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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26화 (1,016/1,794)

템빨 54권 - 4화

“멀쩡한 상태에서 놈과 만났어도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당했을 거야.”

처참한 죽음, 대량의 경험치와 아이템 손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플레이어라면 응당 감수해야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태양의 귀검을 빼앗기고 호구 취급당한 것은 큰 충격이다.

“더군다나 놈은 몬스터 주제에 플레이어의 의도를 파악하고 훼방을 놓았어. 이게 말이 돼? 그놈은 역대 최악의 괴물이야. 게임이 망하는 그날까지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고!”

아스카의 새로운 술버릇이었다. 앵무새마냥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술잔을 비우는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던 블랙테디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20년 넘게 지켜보았습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지금까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온 아가씨를 볼 때마다 늠름한 야생마를 떠올리곤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아가씨의 모습은 병든 망아지나 다름이 없군요.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의 나약한 모습에 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테디....”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아가씨. 늘 그랬듯이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아가씨 죽인 새끼들 다 죽이셔야죠! 어울리지 않는 좌절감은 담배 연기 한 번으로 털어버리고 복수심을 불태우셔야지요!! 병든 망아지가 되느니 차라리 미친 개....가 아니라 야생마가 되시란 말입니다!!”

“하지만 테디. 이 세상엔 내가 제낄 수도, 보낼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괴물들이 너무 많은 걸. 난 야생마처럼 행동했던 망아지에 불과했던 거야.”

“아, 아가씨...! 흑흑!!”

“....저 미친 인간들은 오늘도 또 지랄이네.”

“혹시 영화 찍는 건가?”

하야칸 주점.

이곳은 사하란 제국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다. 작은 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7층짜리 누각이 무려 여섯 채나 밀집해 있는, 궁전처럼 크고 화려한 술집이었다.

그렇다.

현실이 아닌 Satisfy라는 뜻이다.

플레이어가 술에 취해서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건 불가능했다.

아스카와 블랙테디는 술이 아니라 분위기에 취해있을 뿐이다.

남들이 봤을 땐 미친 인간들로밖에 안 보였다.

“근데 쟤들 누구냐?”

“몰라. 다른 패거리처럼 골로 가기 싫으면 관심 꺼.”

아스카와 블랙테디는 하이랭커답게 운신에 제약이 많았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지금도 얼굴과 이름을 가렸을 정도다.

하지만 로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액세서리가 굉장한 고가임을 티내고 있었고, 그 상태로 매일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여러 무리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동네에서 좀 논다는 PK범들이 두 사람을 습격하곤 했다.

물론 결과는 아스카와 블랙테디의 손쉬운 승리.

이후 누구도 저 시끄러운 듀오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저기 아가씨.”

“응?”

“차라리 그자에게 연락해서 태양의 귀검의 정보를 전달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다간 우리가 사냥터에 불법 침입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하는데?”

“어차피 보스는 못 잡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사냥터를 망친 것도 아니니 태양의 귀검의 정보만으로 용서해주지 않을까요?”

“사냥터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죽였잖아.”

“그자가 NPC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도 일개 병사들에게까지 신경 쓸지 모르겠군요. 애초에 병사들을 죽인 건 저희가 아니라 크레파스고....”

“됐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어.”

아스카는 펜릴의 죽음을 원했다.

펜릴이 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퀘스트 보상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양의 귀검까지 안배로 남겨뒀던 것이다.

하지만 존폐의 위기 앞에선 그 어떤 보상도, 복수도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아스카는 일명 베라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 NPC 죽였다고 기자회견 열고 무한 척살령까지 내린 작자야.’

아스카의 성격 역시 보통은 아니다.

재벌 3세답게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판단이나 행동을 서슴없이 보이곤 했다.

몬스터에게 복수하겠답시고 레전드리 아이템을 후발주자에게 양도할 발상을 떠올린 것부터가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그리드를 종잡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 접근했다가 누구처럼 겜생 말아먹느니 평생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뭐.... 믿어보는 수밖에.’

