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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25화 (1,015/1,794)

템빨 54권 - 3화

긴 꿈을 꾸었다.

늘 그랬듯이 악몽이다.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날 수가 없다.

의식의 침잠이 의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영혼에 각인 된 나태의 저주가 지독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

지옥에서 쫓겨난 시조 베리아체 탓에 영구한 저주를 대물림 당한 펜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증오했다.

다른 혈족들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원망해왔다.

당신은 내게 고통을 주고자 나를 낳은 것인가....

당신의 무력함과 무책임함을 혐오한다....

“.....”

악몽을 영사하던 의식이 바깥으로 끄집어졌다.

거역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있던 눈꺼풀이 떠지며 어둠의 윤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기가 도는 관 속.

일말의 빛조차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그곳에서 눈을 뜬 펜릴이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길고 끔찍한 악몽을 꿨다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콰앙!

착각이길.

바라며, 관을 박차고 일어난 펜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볼품없이 가녀린 몸을 지닌 인간 여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서있었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펜릴의 분신과도 같은 늑대가 혀를 내민 채 죽어가고 있었다.

“네놈.... 인간이여.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자식에게 저주와 복수를 떠넘긴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형제들.

그 한심한 작자들과 달리 내게 애정을 주고, 오직 나만을 사랑해줬던 짐승이 죽어가는 모습에 펜릴은 분노했다.

차가운 분노였다.

한기가 피어오르자 인간 여성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짐승에게 두 팔이 물려 뜯기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그녀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막말로 걸레짝이다.

하지만 불쾌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보다시피. 잠자는 주인을 지키려고 애썼던 애완견 한 마리를 사냥했어.”

콰작!!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던 짐승의 정수리가 도끼에 잘려나갔다.

죽기 전, 펜릴을 바라보는 짐승의 시선은 애틋하게 반짝였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주인을 원망하기는커녕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애정을 보내왔다.

꽈드득....!

펜릴이 이를 갈았다. 뾰족한 송곳니를 아랫니와 마찰시켜 부러뜨린 그가 그것을 씹어 삼켰다.

“더러운 피는 필요 없다. 네놈의 살과 뼈를 자근자근 씹어 먹어주마.”

***

등장과 동시에 크레파스를 반으로 쪼개버렸던 늑대는 대단히 강하고 흉포했다.

하지만 아스카 일행이 펜릴의 관으로 접근할 때마다 관을 지키려는 습성을 보였다. 당장 자신의 등짝에 도검이 꽂혀도 관의 수호에 집착했으니 명백한 약점이었다.

덕분에 아스카 파티는 공략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늑대의 충성심이 아스카 일행에게 큰 행운으로 작용한 셈이다.

물론 늑대는 행운만으로 사냥할 수준의 보스가 아니었다.

아스카 파티는 큰 희생까지 감수했다.

처음부터 ‘업적’을 노리고 출구 없는 던전에 도전한 파티답게 그들은 아낌없는 투자를 감행했다.

첫째, 목숨을 걸었다.

둘째, 명성 상점에서 평생 5회만 구매할 수 있는 <달콤한 사탕>을 전원 복용했다.

셋째, 각종 히든 퀘스트에서 얻었던 소모품들을 아낌없이 불살랐다.

수십 억 플레이어의 정점 수십 명이 모든 역량을 쥐어짜낸 것이다.

관에 발이 묶인 늑대는 점차 수세에 몰리는 수밖에 없었다.

온갖 물약과 스킬로 강화 된 랭커들의 무기가 늑대의 가죽을 꿰뚫었고, 드비리온의 가호가 깃든 무기와 도구들로 무장한 광전사 아스카의 공격력은 늑대의 근육과 뼈마저 갈랐다.

장장 수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허억.... 허억....”

홀로 살아남은 아스카는 드디어 늑대를 발밑에 두는데 성공했다.

크릉. 크르릉....

관을 지키면서도 하이랭커 35명을 찢어발기고 뱃속에 집어삼킨 역대 최강의 짐승은, 죽어가는 와중에서야 살기를 거두고 낑낑 울었다.

녀석의 애타는 시선은 펜릴이 잠들어 있는 관을 향할 뿐이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주인을 걱정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다.

“.....”

아스카는 광전사.

싸울 때마다 피를 뒤집어쓰고 광소를 터뜨렸으며, 광기 스택이 쌓일수록 침을 질질 흘리거나 눈깔을 뒤집기도 했지만 그녀가 진짜로 미친 건 아니다.

말 못하는 짐승의 감정을 읽고 동정할 정도의 교감능력은 그녀에게도 있었다.

“쯧....”

씁쓸한 마음으로 혀를 찬 아스카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짐승이나 짐승형 몬스터에게 대량의 추가 데미지를 입히는, 사냥의 신 드비리온의 가호가 깃든 도끼였다.

그리고 펜릴이 잠에서 깨어났다.

콰앙-!

두껍고 무거운 관 뚜껑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며 천장까지 솟구친다.

“네놈.... 인간이여.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대악마와 동격이라는 뱀파이어 후작의 분노가 공포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미 진즉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아스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보다시피. 잠자는 주인을 지키려고 애썼던 애완견 한 마리를 사냥했어.”

이건 너를 향한 비난이자 조롱이다.

강화 된 저주의 효과에 침식당해 제때 눈 뜨지 못한 너의 무능이 너의 충성스러운 짐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콰작!!

도끼가 늑대에게 안식을 선사했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관에서 나온 펜릴은 한 걸음, 두 걸음 아스카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린 걸음이었다.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공포를 맛보며 가슴 깊이 후회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괴물은 괴물이구나.’

