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5화
노말 클래스 전직자 중에서 직업 랭킹 1위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인물은 양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중 한 명이 제드노스다.
마법이라는 학문에 독보적인 이해력을 갖추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그와 견줄만한 플레이어 마법사는 거의 없었다.
제드노스를 롤 모델로 지목하는 마법사 랭커가 비일비재할 정도다.
‘저자는 정말.... 상상 이상이다.’
제드노스는 템빨단의 다른 상위 멤버들처럼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기를 꿈꿨다.
뭔가 단서를 잡고 싶은 마음에 마법과 마법사의 역사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공부해왔다.
그의 식견으로 봤을 때 브라함의 마법 실력은 알려진 것 이상.
가히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학센의 극점 마법과 제시카의 메아리 마법을 합쳐서 발전시킨 것이 브라함의 강화 마법이라는 해석이 많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학센의 극점 마법은 마나의 소모를 극대화시켜서 마법의 위력을 크게 증폭시키는 것이고 제시카의 메아리 마법은 같은 마법을 여러 개 중첩 발현해서 마법의 위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마법의 위력 상승이라는 맥락은 같지만 여러모로 달랐다.
극점 마법은 1의 위력을 지닌 마법을 5의 위력으로 만드는 것이고 메아리 마법은 1의 위력을 지닌 마법을 5개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니 상황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위력과 기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두 마법 모두 명확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극점 마법은 워낙 많은 마나를 한꺼번에 소모하기 때문에 술자를 탈진 상태에 이르게 만들었다. 특히 고위 마법을 전개할 경우 술자의 의지와 달리 진원진기까지 끌어 쓰는 경우가 있어 술자 스스로 자멸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적과 자신을 동시에 일격필살시키는 자폭 마법인 셈이다.
극점 마법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히 사장 된 이유다.
한편 메아리 마법은 놀라운 안정성을 자랑했다. 같은 마법 다섯 개를 동시에 완성시켜 전개하더라도 마나소모량은 두 개의 마법을 쓰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단점은 중위, 고위 마법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메아리 마법은 기초, 하급 단계로 분류되는 총 67종류의 마법에만 적용되는 미완성의 공부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므로 제시카가 전전대 전설의 대마법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지만.
‘반면 브라함의 강화 마법은....’
1의 위력을 지닌 마법을 10의 위력으로 발휘하되 마나의 소모는 감당 가능한 수준에 그친다. 위력을 높이겠답시고 같은 마법을 여러 개 중첩 전개하지도 않았다.
메아리 마법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극점 마법에 근간을 뒀다고 주장하기에는 위력과 안전성에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마법이다. 기존의 마법 상식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야. 혹시 브라함은 혈마법을 응용한 건가?’
혈마법의 위력은 타고난 피의 농도로 결정된다고 들었다.
브라함식 강화 마법은 마나 외에도 ‘강한 피’라는 매개가 있어야 실현 가능한 공부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야만 브라함의 제자들이 강화 마법을 습득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됐다.
‘만약 이 가설이 틀리다면 브라함이 그냥 압도적인 천재라는 뜻이고....’
화륵!
화르르르르륵!!
제드노스가 생각해보는 동안에도 브라함의 진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 선 그는 펜릴의 방으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굳이 도시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관에서 튀어나오는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화르륵!!
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브라함의 화염은 무척 깔끔했다.
아군은 해치지 않고 오로지 뱀파이어만을 재로 만든 뒤 즉각 소멸해버렸으니 그 어떤 부작용도 없다.
주작의 불꽃처럼 아군에게 치유효과를 부여하는 등의 기적은 일으키지 못했지만 제드노스는 브라함의 화염을 주작의 불꽃과 동격 즉, 신의 권능처럼 인식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브라함의 화염은 상황에 따라서 지형마저 불태웠기 때문이다.
브라함은 화염이 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을 실시간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저쯤 되면 마법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소위 말하는 대마법사들조차 술식에 얽매여 마법을 그저 소환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 브라함은 같은 마법이라도 필요에 따라서 형태를 바꿔버렸다.
‘그냥 사기 캐릭터야....’
제드노스는 확신했다.
브라함식 강화 마법은 혈마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타고난 피에 의존해야하는 미완의 개념이 아니라 순전히 지식으로 창조된 완전한 공식이다.
‘브라함은 세계관 최고의 마법 천재가 확실....?’
오싹!
강화 마법의 실체를 파악하고 브라함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닫는 제드노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브라함마저도 질투하는 재능을 지녔었다는 무무드가 떠오른 까닭이다.
당장 브라함의 모습만 봐도 천외천인데 그보다 뛰어난 재능이라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거 언젠가는 유페미나가 최강이 되는 건가?’
유페미나는 무무드의 마법을 계승 중이다.
아그너스에게 붙잡혀 있는 무무드의 리치에게 해방을 안겨주는 순간 완전한 무무드식 마법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었다.
그때쯤 되면 유페미나가 새로운 지존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던 제드노스가 문득 그리드를 쳐다보았다.
그리드는 어느새 수천 마리의 뱀파이어를 학살 중인 브라함을 하품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닌 만큼 브라함의 위대함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해서 별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
제드노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어둠을 꿰뚫고 날아온 수백 마리의 박쥐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더니 그리드를 습격하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하필 그리드의 후위에서 나타난지라 위험해 보였다.
한데.
슬쩍.
그리드는 진혈족 뱀파이어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해버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뻗더니 진혈족 뱀파이어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
그러자.
“....!”
뺨이 붉게 상기된 진혈족 뱀파이어가 힘에 밀려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바로 곁에 브라함이 서있었다.
“토스~”
그리드가 가볍게 외쳤고,
콰콰콰쾅!!