펜릴의 늑대를 사냥하고 얻은 보상들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칭호 <호구>를 지그시 응시하며, 마지막 남은 술병을 비운 아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놀고 사냥하러 가자.”

“넵.”

1시간 동안의 취객 놀이로 스트레스는 적당히 풀렸다.

기왕이면 현실에서 진짜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하고 싶었지만, 술에 취했다간 게임 접속에 지장이 생기므로 참아야한다.

아스카는 프로였다.

다른 하이랭커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강해질 것이다.

***

“여긴 여전하네.”

펜릴의 도시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면면을 확인한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색한 몸짓으로 경례하는 이들은 템빨국의 정식 병력이 아니라 죄수들이다.

레이단의 전 영주 크리스의 아이디어였다.

언제 적이 습격해올지 모를 사막 한가운데서 보초를 서는 일 자체가 징벌이라며, 크리스는 뱀파이어의 도시를 지키는 병력을 군대가 아닌 감옥에서 차출했다.

형량을 3배 이상 감면해준다고 하면 지원자가 속출했고, 그들 중에는 적절한 실력자도 많아 사막의 보초로 써먹기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제드노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소중한 병사들을 소모품 취급할 순 없으니까요. 죄수들 입장에선 가혹할지언정 희망이고.... 그래서 크리스 님이 세운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드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행과 함께 도시에 입장하는 그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도시의 주인, 뱀파이어 후작 펜릴이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펜릴은 당신을 혈왕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의 피가 차갑게 식습니다.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며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혈왕 후보.

일반 뱀파이어에게 위압감을, 진혈족 뱀파이어에게는 혼란을, 직계 뱀파이어에게 경계심을 심어주는 칭호이다.

시스템은 혈왕을 ‘모든 직계의 왕’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실제로 티라멧은 그리드에게 순순히 복종을 맹세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굉장히 좋아 보이는 칭호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다.

직계 뱀파이어가 그리드를 마주하게 되면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나태의 저주에서 해방 된 마리로즈와 펜릴의 강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므로 그리드는 칭호에 발목을 붙잡힌 심정이었다.

“근데 왜 제가 혈왕 후보죠?”

그리드가 혈왕 후보에 등극한 이유는 직계 뱀파이어들과 싸워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뱀파이어의 편이 아니며, 심지어 인간이었다.

한데 왜 혈왕 후보에 올랐단 말인가?

오래 전부터 품어온 의문을 꺼내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설명해주었다.

“아직 마리로즈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께서는 하나의 술법을 설계하셨다. 다른 직계보다 강하게 태어난 펜릴에게 혈왕의 자격을 주고 펜릴이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때마다 피를 강화시켜 종국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와 동격에 이르는 힘을 갖게끔 만드는 술법이었지. 그게 바로 혈왕 프로젝트다. 어머니의 최종 목표는 강해진 펜릴과 함께 협력해서 저주를 풀고 야탄과 바알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왜 굳이 그런 수고를....? 처음부터 펜릴을 강하게 낳았으면 됐잖아요?”

“마리로즈를 낳은 어머니께서 어떻게 되셨지?”

“....!”

베리아체는 마리로즈를 낳은 대가로 죽었다.

자신만큼 강한 아이를 낳은 행위가 그녀의 생명을 빼앗고 말았다.

굳이 번거롭게 혈왕 프로젝트를 만든 이유다.

“그래, 본래 어머니께선 머나먼 타지에서 쓸쓸히 죽어갈 생각 따위 추호도 없으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펜릴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나태의 저주를 핑계로 다른 형제들과 경쟁하지 않고 관속에 틀어박혔지. 보다 못한 내가 도전했다가 녀석을 이기기까지 했다.”

“.....”

“펜릴 그 무능한 놈이 어머니께서 공들여 만드신 혈왕 프로젝트를 무용지물로 만든 셈이다.”

“....?”

