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36화 (1,026/1,794)

템빨 54권 - 11화

“올해 국대전의 목표? 그야 당연히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네? 하하, 아니요. 아직 그리드에게 도전하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그리드가 출전하지 않을만한 종목을 노려야겠지요.”

“그리드를 꺾고 새로운 지존이 되는 게 저의 궁극적인 목표이긴 합니다. 하지만 올해의 목표로 삼기에는 허들이 너무 높아요.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리드에게 도전하기에는 이를 것 같네요.”

매해 국대전에 참가했던 익숙한 얼굴들의 인터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각국 여론이 그리드를 의식하고 있는 만큼 선수들 또한 그리드를 언급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경험이 많은 선수일수록 그리드를 추켜세우며 ‘아직은’ 그를 목표로 삼기엔 부족하다고 못 박았다. 겸양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태도였다.

반면 새로운 참가자들은 패기가 넘쳤다.

대부분 갓 하이랭커가 된 젊은 선수들이었다.

“천외천이라고 칭송 받았던 크라우젤의 시대가 3년 만에 끝났죠. 그리고 바로 올해가 그리드가 지존이 된 지 딱 3년째인 해입니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의 시대를 끝냈듯이, 올해는 제가 그리드의 시대를 끝내겠습니다.”

“저는 그리드 님을 존경해서 Satisfy를 시작했어요. Satisfy를 시작한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운 좋게 국대전에 참가할 수 있었네요. 네, 기쁩니다. 드디어 그리드 님을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들떠서 며칠 째 잠도 못 자고 있어요. 목표요? PvP에 참가해서 그리드 님과 싸워보는 거예요. 올해는 그리드 님께 저를 각인시키고, 내년엔 그리드 님을 꺾고 싶어요.”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젊은 하이랭커들은 겁이 없었다.

그리드에게 위축되기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신뢰하며 도전의식을 불태웠다.

그리드를 넘어설 확신은 없어도 최소한 긴장시킬 정도의 재능이 본인들에게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물론 대중은 그들을 비웃지 않았다.

당장은 가소로울 뿐이지만, 앞으로 몇 년 후엔 저들 중 누군가가 정말로 그리드를 넘어설지 모를 일이니까.

“제 목표는 프랑스의 명예를 되찾는 것으로....”

인터뷰는 계속 됐다.

대중들은 저마다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며 국대전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나갔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될 거라는 올해 국대전에선 얼마나 많은 볼거리가 생길지, 또 어떤 극적인 스토리들이 만들어질 것이며 몇 명의 만화 주인공이 탄생하게 될지, 기존의 랭커들을 쓰러뜨리고 초신성이라고 불리게 될 천재는 몇 명이나 나타날지, 그리고 그리드라는 최종보스가 그들을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낼지 등등.

-헐.

-대박.

큰 기대감을 품은 채 어느새 후반부로 치닫고 있는 오프닝 영상에 몰입하던 시청자들이 이내 경악했다.

그리드에 이은 두 번째 건국왕, 군신 아레스가 화면을 꽉 채우며 등장한 여파였다.

“지금은 그리드와 비교해서 삼류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드와 비견되는 일류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발할라가 템빨국의 유일한 대항마가 될 거라는 사실도요.”

스캇, 럭, 헤릴, 스티마 등등.

발할라를 대표하는 강자들의 면면을 카메라가 차례대로 훑고 지나가자 시청자 채팅창이 흥분으로 도배됐다.

올해의 국대전은 템빨단이 휩쓸었던 기존의 국대전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일 거라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소란 속에서.

“저를 먼저 넘어서는 게 순서 아닐까요.”

영상이 암전되더니 듣기 좋은 미성이 낮게 깔렸다.

이어서 교체되는 화면.

창천을 가로지르는 매의 모습을 비추던 카메라가 반전되더니 어느 이름 모를 산의 정상을 포커싱했다.

황룡 자수가 놓인 묵색의 도포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아....

-존재 자체가 멋짐.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암벽 위에 오른 채 세상을 오시하고 있는 흑발 장발의 사내, 다름 아닌 검성 크라우젤이었기에.

“그리드에게 도전하기에 앞서서 우선 제게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스카악-!

모든 참가자를 향한 경고와 함께 크라우젤이 등지고 선 세상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거대한 왕성이 등장했다.

카메라가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지나자 왕좌 위에 앉은 그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와 전설의 농부 피아로를 필두로 시청자들에게도 낯이 익은, 혹은 낯선 인물들이 그의 좌우에 시립해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크라우젤 못지않거나 도리어 압도했으므로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턱을 괸 채 카메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시해.”

“네?”

진행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전파를 탔다.

그녀는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적수가 없는 대회에 참가해봤자 뭐합니까? 제게 있어서 국대전은 시간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발언.

