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30화 (1,020/1,794)

템빨 54권 - 7화

시조 베리아체가 펜릴을 혈왕 후보로 선택했던 이유는 하나다.

펜릴이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이 투쟁과 지배라는 점.

투쟁심이 펜릴 본인과 혈족을 발전시키고 지배욕이 혈족을 결속시키리라 믿은 베리아체는 펜릴이야말로 복수라는 대업을 이뤄줄 인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녀의 예상을 처참히 빗나갔다.

투쟁과 지배의 성격이 상충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펜릴은 자신 위에 베리아체라는 지배자가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고, 복수의 대상이 아닌 어머니 베리아체에게 투쟁심을 불태우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설령 모든 형제들을 꺾고 혈왕이 된다 해도 어머니를 넘어설 수 없으며 평생 그녀의 수족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엇나간 이유다.

그가 나태의 저주를 핑계로 복수를 외면하고 평생 관 속에 틀어박혔던 계기는 일종의 반항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뒤틀림을 고작 치기나 무지로 비하하고 비난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성격이 단 두 개로 구성됐다는 점이었으니까.

피조물의 한계인 셈이다.

피의 연쇄를 통해 진혈족 뱀파이어를 만들고 일족을 꾸릴 수 있는 직계 뱀파이어들은 스스로를 위대한 창조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실상은 그들 또한 진혈족 뱀파이어와 다를 게 없는 신세였다.

단 두 명.

베리아체가 자신의 영혼까지 바쳐가며 낳은 완전체 마리로즈와 탐구심을 품고 스스로 진화해온 브라함을 제외하면 말이다.

‘....혈왕!’

쿠와앙!

흑발 인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얼굴 가죽이 뒤집힐 것만 같은 풍압이 덮쳐온다.

처참하게 잘려나간 손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휘둘릴 틈이 없다.

펜릴은 자신의 동체시력으로도 방심하면 자칫 놓칠 것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인간을 추적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눈알을 굴려야했다.

콰르르륵!!

구멍난 지하에 강물이 빨려 들어갈 때 이런 소리가 날까.

공기를 찢어발기며 근접해오는 그리드의 공격을 또 한 차례 간신히 피해낸 펜릴이 재차 지배의 권능을 발현해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놈은 혈왕이다.’

펜릴은 여태껏 지배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단 두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베리아체와 마리로즈.

자신보다 타고난 격이 높은 그들만이 지배의 권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즉, 눈앞 인간 놈의 격이 나의 격을 초월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 존재는 혈왕밖에 없다.

인간들이 자랑스럽게 떠받드는 전설과 초월자들도 나의 격을 따라잡지는 못 했었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범람하는 혼란이 펜릴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혈왕의 탄생은 승리로부터 비롯되게끔 설계되어있다.

마리로즈를 제외한 모든 직계와 싸워서 이긴 자야말로 혈왕으로 등극하며 그 전까지는 후보 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펜릴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눈앞 인간은 아직 혈왕 후보에 불과해야 정상인 것이고 펜릴의 격을 넘어선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한데 이놈은 대체 무슨 수로....

“연(聯).”

“....!!”

펜릴이 한 순간 그리드의 움직임을 놓쳤다.

태산을 베어 평야로 만들고 바다를 갈라 해일을 일으킬 기세로 검을 크게 휘두르던 그리드가 갑자기 검술에 변화를 일으키자 검로가 섬세하게 이어지더니 쾌속의 극에 이른 까닭이었다.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커억!”

아름다운 예술품 같던 펜릴의 신체가 단번에 넝마가 되었다.

수십 개의 상처로부터 동시에 피를 내뿜는 그의 주변으로 자욱한 혈무가 번져나갔다.

화르륵!

꺼지지 않는 불꽃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급기야 펜릴의 상처 틈새로 스며들어가 펜릴의 오장육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와....’

풀 버프 상태로 전투에 집중 중이던 그리드가 잠시 넋을 잃었다.

십만대군 학살검 2연타와 검무 단일기 3회, 그리고 평타 9회 적중에 성공한 그가 소모시킨 펜릴의 생명력은 10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상위종의 초네임드급 보스이자 ‘혈왕’이라는 히든 피스와 관련 된 존재답게 펜릴의 생명력과 방어력은 무시무시했다.

한데 브라함의 마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펜릴의 생명력 게이지를 소모시키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이름 그대로 펜릴을 잿더미로 만들기 전까진 절대 꺼지지 않을 기세였다.

‘저 마법 한 방만 맞춰놓으면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윽!”

감탄하던 그리드가 검을 황급히 역수로 쥐었다.

그러자 곧추선 무아검의 검면 위로 펜릴의 주먹이 충돌했다.

꽈앙-!!

[11,5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방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공격력이다.

