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9화
“.....”
지배의 영역.
펜릴의 고유 결계에 끌려온 피아로는 큰 위기를 각오했었다.
하지만 정작 결계 속에는 어떠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요한 사막의 풍경이 황폐하고 쓸쓸할 뿐이다.
“불사의 존재라....”
뱀파이어의 영생을 시기하는 인간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시기의 대상으로 적합한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관에서 보내야하는 그들의 영생을 과연 축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애정에 목말라하는 놀의 모습을 떠올려본 피아로는 뱀파이어가 참으로 가여운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끼잉! 끼잉!
토실토실 살이 오른 새끼 늑대가 피아로의 발에 다가와 뺨을 비볐다.
피아로와 눈이 마주치자 벌렁 배를 내밀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태도를 보아 사랑 받는 일에 익숙한 듯했다.
빙그레 미소 지은 피아로가 늑대의 부드러운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하치카냐.”
컹!
고개라도 끄덕일 기세.
하치카가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대답하자 피아로의 미소 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구나.... 네 주인은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도 애정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고유 결계의 정체는 사용자의 심상을 투영하는 것이다.
심상이란 즉 마음의 바탕으로, 위험한 존재의 심상일수록 위협적인 법이었다.
반면 펜릴의 심상이 표현하는 것은 고독과 애정.
펜릴 본인은 자신의 심상 속에 존재하는 하치카의 환영이 지배를 상징한다고 믿는 것 같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지배가 아닌 교감이다.
‘....어쩌면 이게 지배라는 성격의 본질이거나 궁극적인 모습일 수도 있겠군.’
하긴, 그래야만 베리아체가 펜릴에게 걸었던 기대를 이해할 수 있다.
일족의 결속과 자유를 원했던 베리아체가 폭군이 혈왕이 되는 걸 원했을 리 없으니까.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피아로가 그것을 사막에 심었다.
하나의 씨앗이었다.
씨앗은 곧 뿌리를 내렸고 감자가 열렸으며 위로 푸른 줄기를 뻗어나갔다.
고유 결계를 탈출하는 3가지 방법 중 하나.
마음의 바탕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쩌적━! 쩌저저저적!!
황량했던 사막에 앙증맞은 감자 꽃이 피어나자 결계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끼잉....
하치카가 피아로의 발목에 매달렸다.
혼자 남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듯해 가엽지만 녀석은 진짜가 아닌 환영에 불과했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피아로는 녀석을 남겨둔 채 결계를 빠져나왔다.
이내 현실에서 눈을 뜬 그는 소용돌이치는 연살화극(聯殺花極)의 검무가 펜릴을 난도질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쿨럭....! 쿨럭!!”
두 다리에 박힌 황금색 창 탓에 주저앉는 펜릴.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침입자들의 면면을 살펴본 그가 놀과 티라멧에게 질문했다.
“설마 너희가 저놈을 혈왕으로 만든 건가?”
티라멧은 대답하지 않았고 놀은 황급히 손사래 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한테 무슨 재주가 있어서 멋대로 혈왕을 만들겠어?”
“그럼 저놈은 무슨 수로 벌써 혈왕이 된 거지?”
“그리드는 혈왕이 아니야. 아직 후보라고.”
“뭐....? 혈왕이 아닌데도 지배의 권능을 무시했다고?”
그리드라는 이름이었는가.
자신을 꺾은 최초의 인간을 빤히 쳐다보던 펜릴이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단순히 괴물이었군.”
펜릴은 인간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파그마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와 직접 마주쳐본 적이 없으므로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라는 이유로 지배의 권능을 저항했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그리드가 자신보다 높은 격을 지닌 역대 최강의 초월자라고 오해하는 수밖에.
그렇기에 더욱 더.
“....너는 혈왕이 되면 안 된다.”
펜릴은 그리드를 부정했다.
번쩍!
“....!?”
그리드 일행이 당황했다.
펜릴이 허공으로 손을 뻗자 새카만 천장 한가운데서 빛이 번쩍였는데 그것이 마치 태양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깊은 지하에, 심지어 태양을 두려워하는 뱀파이어들의 도시에 태양을 닮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밝은 빛에 적응하지 못한 그리드와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렸고,
푸우우우욱-!
펜릴의 권능에 완전히 지배당해 있던 태양의 귀검이 그리드의 정수리에 벼락 같이 꽂혔다.
“....윽.”
신음을 통하는 그리드의 신형이 휘청거린다.
“오빠!!”
경악한 루비가 황급히 힐을 쓰려고 했지만 태양의 귀검과 마찬가지로 방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주인 잃은 무기들이 일제히 스스로 떠오르더니 그녀에게 쇄도해 저지했다.
지배의 권능의 위용이었다.
펜릴은 전 침입자들이 떨어뜨려놓고 간 모든 무기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지만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고 있던 것이다.
맥없이 쓰러지는 그리드를 보고 죽었다고 판단한 펜릴이 브라함을 노려보고 말했다.
“혈왕은 존재해선 안 된다. 혈왕이 탄생하는 순간 마리로즈는 복수를 거행할 테고 일족 전체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고 말테니.”
“.....”
“일족의 원한? 일족의 번영을 위한 복수? 개소리다.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원한이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복수겠지. 그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이 너는 옳다고 보나?”