대본에 없던 상황이 발생하자 당황한 진행자가 다급히 반문했다.

“올해 국대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끄덕.

고개를 움직여 긍정한 그리드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 꼬리를 올린다.

도발적인 미소였다.

“검성의 검이 조금 더 무르익기를 기다리도록 하죠.”

***

그리드의 인터뷰로 오프닝 영상이 마무리 된 후.

-팩트))작년에도 그리드는 국대전에 참가 안 하겠다고 이빨 깠다.

-맞아. 그래놓고 마왕으로 참가해서 사람들 뒤통수 거하게 후려쳤지.

-금메달 보상이 얼마나 개꿀인데 그걸 포기한다고? 어림도 없지 ㅋㅋ

-흠.... 한 번이라도 마왕 역할을 맡았던 사람은 두 번 다시 마왕 역할 못 맡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게. 올해 새로 생긴 종목 중에 마왕 토벌전이랑 비슷한 종목이 있던가?

-그리드 참가 안 한다는 거 진심 같은데....

-내가 그리드였어도 시시해서 참가 안 했을 듯.

-아-_- 그리드가 양학하는 게 국대전의 백미인 것인데.

-그리드 없는 국대전?ㅋㅋ 개노잼일듯.

부정, 수긍, 실망.

대중들의 반응이 여러 단계를 거쳤다.

급기야 S.A그룹이 그리드의 불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자 언론도 발칵 뒤집혔다.

지존 없는 국대전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들과, 크라우젤 또한 1차 국대전엔 참가하지 않았던 점을 예로 들며 도리어 이편이 밸런스가 맞아 볼거리가 많을 거라는 의견들이 철저히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내 내려진 결론은,

『올해 국대전의 주인공은 크라우젤이 되겠군요.』

이와 같았다.

『제1회 국대전의 주인공은 그리드였죠. 그리고 바로 다음 해 국대전에서 그리드는 당시 지존이었던 크라우젤과 호각을 겨루며 새로운 하늘의 등장을 암시했습니다. 올해 국대전의 주인공이 될 크라우젤이 내년부터 다시 그리드와 호각을 겨룰 것 같다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끼워 맞추기 좋아하는 언론이 앞장서 불을 지피자 대중의 관심이 일제히 크라우젤에게 집중됐다.

과연 그가 템빨단과 아레스 군단을 상대로 활약할 수 있을지, 데미안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올해의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세상물정 모르는 햇병아리 신인들을 그리드처럼 완벽하게 압살할 수 있을지 등등을 주제로 여론이 들끓었다.

검성 크라우젤의 인기는 과연 대단해서 그리드의 공백을 메울 정도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

<(칼럼)고인 물은 썩게 마련. 그리드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 분명하다.>

<(칼럼)한때의 라이벌이었던 크라우젤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한 그리드. 절대지존의 위치에 염증을 느낀 그는 새로운 경쟁자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칼럼)크라우젤은 그리드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을까?>

그리드의 국대전 불참을 놓고 세상이 일방적인 해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경쟁자들에게 국대전 무대를 양보한 그리드의 선택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리드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국대전에 참가조차 안 했는데도 역대 어떤 국대전 기간보다 더 많은 기업들에게서 광고모델 제안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드는 모든 제안을 당연히 거절했다.

그가 금메달 보상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이번 국대전에 불참한 이유는 시간이 필요해서였으니까.

-인터뷰에서 싸가지 없게 말한 거 정말로 미안해.

-아니, 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 사과할 필요 없다.

작년 국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크라우젤은 게임 시간으로 장장 3년 가까이를 키리누스 밑에서 수학했다. 창술을 마스터해서 검술의 강화에 응용하고 의지와 이기어검을 단련하는 등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강해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레벨의 정체다.

키리누스 밑에서 수련하는 기간 동안 사냥을 할 수 없었던 크라우젤의 레벨은 작년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

수련을 통해서 온갖 특수 스탯을 강화하고 새로운 스킬들을 습득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크게 상승했다지만 그리드와 비교하면 레벨이 너무 낮았다.

올해는 기필코 그리드의 적수가 되겠노라 다짐했지만 여의치 않아진 것이다.

크라우젤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고 그리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년엔 꼭....’

[레벨이 올랐습니다.]

제5회 국대전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어느 날.

드디어 키리누스의 오두막을 떠난 크라우젤이 오래간만에 사냥터를 방문했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며 광렙 모드에 돌입했다.

***

<펜릴의 망토>

등급:에픽(성장형)

내구력:285/285 방어력:190

*모든 피해 15퍼센트 경감

*모든 저항력 10퍼센트 상승

*피격 시 낮은 확률로 망토의 일부가 박쥐로 분열합니다. 이때 망토의 방어력과 옵션은 그대로 유지되며 박쥐는 적으로 인식한 대상을 공격합니다. 박쥐는 대상의 시야를 교란함과 동시에 대상에게 각각 500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히고 입힌 피해의 100퍼센트만큼 착용자의 생명력을 회복시킵니다.

