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6화
‘개는?’
꼬치구이를 던질 타이밍을 놓친 그리드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방이 너무 어두운 탓일까.
브라함이 말했던 개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개가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거라더니 왜 이렇게 잠잠하지?’
개가 없다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함은 펜릴의 개가 늘 펜릴의 방을 지킨다고 했으니까.
그리드는 브라함의 정보를 100퍼센트 신뢰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이템 아끼려다가 대계를 실패할 수는 없는 법.
잠시 망설이던 그리드가 일단 저 멀리 꼬치구이를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없어요.”
메르세데스가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신비하게 빛나고 있었다.
“브라함 공께서 말씀하셨던 개는 이곳에 없어요.”
“...!?”
메르세데스는 혜안의 소유자.
아무리 짙은 어둠일지라도 그녀의 눈앞에선 무의미하다.
반면 브라함의 정보는 수백 년 전의 것.
메르세데스의 혜안과 브라함의 케케묵은 정보 둘 중 하나를 신뢰해야한다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옳다.
‘다른 곳에서 대기하다가 습격할 계획인가?’
처음부터 예측 못한 변수를 맞이한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시선을 돌렸다.
브라함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메르세데스의 외침을 듣자마자 마력 탐지를 펼쳤던 그는 이곳 어디에도 개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상태였다.
“영혼의 동반자니 뭐니 지껄여 대더니, 정작 위기가 다가오자 버려버린 거냐?”
“나는 하치카를 버리지 않았다. 하치카는.... 죽었다.”
“....!”
그리드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브라함이 경계할 정도로 대단했던 개가 죽었다는 것이다.
레이드 성공확률이 대폭 상승했다는 뜻.
환호하며 기뻐해야할 일이었다.
한데 브라함은 도리어 낭패라는 반응을 보였다. 쯧, 혀를 차더니 펜릴과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왜지?’
그리드 일행이 의문을 느낄 때였다.
“아!”
놀이 탄성을 흘렸다. 뭔가를 눈치 챈 반응이었다.
그리드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놀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펜릴의 개에게 브라함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배의 가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배의 가호?”
“어머니께 지배의 권능을 물려받은 펜릴의 타고난 능력 중 가장 탁월한 힘이지. 적의 스킬과 마법을 지배해서 무력화시키는 힘. 그건 원래 펜릴을 수호해야할 힘인데, 이제 보니 하치카의 안전을 기원했던 펜릴이 하치카에게 대여해줬던 것 같군.”
“하치카가 죽은 이상 그 힘이 다시 펜릴에게 넘어갔다는 뜻이야?”
“응, 그래야만 브라함의 저런 반응을 납득할 수 있다.”
“....펜릴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게 됐다고?”
그리드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펜릴이 키우던 개의 죽음이 도리어 독으로 작용하게 생겼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세상엔 트롤이 참 많군.’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방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무구들을 쳐다보았다.
주인 잃은 아이템들.
얼마 전에 도시 입구를 지키던 죄수들을 해친 놈들이 있다더니 필시 그놈들의 물건일 것이다.
‘설마 놈들이 개를 레이드한 건가?’
아예 가능성 없는 추측은 아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
다른 랭커들 또한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제드노스가 놀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브라함 님의 마법으로도 지배의 가호를 뚫지 못하는 겁니까?”
“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술식의 문제로 뚫지 못할 거다. 가호 이상의 복잡한 술식을 지닌 마법, 즉 최소 고위 마법은 써야 가호를 뚫고 피해를 입힐 텐데 너도 알다시피 고위 마법은 캐스팅에 제약이 있다.”
“브라함 님의 고위 마법 캐스팅 시간은 평균 10초 내외....”
플레이어의 고위 마법 캐스팅 시간은 짧으면 20초, 길면 1분 이상도 걸린다.
반면 10초는 엄청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뱀파이어 후작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육체능력부터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펜릴은 브라함이 고위 마법을 캐스팅할 시간 자체를 안 줄 것이다.
온전한 상태의 브라함이라면 펜릴의 맹공을 피하고, 막아내면서 마법의 캐스팅을 완료했겠지만 크게 약해진 지금은 어렵다.
“결국 우리의 역할이 중요해요. 텔레포트를 써서 펜릴의 공격을 회피하는 동시에 고위 마법까지 사용할 마나가 지금의 브라함 공껜 없으니까요.”