브라함이 걷는 길을 따라서 펼쳐졌던 화염이 진혈족 뱀파이어의 몸을 뱀처럼 기어 올라가더니 곧바로 응집해 폭발했다.
“....!”
뜨악한 제드노스가 그리드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진혈족 뱀파이어는 그리드에게도 조금 긴장감을 심어주던 적수 아니었던가?
물론 22위 대악마 레이드에서 활약하고 오크 로드 테루찬마저 꺾은 최근의 그리드와 몇 년 전 그리드를 비교한다는 건 실례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혈족 뱀파이어가 저렇게 손쉬운 상대였는지 의문이다.
혈왕 후보라는 칭호가 진혈족 뱀파이어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지녔다고 듣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조금 전의 수준 차이는 너무 컸다.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보는 듯했다.
“.....”
“.....”
비단 제드노스 뿐만 아니라 다른 템빨단원들 또한 그리드를 귀신 보듯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오크 로드 테루찬과 겨룬 후 고작 한두 달 사이에 비반이라는 기연을 만나고, 용단을 흡수하고, 세 번째 서사시를 쓰고, 브라함 세트를 제작해 올 스탯이 75씩이나 상승한 그리드는 역대급 급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아직 그리드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드는 빠르게 강해져 있었다.
테루찬과 싸웠을 때보다 훨씬 더.
그 급격한 발전에 놀라지 않으면 상식이 없는 거다.
“왜들 그래? 뭔 일 있어?”
분위기가 이상하자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그는 진혈족 뱀파이어와 일반 뱀파이어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수준까지 성장해있었으므로 길드원들의 경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드노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존이 바뀔 일은 없지.’
***
브라함은 고작 반나절 만에 406레벨을 달성했다.
펜릴의 도시를 구석구석 순회하며 모든 뱀파이어와 사역마를 학살한 결과다.
진혈족 뱀파이어는 직계의 피조물이고 일반 뱀파이어는 진혈족 뱀파이어로부터 파생한 쓰레기에 불과하므로 같은 혈족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브라함의 살육에는 정말이지 거침이 없었다.
베리아체로부터 ‘자애’의 성격을 물려받은 놀이 그 처참한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준비해라.”
드디어 펜릴의 방문 앞에 도착한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방문을 열자마자 꼬치구이를 여기서 최대한 먼 곳으로 집어던져라. 개가 튀어나와서 그걸 쫓아가는 순간 우리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펜릴을 고립시키는 거다.”
“네.”
그리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천 마리의 뱀파이어를 손쉽게 학살한 브라함이 이토록 경계하게 만드는 펜릴의 존재감이 그를 긴장시켰다.
심지어 피아로조차도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셋까지 외친 뒤에 열겠다.”
방문 위에 손을 얹은 브라함이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드는 품에서 꼬치구이를 꺼냈다.
“셋!”
“....!”
하나부터 안 세고?
다짜고짜 셋부터 외친 브라함이 방문을 열어젖히자 당황한 그리드가 꼬치구이를 저 멀리 집어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피가 차갑게 식습니다.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며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그리드와 템빨단원 전원의 시야에 이와 같은 알림창이 떠오르더니,
콰르르르르르르륵!!
광대한 혈류의 파도가 방 안에서부터 밀려나왔다.
그 탓에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어야할 브라함이 즉각 광역 실드를 전개,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을 보호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콱!!
혈류의 파도가 실드와 충돌하자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곳곳에서 비명이 난무했고 브라함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우같은 놈.... 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 거대한 도시는 펜릴의 뱃속이나 다름이 없다.
펜릴이 침입자의 존재를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브라함은 그리드 덕분에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 된 펜릴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펜릴이 등장해 ‘지배’의 권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전에 놈의 부하들을 서둘러 몰살시킨 것도 있다.
하지만 펜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브라함은 펜릴의 의도를 눈치 챘다.
방에서 대기하며 지배의 권능을 늑대에게 최대한 축적시킨 후, 침입자가 방문을 여는 순간 기습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임을 예측했다.
브라함이 일부러 큰 목소리로 셋을 셀 거라고 외친 뒤 곧장 기습적으로 문을 열었던 이유다.
브라함은 펜릴의 기습에 당해주기는커녕 도리어 기습을 날려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펜릴이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문을 열자마자 선공을 날린 까닭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쿠르르르르르르....
해일처럼 휘몰아치며 브라함의 광역 실드와 몇 번이나 힘을 겨루던 혈류의 파도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자 끈적거리는 피로 물든 방의 내부가 그리드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짙은 어둠 속에 외롭게 서있는 인영이 보였다.
워낙 어둡고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명확히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자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뱀파이어 후작 펜릴과 마주하였습니다.]
[짙은 사기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일부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뱀파이어의 시선은 하등한 종족을 굴종시킵니다. 의지를 상실하며 신체의 자유를 빼앗깁니다.]
[펜릴이 당신의 정신을 지배합니다. 모든 종류의 이로운 효과가 해롭게 반전됩니다.]
“이게 무슨....”
일부 템빨단원들이 처음 겪는 일에 당황했다. 손을 움직이려고 하면 발이 앞으로 나가고, 고개를 돌리려고 하면 골반이 틀어지는 신체의 부자유가 그들을 괴롭혔다.
펜릴의 낮은 목소리가 웅장하게 메아리쳤다.
“브라함 네놈은 여전히 치졸하구나. 예전에 나를 습격했을 때는 셋까지 센 뒤 문을 열겠다고 외친 다음 둘까지만 세고 기습하더니 이번에는 하나조차 제대로 안 세는가.”
“....!”
귀를 의심한 그리드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브라함에게 향했다.
브라함의 표정은 당당했다.
“치졸한 게 아니라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