★망토의 등급이 레전드리까지 성장할 경우 뱀파이어 후작 펜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펜릴 소환 시 <혈왕>의 효과로 펜릴의 완전 해방이 가능해집니다.

사용 조건:혈왕

무게:510

천사의 축복 덕분인지 펜릴이 드롭한 아이템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특히 목가에 풍성한 털이 둘러져있어 멋진 펜릴의 망토는 란스티어의 망토와 비견되는 성능을 자랑했다.

레전드리 등급의 란스티어 망토가 찌르기, 베기, 투척 공격으로 받는 피해를 20퍼센트 경감시켜준 반면 펜릴의 망토는 아직 에픽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류의 피해를 15퍼센트 경감시켜줬다.

또한 란스티어의 망토는 기후에 따라서 일부 저항력을 상승시켜줬던 것과 달리 펜릴의 망토는 항시 모든 저항력을 상승시켜줬다.

물론 란스티어의 망토는 10퍼센트 확률로 물리 공격을 차단하는 사기적인 옵션을 지니고 있었지만 펜릴의 망토에 있는 박쥐화도 만만치 않았다.

테스트 결과 망토는 정확히 31마리의 박쥐로 분열했는데 이는 즉 대상에게 최대 15,500의 고정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뜻이며 또 그만큼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 됐다.

더군다나 박쥐는 대상의 시야를 교란하기까지 했다.

망토의 등급이 오를수록 박쥐화 확률이 올라가고 박쥐의 숫자와 데미지도 늘어날 공산이 컸으므로 란스티어의 망토보다 좋아질 거라는 게 그리드의 평가였다.

그리고 펜릴의 망토만큼 대단한 아이템이 바로 이 기묘한 마력의 돌이었다.

<기묘한 마력의 돌>

등급:레전드리(성장형)

대상 아이템의 등급을 돌의 등급과 동일한 수준까지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초월자, 대악마, 대천사, 반신 사냥 시 마력 흡수(현재 0/5)

*마력 흡수 최대치에 도달 시 돌의 등급이 한 단계 성장

무게:1

그리드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바로 펜릴의 망토에다가 쓸까?’

아니, 아니다.

망토는 전투 중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경험치를 올리기 굉장히 쉬운 부위다.

레전드리 등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엘핀스톤의 반지와 라티나의 목걸이에 쓰는 것도 사치다.

에티마의 대검과 크레이의 팔찌는 각각 크리스와 유페미나가 대리육성 중이므로 패스.

결국 남는 후보는 하나뿐.

루쏜의 신발이다.

하지만 당장 루쏜을 소환하겠답시고 마력의 돌을 소비하는 건 그다지 현명해보이지 않았다.

마력의 돌을 신화 등급으로 만들 수만 있으면 ‘최대 신화 등급까지 성장 가능한 아이템’에 사용해서 즉시 성장시킬 수 있는데 흡혈 옵션을 제외하면 성능이 너무 평범해서 사용 자체를 꺼려해온 루쏜의 신발 따위에 마력의 돌을 투자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찮지만 노가다가 필요하겠어.’

루쏜의 신발은 가죽 부츠라는 특성상 방어력이 너무 낮았고 그나마 장점인 흡혈 옵션도 흡혈 반지와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했다.

그리드가 방치해뒀던 이유다.

누군가에게 대리 육성을 맡기기에도 허접했기 때문에 그리드는 루쏜의 신발을 뒷전으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그리드는 혈왕이 되었고 모든 직계를 해방해서 가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전력 상승을 위해선 루쏜의 신발도 꼭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시켜야했다.

그리드가 국대전 불참을 결정하게 된 이유다.

그리드는 국대전에 참가한답시고 미국까지 날아가고 온갖 공식 일정을 소화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바에 차라리 사냥에 열중해서 직계 장비들의 등급을 성장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마력의 돌의 등급도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천사는 함부로 적대할 수 없는 대상이고 내가 아는 초월자나 반신은 지혜의 탑의 결사들과 그랜드마스터가 전부인데....’

지옥은 인간의 출입을 불허한다.

직접 지옥으로 찾아가 대악마를 레이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대악마의 강림을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골머리를 썩던 그리드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양반?’

무신의 추종자 이정은 환국의 양반들이야말로 쫓겨난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리드가 만나본 유일한 양반 가람은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 신과 비견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양반 중에서도 오존과 치우 등의 지극히 일부만 쫓겨난 신들이고 가람 같은 존재들은 신의 후예쯤 된다는 뜻.

그들이야말로 반신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가람.”

복수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그리드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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