본래 방패가 아닌 무기로 공격을 방어할 경우엔 모든 데미지를 흡수하지 못하게 마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아프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리드의 몸이 살짝 떠오르자 팽이처럼 회전한 펜릴이 좌장을 출수했다.

무예의 영역은 아니었다.

호랑이가 타고난 신체능력과 본능으로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펜릴은 자신의 강력한 육체를 그저 본능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콰자작!

펜릴의 좌장이 그리드의 급소가 아닌 허벅지 위에 꽂혔다.

그의 본능은 이 일격으로 인간의 한쪽 다리를 찢어발긴 후 이어서 목덜미를 쥐어뜯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인간의 다리는 꿈쩍도 안 했다.

강철을 두부처럼 으깰 정도로 강력한 펜릴의 공격에 확실하게 적중당하고도 다리가 날아가기는커녕 멀쩡하게 버텼다.

펜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과연 혈왕....! 격뿐만 아니라 육신마저도 나를 초월한 것인가...!’

아직 나를 꺾지도 못한 놈이 무슨 수로 혈왕에 등극했단 말인가.

다시 한 번 피어오르는 의문과 혼란을 간신히 억누른 펜릴이 위축돼서 물러났다.

한편 그리드는 십년감수하고 있었다.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가 피격 데미지를 흡수했습니다!]

하반신 피격 시 낮은 확률로 피해 무시.

비록 조건이 붙긴 하지만 발동하는 순간 미친 사기 효과를 발휘하는 옵션이 발동해준 덕이다.

이게 아니었으면 흑화로 인해 생명력 최대치가 감소한 현재 상태에선 위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오싹하다.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어째선지 공격을 연계해오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 펜릴을 추적했다.

“무상농법 극의! 밤고구마 난타!”

그리드가 시간을 버는 틈에 밭을 일궈놓은 피아로가 화려한 기습을 날리고 있었다.

양손에 굵은 줄기를 붙잡고 바위처럼 커다란 고구마 수십 개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피아로의 위용에 놀란 펜릴이 자리를 이탈하려했지만 어느새 쫓아온 그리드가 날리는 검을 막느라 피하지 못했다.

퍼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안 그래도 넝마가 된 채 화마에 타오르고 있던 펜릴의 등짝 위로 고구마 폭격이 떨어졌다.

그리드의 검을 막아낸 채로 큰 타격을 입은 펜릴이 연신 몸을 꿀렁이면서 피를 토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4융합 검무로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는 그리드의 귓가로 메르세데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물러나세요!”

“....?”

반사적으로 검무의 전개를 멈추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진 그리드의 목덜미로 펜릴의 수도가 꽂혔다.

의도치 않게 허점을 노출한 그리드를 절묘하게 위협하는 한 수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죽음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까앙-!

은익을 펼치고 날아든 메르세데스의 검이 펜릴의 손등을 때리자 금속음이 울리면서 펜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서로 허리를 숙인 채로 시선을 마주하게 된 그리드와 펜릴 모두 땀과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둘의 차이는,

“그리드는! 쿠륵! 내가 인정한 위대한 전사! 내가 지킨다! 쿠륵!”

“쥬드가! 지킨! 다!”

“그리드!”

동료의 여부.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는 그리드를 기다리는 것은 테루찬과 쥬드의 등이었고,

푸우욱-!

그리드와 거의 동시에 몸을 바로 세운 펜릴을 기다리는 것은 테루찬과 쥬드의 검이었다.

“쿨럭....!”

그리드 이상의 괴력을 자랑하는 테루찬의 검격이 펜릴의 왼쪽 어깨를 날려버린다.

서걱!

그리드에게는 아직 못 미치는 용력을 간신히 끌어올린 쥬드의 일격이 펜릴의 허리를 베며 지나갔다.

쓰러지는 폼 그대로 다리를 올려 찬 펜릴의 반격이 두 사람의 안면을 정확히 가격하는 듯했으나,

콰쾅!!

놀의 혈마법이 두 사람을 지켜주었다.

찰나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한 그리드가 문득 이질감에 휩싸였다.

‘저놈은 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그리드는 여태껏 많은 직계들과 싸워왔다.

이야루그트의 주인이었던 엘핀스톤을 제외하면 직계들 대부분이 검술이나 체술 등의 기교를 부리기보다 혈마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실제로 펜릴 또한 메르세데스, 피아로, 아스모펠 3인의 협공을 받았을 때 마법으로 위기를 넘겼었다.

한데 더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놈은 끝까지 마법을 쓰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다....

판단한 그리드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위험....!”

언젠가 보았던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킬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은익을 활짝 펼친 메르세데스가 방패를 세우며 전면에 나섰다.

그녀 혼자서 그리드, 테루찬, 쥬드, 그리고 놀을 보호하는 형국이었다.

동시에.

콰득!