서열싸움에서 브라함의 상태를 관찰했던 메르세데스의 의견이었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우리가 브라함을 지킨다.”
“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절대로 죽지 마.”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기사들.
그들이 펜릴을 크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쥬드는 다짜고짜 돌진하려고 했지만 그리드에게 목덜미를 붙잡혀서 제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잘 부탁한다.
그리드가 템빨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넷씩, 다섯씩 짝 지어 기사들의 곁에 선 템빨단원들은 언제라도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끔 집중 중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기사들을 보좌하는 것이다.
“힘내세요!”
성녀 루비의 광역 마법이 전개됐다.
그녀는 펜릴과 단지 조우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상태이상에 걸려있는 템빨단원들과 그리드의 기사들에게 정화를 걸어주었다.
낯익은 빛 무리가 번져나가자 펜릴이 조소했다.
“저급한 종족답군.”
펜릴이 침입자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여러 인간들의 도전을 받아온 그는 레베카교인들과도 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레베카교의 사제들이 사용하는 정화는 펜릴의 ‘이로운 효과 반전’을 없애지 못하고 도리어 악화를 부여해왔다.
근데 또 이제 와서 정화부터 사용하고 보는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수많은 실패의 원인을 여전히 분석하지 못한 채 부나방마냥 덤벼오는 놈들이 펜릴은 가소로웠다.
학습 능력조차 없는 저급한 종족이 몇 번이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꼴이 웃겼다.
하지만 그의 조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정화의 빛이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었던 저주를 해소한 까닭이었다.
“....!?”
내내 여유롭던 펜릴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루비에게 꽂혔다.
“설마 교황인가?”
“아, 아니요.”
잔뜩 긴장한 루비가 말까지 더듬으며 부정했다.
대악마 레이드마다 활약해온 그녀라지만 여전히 보스 몬스터는 무서웠다.
특히 피까지 시리게 만드는 펜릴의 차가운 시선은 여태껏 그녀가 만나온 대악마들의 시선보다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이건 레베카의 신성력이 아니군.”
허공에 떠다니는 정화의 빛 조각을 잡아 가루로 만든 펜릴이 이마를 좁혔다.
성녀.
루비의 정체를 간파한 그가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첫 번째 표적은 당연히 루비였다.
쩌엉-!
인간의 두개골을 산산조각 냈어야할 펜릴의 권이 무엇인가에 가로막히며 금속음이 발생했다.
두 개의 단단한 방패가 펜릴의 주먹에 굳건히 맞서고 있었다.
펜릴의 시선이 방패 너머로 향했다.
울컥, 피를 토하는 어린 인간과 그녀를 부축해주는 백발의 인간이 보였다.
백발 인간은 펜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빛을 마주쳐왔다.
펜릴은 이 상황이 여러모로 의아했다.
“브라함, 네가 일족에서 추방된 원한을 갚고자 부단히도 노력해왔나 보구나. 인간치고 제법 쓸만한 녀석을 둘씩이나 구해오다니 말이야.”
“둘?”
브라함이 이죽거렸다.
그의 양손에 새카만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화염 마법의 극의.
대상에게 한 번 달라붙으면 대상을 반드시 재로 만드는 불꽃이었다.
화염술사 랭킹 1위답게 마법의 정체를 알아본 라엘라가 경악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
콰르르르르륵!
검은 불꽃의 기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표적이 된다고 판단한 펜릴이 브라함의 마법 캐스팅을 멈추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의 방패가 그의 진로를 제한했고 이어지는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협공이 그를 고립시켰다.
‘고작 둘이 아니었군.’
펜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타고난 힘에 의존해왔을 뿐인 그는 ‘기술’이라는 것을 연마한 끝에 전설이 되거나 그에 준하는 실력을 쌓은 인간들의 솜씨에 조금 위협을 느꼈다.
공방을 교환한 끝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그가 자신과 달리 멀쩡한 인간들을 불쾌하게 쳐다봤다.
‘육체능력은 내가 월등하지만 실력에서 밀리는군.’
자존심 상하지만 인정해야한다.
콰르륵!
