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35화 (1,025/1,794)

템빨 54권 - 10화

“이제 와서 종목을 늘리자고요?”

제5회 국가대항전의 기획총괄을 맡은 윤상민 이사.

직접 미국까지 날아와 무대를 꾸미던 그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잔슨 사장의 난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미스터 그리드가 혈왕이 되고 말았네.

“템빨국이 벌써 펜릴을 레이드했다는 말씀입니까?”

마리로즈 다음가는 직계 뱀파이어 펜릴의 전투력은 ‘인계에 강림한’ 19위 대악마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시조 베리아체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자식이라는 설정과 히든 피스 <혈왕>의 마지막 열쇠라는 설정이 맞물리면서 여러 가지 보정 효과를 얻은 결과다.

물론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가 대악마보다는 하위종이기 때문에 생명력 수치가 많이 낮았지만 ‘적이 강할수록 강해지는’ 투쟁의 권능과 ‘적의 무기와 스킬을 무력화시키는’ 지배의 권능은 그리드의 기사들을 카운터 치기에 최적화 된 능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브라함이 500레벨까지 성장하기 전.

그러니까 최소 올해 국가대항전이나 최대 내년 국가대항전까진 그리드가 혈왕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운영팀은 판단했었다.

한데 벌써 혈왕이 됐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했죠?”

-브라함의 마법 활용 능력이 펜릴의 여러 강점을 무위로 돌렸다네. 브라함이 이번 레이드에서 사용한 마법은 그리드의 마나를 이용해서 간접 발동시킨 프로즌 템페스트를 포함해도 총 4개밖에 안 됐는데 레이드 내내 펜릴의 회복력을 원천 봉쇄해버렸어.

“지공....”

Satisfy의 인공지능은 학습하고 진화한다.

그중에서도 월등한 지력을 지닌 브라함의 저력은 운영팀의 예상마저도 초월한 것이다.

-안 그래도 비반을 만나 급성장한 그리드가 혈왕까지 되었으니 그 어떤 플레이어가 그리드와 비벼볼 수 있겠나? 차라리 PvE 종목을 늘려서 참가자들과 그리드의 직접적인 경쟁을 최소화시키는 편이 Satisfy의 흥행 유지에 좋을 거라는 게 임원들의 의견일세. 물론 당장 대회의 흥행성은 약해지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플레이어들의 박탈감을 줄이는 편이 좋지 않겠나?

“아직 이사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닌 거군요.”

-당장의 성과에 혈안이 된 족속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하지. 이사회에서 국대전의 흥행성 저하를 잠자코 보고만 있겠는가? 하지만 여태껏 몇 년 동안 국대전을 흥행시켜온 자네가 우리의 편에 서서 힘을 실어주면 그들도....

“혹시 잊으셨습니까?”

잔슨 사장의 말을 도중에 끊은 윤상민 이사가 고작 1년 전의 분위기를 회상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지존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점치고 꿈과 희망을 품어왔습니다. 지존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아닌 동경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이미 몇 번이나 증명되었죠. 설령 올해도 그리드가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준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이 그에게 박탈감을 느낄 리 만무합니다.”

-아니 그것도 한 두 번이지. Satisfy를 플레이하는 사람 대다수가 본인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 가장 큰 쾌락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네. 지난 1년 동안 그리드라는 우상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해온 그들이 그리드와 도리어 더 격차가 벌어졌음을 알게 되면 그때도 단지 그리드가 대단하다며 웃어넘길 것 같은가? 기껏 이룬 성장에 품었던 만족감을 한 순간에 상실하고 의욕을 잃을 거라곤 생각 못하는 건가?

“....Satisfy가 출시되기 전까지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던 어떤 게임이 떠오르는군요.”

-미국 회사가 만든 AOS 장르의 게임 말인가?

“맞습니다. 자그마치 30년 이상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구가했던 게임이죠. 그 게임이 국제대회를 열기 시작하고 무려 10년 동안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한국이 거의 독점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네만.

“처음 몇 년 만 해도 서구권 플레이어들은 한국 팀들의 우승 독점을 마냥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한국인들이 e스포츠에서 선전하는 이유를 ‘그들이 게임 아니면 놀 거리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불쌍한 인종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등의 조롱과 적폐라는 비난을 일삼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도 처음 몇 년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 같은 결과가 반복되다보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도리어 인정하고 리스펙하게 됩니다. 그리드를 향한 사람들의 감정은 사장님의 예상과 정 반대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는 뜻입니다.”

-그건 너무 긍정적인 해석 아닌가?

“아니요. 확신합니다. 특히 하이랭커일수록 그리드의 선전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클겁니다. 그래야만 언젠가 따라잡았을 때의 희열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드가 지존의 자리를 놓치는 일이 있을 거라고 보나?

“템빨국을 넘어서는 세력은 나타나기 힘들겠지만 그리드 개인의 무력을 넘어서는 플레이어는 충분히 나타날만 합니다.”

곧 만나게 될 인물이 그 후보 중 하나다.

“오프닝 영상 촬영 시간입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윤상민 이사가 캡슐에 몸을 뉘였다.

Satisfy, 발할라 왕국.

“어서오십시오, 이사님.”