펜릴의 몸 곳곳에 새겨진 상처들로부터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콰드드드득!!

매미가 허물을 뚫고 나오듯, 펜릴의 육신이 반으로 크게 갈라지면서 그 안으로부터 새로운 육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수를 뒤집어 쓴 것처럼 번들거리는 펜릴의 새로운 육신은 막 빚어지고 칠해진 자기처럼 매끄럽고 깨끗했다.

“뭣....”

상식에 반하는 탈각(脫殼)에 당황하는 그리드 일행.

그들의 시야가 공통 된 이질감을 포착했다.

빛의 정령과 홀리 웨폰이 깃든 그리드의 검이 내뿜는 조명이 펜릴의 새로운 육신을 빛나게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펜릴의 가슴 중앙 부근만 조명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완전한 어둠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그 형태가 마치 응축된 불꽃같았다.

턱!

메르세데스의 손이 그리드를 밀친다.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메아리쳤다.

“모두 산개하세요!”

쿠와아아아아아앙-!!

불꽃처럼 일렁이던 어둠이 폭발을 일으켰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그것의 정체는 꺼지지 않는 불꽃.

바로 브라함이 사용했던 마법이다.

지배의 권능의 응용이었다.

펜릴은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꺼지지 않는 불꽃을 역으로 지배해버린 것이다. 그 탓에 마법을 사용할 정신적 여력이 없었고 브라함도 모르는 비장의 수단인 탈각(脫殼)을 대가로 바치긴 했지만 가치는 충분했다.

바위 위로 떨어진 폭포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기 시작한 저 불꽃의 파편들이 곧 침입자들의 몸에 닿는 순간 그들을 모조리 불살라 없앨 테니까.

“안 돼!!”

사색이 된 그리드가 몸을 날렸다.

촤르륵-!

갓 핸드가 펼쳐지며 쏟아지는 불꽃의 파편들을 막아낸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노에와 랜디가 무엄할지다와 회(回)를 전개하여 최대한 많은 기사들과 템빨단원들을 지켰다.

딱딱! 딱딱딱!

메르세데스를 뿌리치고 그리드를 뒤쫓던 쥬드와 테루찬은 땅속에서 기어 올라온 템빨골들에게 발목을 붙잡혀 자빠졌고,

“티라멧! 이거 놔라!!”

다짜고짜 나타나 자신을 감싸 안는 옛 형제 때문에 그리드를 놓친 놀이 발악하는 그때.

“회(回)!”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루비와 섹시여고생의 곁으로 도착한 그리드가 그들을 감싸 안으며 검무를 펼쳤다.

“오빠....”

장대비가 쏟아졌던 어느 날.

내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비에 홀딱 젖었던 오빠의 옛 모습을 떠올린 루비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꽃의 열기를 느끼며, 그리드는 그저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켰으면 됐다.

단지 그뿐이다.

고통에 대비한 그리드가 이를 악 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머리 위로. 아니, 모든 템빨단원들과 기사들의 머리 위로 마력의 장막이 돔처럼 펼쳐졌기에.

브라함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나보다 약한 주제에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브라함....!”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불꽃의 파편은 폭발로 인해 발생한 것.

궤도를 예측하기 힘들다.

위에서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

장막 아래로 비집고 들어와 브라함의 발치에 떨어지는 불꽃의 파편을 목도한 그리드가 소리쳤지만 브라함은 꼼짝도 않고 제자리에 섰다.

그를 지키는 건, 이미 아까부터 논밭으로 변한 대지로부터 피어난 수십 종류 농작물의 잎사귀였다.

비단 브라함뿐만 아니라 템빨단원들의 발치에도 무럭무럭 피어난 농작물들이 불꽃의 파편을 맞아주고 있었다.

템빨단원들과 기사들을 보호하고자 스스로를 희생했던 노에, 랜디, 템빨골, 그리고 티라멧 또한 거대한 고구마 잎사귀가 끌어안고 보호해주는 중이었다.

“피아로....!”

콰앙-!

그리드가 감격하는 그때 폭음이 들려왔다.

싱클레드의 살기투법과 아스모펠의 화검이 기껏 새로운 육신으로 재탄생한 펜릴의 몸에 상처를 아로새기고 있었다.

대악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펜릴을 단 둘이서 잠시나마 압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드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가를.

“그리드,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이유는 없다.”

쩌적-! 쩌저저저적!!

브라함의 마법이 그리드의 발밑을 얼리고 있었다.

쿠웅, 쿠웅.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방을 뒤흔드는 강력한 기척이 얼음 너머로부터 느껴졌다.

“가라.”

꽈자자자자작!!

브라함의 신호와 함께 지면이 갈라졌다.

마력의 얼음으로 조각된 드래곤의 대가리가 그리드를 태운 채 솟구쳤다.

포효하는 용 위에서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모습이 장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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