펜릴이 혈마법을 전개했다. 메르세데스, 피아로, 아스모펠 3인의 협공에 굳이 체술로 맞서지 않고 뿌리치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큭!”
전조도 없이 나타난 피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아스모펠이 팔에 큰 상처를 입었다.
방패로 방어한 메르세데스와 낫으로 마법을 베어버린 피아로는 무사했지만 그들이 잠시 발을 묶인 사이에 펜릴은 화살처럼 몸을 날려서 브라함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못 지나간다!”
오크 로드 테루찬과 파멸의 기사 싱클레드, 그리고 수십 명의 템빨단원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여서 펜릴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들이 퍼붓는 스킬과 마법 대부분이 지배의 가호를 뚫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
일순 세상이 고요해졌다.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스킬과 마법들의 사이를 돌파하는 펜릴과 지상의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는 찰나 정적이 도래했다.
단지 찰나에 불과했다.
“....큭!”
펜릴의 신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얼음가시처럼 유형화된 살기가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싱클레드의 살기투법이었다.
반쪽짜리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SS등급 판정을 받는 싱클레드의 살기투법은 지배의 가호마저 꿰뚫는 저력을 발휘했다.
지배의 가호가 완전한 기술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궁극기를 써라!”
제드노스가 외치자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궁극기를 전개했다.
대부분의 궁극기가 지배의 가호에 가로막혀서 무력화되는 반면 일부 궁극기는 지배의 가호를 꿰뚫고 펜릴에게 연속되는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마침 브라함의 마법이 완성됐다.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펜릴이 지배의 가호의 진짜 능력을 선보였다.
짐승의 지능으로는 소화하지 못했던 힘.
그것은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능력이었다.
“....!”
브라함과 기사들, 그리고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손에서 무기를 놓쳤다.
그들의 무기가 펜릴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사용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무기가 올려주는 온갖 능력치를 잃은 브라함의 마법과 템빨단원들의 스킬이 크게 기세를 잃고 약화됐다.
재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이런...! 몸이 말을 안 들어!”
비교적 레벨이 낮은 템빨단원 몇 명은 존재 자체가 펜릴의 지배하에 놓였다.
펜릴의 꼭두각시가 된 그들의 역할은 단 하나, 고기방패였다.
스르륵.
브라함이 쏘아올린 검은 불꽃을 피해 허공에서 내려온 펜릴이 꼭두각시들의 뒤로 몸을 숨겼다.
꼭두각시들의 틈새로 흑발의 인간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 주제에 넘실거리는 마기를 발출하는 녀석은 검은 불꽃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실력이 있다고 파악한 펜릴이 지배의 권능을 발휘했다.
[뱀파이어 후작 ‘펜릴’의 권능이 당신을 통제합니다.]
[보유 중인 모든 무기의 사용 조건이 ‘펜릴’로 변경됩니다.]
[파그마의 후예 직업 효과로 <+4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의 착용을 유지합니다.]
“....!?”
펜릴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배의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흑발 인간 놈이 손에서 무기를 놓치지 않았으니 당황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한 인간이 크게 허리를 비트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다.’
그리드의 올곧은 시선이 꼭두각시가 된 동료들을 똑바로 마주본다.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십만대군....!”
“오빠!”
[파티원 ‘루비’가 당신의 무기에 <홀리 웨폰>을 사용합니다.]
[파티원 ‘루비’가 당신의 무기에 <홀리 임팩트>를 사용합니다.]
“학살검!!”
서걱-!
단 한 번의 참격이 비열한 흡혈귀의 의도를 절단한다.
꼭두각시로 전락한 동료들의 몸을 베면서 강화 된 일격이 펜릴의 가슴을 베었고, 이어 그 위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작렬했다.
“끅....! 크아아아악!!”
충분하다고 믿었던 방비를 파훼시키고 날아든 공격이 펜릴에게 큰 고통과 경악,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었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휩싸인 그가 포효하며 그리드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직 그리드의 차례는 끝나지 않았다.
[<신장(神將)>의 효과로 <십만대군 학살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초기화된 스킬을 3초 내에 재사용할 경우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츠카카카칵-!
그리드의 검이 다시 한 번 반월을 그리자 펜릴의 손이 절단되며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쳤다.
수백 년 만에 겪는 위기 속에서 펜릴은 깨달았다.
‘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