아니, 펜릴도 펜릴인데 당신도 잘못했잖아.

펜릴한테 왜 이긴 건데?

당신이 이기지 않고 봐주기만 했어도....

‘....트롤링은 타고난 건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브라함을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여전히 럭스의 모습으로 분해있는 브라함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실패작 펜릴 탓에 혈왕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좌절하신 어머니께서는 결국 마리로즈를 낳게 되셨다. 자신이 직접 복수하는 걸 포기하고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를 탄생시켜 복수를 맡긴 거지.”

“정말로 슬픈 사연이군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그리드는 차마 브라함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고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근데 지금 얘기랑 제가 혈왕 후보가 된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혈왕 시스템에 변화를 주신 것 같다. 본래 펜릴에게 줬던 혈왕의 자격을 박탈하고 ‘직계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적용되게끔.”

“....!”

“실패작 펜릴을 대신해서 다른 누군가가 혈왕이 되고 마리로즈와 협력하길 바라셨던 거겠지. 어머니의 마지막 안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안배는 우리 형제가 아닌 너라는 변수에게 적용된 거고.”

“.....”

뭐 이런 황당한 일이.

진실을 알게 되고 잠시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혹시 오늘 펜릴을 토벌하면 제가 혈왕이 되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혈왕이 됐다고 해서 제가 대신 뱀파이어 일족의 복수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전개가 기다리는 건 아니겠죠?”

그리드는 뱀파이어가 아니다.

뱀파이어의 복수를 해야 할 의무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뱀파이어의 복수 대상이 지나가는 슬라임이라면 또 모를까, 무려 제1위 대악마 바알과 악신 야탄이다.

신, 드래곤 같은 절대적인 존재와는 척지지 않겠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다짐해온 그리드가 불안에 떨자 한동안 잠자코 있던 브라함이 피식 웃어보였다.

“당연하다. 일족의 복수는 우리의 몫이지 인간인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야.”

“다행이군요. 근데 왜 시선을 피하세요?”

“내가 언제?”

그때였다.

“인간의 피 냄새!”

“만찬! 만찬이다앗! 유호호홋!”

침입자의 냄새를 맡은 뱀파이어들이 관을 뚫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싸우면 안 되는 그리드가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물러서자 템빨단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펜릴의 도시에 서식하는 뱀파이어는 일반 등급이라도 레벨이 무려 400을 넘겼지만 템빨단원들은 어떻게든 승산을 엿봤다.

“되도록 우리의 힘만으로 싸워서 이겨야 된다! 펜릴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기사들의 체력을 소모시켜선 안 돼!”

“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선두에 선 제드노스가 소리치며 대단위 마법의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는 개떼처럼 몰려오는 수백 마리의 뱀파이어들의 기세를 늦추고 아군에게 유리한 전황을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법이 발현하기도 전에 뱀파이어들이 모조리 불타 죽어버렸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버프 물약을 복용하던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브라함에게 향했다.

헬가오의 지옥불을 연상시키는 불의 바다를 펼쳐놓은 브라함이 흡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맛있군.”

[당신의 기사 ‘브라함’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의 기사 ‘브라함’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피아로를 비롯한 그리드의 기사들과 템빨단원 전원 할 말을 잃었다.

불과 며칠 전과 비교해도 몇 배나 강해진 브라함의 모습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땐 노템이었고 지금은 템빨.”

브라함이 정정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그땐 봐준 거고 지금은 덜 봐준 거다.”

실제로 브라함은 빈손이었다. 아직 벨리알의 지팡이도 꺼내지 않았다.

템빨단원들은 시간을 2초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버프 물약 괜히 마셨잖아.’

적막 속에서.

저벅.

누군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쥬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백 마리의 뱀파이어와 건축물들이 즐비해있던 평야에 올라 선 그가 쭈그려 앉더니 뭔가를 열심히 챙기기 시작했다.

“템. 주워. 그리드. 님께.”

“쥬드....”

그리드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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