“.....”
“혈왕의 탄생은 일족을 모조리 지옥으로 내몰 것이다. 강대한 힘을 지닌 마리로즈와 혈왕을 제외한 일족 전원을 몰살시킬 것이다.”
펜릴의 시선이 놀과 티라멧을 스쳤다.
인간의 편에 선 형제들을 목격하고도 일말의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너희들은 이미 나태의 저주를 극복했다. 굳이 혈왕을 세워서 복수의 도구를 자처할 필요 따위 없어. 너희는 혈왕이 없는 세계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라.”
“....펜릴.”
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펜릴이 혈왕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이유가 형제들을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자 감격한 것이다.
반면 브라함은 콧방귀 뀌었다.
잠자코 있던 그가 입을 열며 드러내는 것은 명백한 조소였다.
“지랄하는군. 너는 단지 타인이 자신 위에 군림하는 걸 용납하기 싫은 거겠지.”
“헛소리.”
“그 쓸모없는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마음에 발악하는 거겠지.”
“헛소리다!”
“아니, 사실이다. 내가 네놈의 천성을 모를 것 같으냐? 너는 무의미한 존재라도 좋으니 그저 영원히 존재하기만을 꿈꿨던 저열한 겁쟁이에 불과했다. 어머니를 향한 투쟁심을 좋은 핑계거리삼아 관속에 틀어박혔던 비열한 겁쟁이에 불과했다.”
“닥쳐라!!”
“얼마 전에 마리로즈와 접촉했다지? 멋대로 인간 세계로 뛰쳐나간 녀석이 혹 반려를 만나 새로운 자식을 낳고 너를 쓸모없는 존재 취급할까봐 두려워서 녀석을 황급히 뒤쫓았던 거겠지?”
“닥쳐!!”
“너를 언제라도 없앨 수 있는 마리로즈 앞에서는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하는 쥐새끼 따위가 이제와 그딴 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고? 정말이지 저열한 놈답게 염치가 없구나.”
“동족을 해친 미치광이 주제에!!”
듣다 못한 펜릴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리드에게 꽂혀있던 태양의 귀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이익!
펜릴이 손에 독한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태양의 귀검을 더욱 불끈 쥔 그가 브라함의 목을 베고 말겠다는 의지를 품고 몸을 날렸다.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불의의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멀쩡히 살아서 나타나자 놀란 펜릴이 뒷걸음쳤다.
“네, 네놈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리드는 펜릴 이상의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근데 검에 찔리고도 살아있는 모습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머리를 긁적인 그리드가 대답해주었다.
“템빨.”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대답이었다.
전설 직업 패시브로 5초 불사 상태에 돌입했던 그리드.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 <두 시대의 주역> 칭호 효과로 20퍼센트의 생명력을 불시에 회복한 그는 겉보기와 달리 생명력에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발할라와 란스티어의 망토 등, 레전드리급 방어구들을 도배하고 있는 그를 고작 ‘허공에서 떨어진 공격력 1천대의 검’이 죽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루비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이유다.
“그, 그리드, 나는 잘 모르겠어.”
울상을 지은 놀이 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나태의 저주를 극복한 이후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자애의 성격 탓에 기본적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 그는 펜릴이 이대로 죽는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설령 브라함의 말대로 펜릴이 단순한 이기심 때문에 목숨에 집착하는 거라고 해도 가엽고 불쌍해서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뭘 몰라. 죽여야지.”
직계 뱀파이어는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불사의 존재이다.
티라멧이 대표적이 증거다.
대악마처럼 완전체로 부활하진 못해도 펫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드는 펜릴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펜릴을 일단 봉인해야한다고 판단했다.
푸우우욱-!
몬스터의 한계는 물약을 복용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진 검에 얻어맞고 놀라 뒤로 자빠진 틈에 물약까지 복용해 생명력을 크게 회복한 그리드와 달리 펜릴의 생명력은 여전히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놀라운 회복력으로 생명력을 충분히 회복했겠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쿨럭....!”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대장장이의 분노와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검술의 문외한인 펜릴이 어설프게 휘두르는 태양의 귀검을 가볍게 회피한 그리드가 2융합, 3융합 검무를 여러 번 연계하자 펜릴이 피를 토하며 잿빛으로 산화했다.
하지만 다른 직계 뱀파이어들이 그러했듯이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망토로 스며든다.
그것을 루비가 막으려고 했지만 그리드가 제지했다.
[뱀파이어 후작 ‘펜릴’을 봉인하였습니다!]
[<암흑의 룬>에 <펜릴의 힘>이 귀속됩니다!]
<펜릴의 힘>
종류:패시브
지지 않는 투쟁심을 발휘합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와 1분 이상 전투 시, 레벨 차이에 따른 공격력과 방어력 경감 효과를 무시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대천사 사리엘의 축복이 발생합니다! 아이템 드롭률이 500퍼센트 상승합니다!!]
[<펜릴의 망토>를 획득하였습니다.]
[<최상급 흡혈 반지>를 획득하였습니다.]
[<기묘한 마력의 돌>을 획득하였습니다.]
[<태양의 귀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엘릭서> 10개를 획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