미리 접속하고 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윤상민 이사를 반겨주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태프 전원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눈 윤상민 이사가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올해 국대전에 참가할 예정인 발할라 왕국 소속의 랭커들.

속칭 아레스 군단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하신 분들께 오라 가라 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군신(軍神) 아레스.

수 년 동안 비공식 랭커로 활동하다가 그리드에 이어서 왕국을 세우고 이름을 알린 거물 중의 거물.

최근 개화 된 직업 특성 덕분에 '부하가 늘어날수록 능력치 상승'이라는 역대급 패시브 스킬을 얻게 된 그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윤상민 이사와 스태프들을 반겼다.

윤상민 이사가 손사래 쳤다.

“아니요. 1분, 1초가 귀중하신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오프닝 촬영에 참가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제1회 국대전까지만 해도 S.A그룹의 오프닝 제작 방식은 고리타분했다. 참가자들을 지역별 스튜디오로 소집한 후에 영상을 촬영한 탓에 참가자들의 게임 플레이 시간에 큰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어차피 영상 촬영은 Satisfy에 접속한 후에 진행되는데 굳이 현실에서 소집령을 때렸으니 많은 비난을 받아야했다.

S.A그룹 측에서 직접 플레이어를 찾아다니며 촬영하게 된 계기다.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작년, 재작년 참가자들처럼 단체로 눈에 힘주고 폼 잡고 서있으면 되는 거요?”

럭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는 1초라도 사냥터를 떠나있으면 불안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럼에도 굳이 촬영에 임한 이유는 역대 국대전 오프닝 영상들이 다소 오글거리긴 해도 멋졌기 때문이다.

아레스 군단원 대부분이 국대전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니만큼 기왕이면 오프닝 영상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올해의 오프닝 영상은 인터뷰 형식으로 촬영할 겁니다.”

“인터뷰?”

“참가자들이 각자 지닌 환경, 목표, 사상, 그리고 참가자들이 대회에 임하는 각오 등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시청자들의 대회 몰입도를 높이려는 의도죠.”

“나쁘지 않군요.”

나 말 잘 못하는데....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럭과 달리 스캇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겠어요.”

“네, 맞습니다. 그게 저희의 의도이죠.”

팬의 힘은 강하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그리고 유라 등의 랭커들이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랭커가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인기를 끌수록 Satisfy의 인기에도 깊이가 더해졌다.

S.A그룹과 랭커들 서로 윈-윈 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특히 아레스 군단처럼 백성 1명이라도 귀중한 약소국 입장에서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기회란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은 가치로 다가왔다.

“그럼 아레스 님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시겠습니까?”

윤상민 이사가 신호를 보내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조명과 반사판이 곳곳에 설치되며 아레스의 갑옷과 왕관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솜씨로 아레스의 얼굴에 음영이 추가됐다.

그러자 아레스의 위엄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화려하게 담겼다.

“아레스 선수는 긴 세월 동안 비공식 랭커로 활약하셨죠. 플레이어로써는 두 번째로 국왕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에게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굳이 신비주의를 버리고 국대전 참가를 결심하게 되신 계기가 뭡니까?”

진행자가 대본대로 질문을 던졌다.

진행자의 음성과 질문은 오프닝 영상에선 삭제 될 예정이다.

윤상민 이사는 참가자에게 최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고 많은 질문을 받은 뒤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서 정수만을 편집해 영상에 내보낼 계획이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미국의 풍경과 교차되며 떠오를 선수들의 인터뷰는 국대전을 기다려온 시청자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 것이다.

“삼류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입니다.”

푸근한 동네 아저씨마냥 허허 웃던 아레스가 촬영에 돌입하자마자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의 진중하고 또렷한 음성에는 청자를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고 눈빛에는 좌중을 압도하는 강렬함이 있었다.

괜히 국왕이 아닌 것이다.

아레스에게는 위에 서는 자들 고유의 포스가 있었다.

“발할라 건국 뒤 저의 행보는 수시로 그리드와 비교되며 대중의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전반적으로 악평이었죠. 템빨국을 제국과 쌍벽을 이루는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그리드와 비교해서 저는 실패만을 반복해왔으니까요.”

“물론 제가 그리드보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발할라가 여전히 약소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인 증거이죠.”

“다만 저는 잠재력을 증명해보이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리드와 비교해서 삼류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드와 비견되는 일류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습니다.”

‘역시.’

윤상민 이사의 확신에 힘이 실렸다.

잔슨 사장의 염려와 전혀 다른 아레스의 저 마음가짐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무조건 질투하거나 박탈감을 느껴 좌절하는 것이라면, 과연 인간의 사회는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아니다.

질투보다는 존경, 좌절보다는 경쟁심을 느껴왔기에 인간은 보다 발전해올 수 있었다.

익명성에 기대어 저열한 반응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일부 네티즌이나 질투심에 눈이 멀어 비겁한 선전을 펼치는 일부 플레이어들은 절대 다수가 아닌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와서 새로운 종목 추가 따윈 없다.’

윤상민 이사의 마음이 확실히 정해졌다.

며칠 뒤.

첫 번째 오프닝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온 세상이 들썩였다.

사람들은 영상 마지막에 등장한 그리드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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