 종종 그분을 떠올리긴 하지만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흐릿합니다. 외모도, 목소리도, 그분과 나눴던 짤막한 대화까지도 모든 게 기억나질 않아요.”
이단이 했던 말이다.
큰 영웅이 어떤 신비한 술법을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대륙에서 신비란 신선의 특징 중 하나였다.
“예, 아무래도 신선일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합니다.”
“신선과 양반의 관계는 어떤지?”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신선이란 평생 한 번조차 만나보기 힘든 존재입니다. 하여 신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지만 양반들이 간혹 신선을 논할 때면 탐탁치 않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적의마저 느껴질 정도였죠.”
‘역시 신선과 양반은 대립하는 건가?’
그리드를 무릉도원으로 인도했던 신선 벤타오는 말한 바 있다.
자신은 기껏 무릉도원에 오르고도 신들의 실체를 엿보지 못한 얼간이라고.
아주 오래 전, 일곱의 악한(칠악성)을 처단해야한다는 신의 뜻을 수행하고자 지상에 내렸다가 칠악성이 사실은 악한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신을 향한 반감이 느껴졌었지.’
그리고 양반은 쫓겨난 신들의 후예 격인 존재들이다.
지독한 선민의식에 찌들어있는 그들과 신선들의 사이가 딱히 좋을 것 같진 않다고 예상했는데 적중했다.
‘양반을 쳤다가 신선까지 적대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부담감을 조금 덜 수 있게 된 그리드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했다.
“동대륙인들은 환국과 양반을 정확히 뭐라고 생각합니까?”
“온갖 재난과 악마로부터 세상을 보우하시는 신들이 계시나니 그들이 바로 양반입니다. 양반들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사신의 무기들 덕분에 세상은 지켜지고 있으며 모든 인류가 양반을 숭배합니다. 하지만 양반조차도 환국의 백성에 불과하며 환국을 세우고 다스리는 이들은 오존과 치우이니 그들을 절대신이라 합니다.”
“그들을 의심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환국은 신들의 나라이며 환국의 왕과 백성은 모두 신이다, 동방인들은 모두 그렇게 배워왔고 전해왔습니다.”
“음....”
라우엘은 추측했었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양반들이 대악마를 토벌하지 않고 차단하는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본인들의 가치 보존을 위함일 거라고.
그리드도 여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신위’ 스탯의 존재 때문이었다.
‘오존과 치우가 진짜 신이고 양반은 그들이 창조한 모조품이라고 가정할 경우 양반의 본래 입지는 서대륙의 대천사 수준이어야 맞다. 하지만 양반은 대천사에 비해서 존재감이 훨씬 크고 능동적이야.’
양반은 인간들에게 숭배 받음으로써 신위 스탯을 쌓고 진짜 신이 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양반은 쫓겨난 신들 즉, 오존과 치우들이 현재의 신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육성 중인 일종의 군대가 아닐까?
“....양반의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전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손이 귀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들 앞에 모습을 비친 양반은 가람을 포함해 7명에 불과했으니 숫자가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손이 귀하다라.... 그만큼 우애도 두터운 겁니까?”
전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파그마의 경우가 있으니까.
역시나.
“아니요. 워낙 자존심들이 강해서인지 서로 인정하고 어울리기보다는 충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다만 오존과 치우에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눈치였죠.”
“우르르 몰려다니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겠군요?”
“그렇습니다.”
‘과연.’
그리드는 양반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주작궁의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단체로 판게아를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 가람은 늘 혼자였다.
‘여러 명의 양반과 동시에 싸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최악은 면한 셈.
마지막 남은 문제는 가람을 레이드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인데.....
‘동대륙에서 사신의 무기를 모조리 확보하고 최대한 많은 퀘스트를 진행해서 강해진 다음 1대1로 테스트해보자.’
그리드가 확신하기로 가람은 펜릴보다 훨씬 더 강했다.
레벨부터가 최소 600이상으로 봐야 맞았고 검술 등의 무예와 사신수의 힘을 이용한 이능력도 구사할 줄 알았으니까.
몬스터가 아닌 NPC로 분류되기 때문에 생명력 총량이 낮다는 약점을 지니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높은 신위를 쌓은 상태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펜릴 레이드에 참가했던 전력을 모조리 거느리고 도전해봤자 레이드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변장까지 하고 다녀야하는 동대륙에서 기사들을 데리고 몰려다녔다간 눈에 띌 공산이 컸고, 최악의 경우 기사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일단 한 번은 죽는다.’
우선 혼자 동대륙으로 가서 충분히 강해진 다음 가람의 전력을 소상히 파악하겠다....
이처럼 죽음마저 불사하는 계획을 세운 그리드가 두려워하기는커녕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닌 경험이고 시작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