여러 상태이상이 동반된다.

만약 펜릴이 제때 깨어났다면, 아스카 파티는 늑대를 사냥하기는커녕 늑대에게 제대로 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철컥.

인벤토리를 연 아스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끼를 집어넣고 두 자루의 검을 꺼냈다.

한 자루의 검은 칼집에 꽂힌 상태 그대로다.

칼집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너라면 이 괴물을 잡을 수 있겠지.’

이번 전투에 참가했던 하이랭커 36인이 다시 뭉쳐 펜릴 레이드에 도전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스카 파티는 펜릴도 아닌 그의 관을 지키는 늑대 한 마리에게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 부었고 너무 큰 절망을 맛봤으니까.

아스카가 장담하건데, 오늘 이후 펜릴의 도시를 습격해 펜릴의 방까지 도달할 파티는 그리드와 템빨단이 유일했다.

그리고 아스카는 그리드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저 빌어먹을 흡혈귀를 그리드가 더 잔혹한 방법으로 해치워줄 거라고 믿었다.

쨍그랑!

아스카가 칼집에 꽂힌 검을 방문 너머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시체가 된 상태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파티원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늑대 잡고 얻은 칭호들 많잖아? 우리는 그걸로 만족하자고.”

콰작-!

산 채로 집어삼켜지는 죽음.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죽음이 아스카를 덮쳤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였다.

“최후의 만찬.... 잘 즐겨라?”

“큭큭.”

“....!”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유언을 남기던 아스카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가 다음 도전자를 위해 던져두었던 태양의 귀검이 펜릴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익....

태양의 귀검을 거머쥐는 펜릴의 손에 지독한 화상이 생겼다.

하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그는 태양의 귀검을 집어던져 높디높은 천장 중앙에 꽂아버렸다.

하필 샹들리에 뒤편인지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 자체만으로 봉인이었다.

초네임드급 몬스터의 인공지능을 얕본 대가로, 아스카는 플레이어 최초로 몬스터에게 아이템을 강탈당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칭호, <호구>를 얻었습니다.]

“XX....!”

꽈작!

아스카의 욕설이 단말마가 되어서 흩어졌다.

***

[<브라함의 로브>의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에 성공하여 당신의 재단 기술이 <고급 재단 기술> 레벨 3으로 급격히 성장합니다.]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5 영구적으로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좋았어!!’

그리드 파워의 원천 중 하나가 바로 스탯빨이다.

하지만 대장장이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한 이후부터는 스탯의 성장 속도가 더뎌진 상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장장이 기술에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재단 기술은 경우가 달랐다.

재단사 세계에서 그리드는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새싹이었기 때문에 제작 아이템의 등급에 따른 스탯 상승효과를 고스란히 적용 받았다.

그리드가 브라함의 선물을 받고 크게 기뻐했던 이유다.

브라함 세트 중 모자, 로브, 장갑은 재단 기술로 제작이 가능했으니 당분간 그리드의 스탯은 당분간 빠르게 성장할 예정이었다.

최소 5개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동안은 올 스탯 25 성장치가 유지될 것이다.

‘앞으로 재단 기술 노가다는 브라함 세트 제작으로 충당해야겠다.’

문제는 재료다.

브라함 세트 제작에 필요한 천은 레파르도고치로 짠 실로 만든 천이었는데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가우스 왕국의 변방 작은 마을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이라 수량 자체가 적었고, 템빨국과 가우스 왕국은 적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수출규제가 적용돼 있었다.

‘슬슬 싸울 시기긴 하지.’

역사적으로 템빨국은 가우스 왕국에게 너무 많은 침략과 적대행위를 당했다.

하물며 영토를 확장해야하는 템빨국 입장에선 인접해있는 가우스 왕국과의 전쟁을 피해선 안 됐다.

제국과의 확고한 동맹 이후 라우엘이 오히려 군비를 확충한 이유는 가우스 왕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흠.”

옆에선 브라함이 로브를 입어보고 있었다.

양쪽 어깨에 은실 자수가 놓인 하늘색 로브.

굉장히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상답게 눈에 띈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로는 소화가 불가능한 디자인이었다.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는 현재의 브라함과는 아예 안 어울릴 지경.

하지만 브라함은 신경 쓰지 않았다.

“허접한데....”

그다지 섬세하지 못한 자수에 실망을 표출할 뿐, 마법 부여로 로브의 기능을 강화한 그는 몇 차례 성능을 시험해보더니 이쯤 되면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계속 똑같은 옷을 만들어서 점점 더 괜찮은 옷을 입혀드릴 테니까 당장은 아쉬워도 참아줘요.”

재단 기술이 고급 마스터 레벨을 달성하면 대장 기술과 재단 기술을 결합해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만드는 브라함 세트가 진짜 브라함 세트가 될 것이다.

벌써 몇 년째 완료 못하고 있는 전직 퀘스트를 상기한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드디어 부츠만 남았군.”

“그러게요.”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

평범한 얼굴에 잘도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를 치장한 브라함과 멀찌감치 떨어진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패션 테러범과 일행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솔직히 쪽팔렸다.

그리드는 패션 테러범 시절의 자신과 하루나마 데이트해줬던 아영이가 의외로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지 다시 한 번 고찰해봐야 했다.

“아, 근데.”

드디어 대장간에 도착한 그리드가 문득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그 꼬치구이 말인데요. 미식룡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염룡도 좋아하는 겁니까? 뇌물로 통할 정도로?”

“미식룡이 즐기는 음식은 다른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진미로 통하는 법이다.”

“호오....”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나중에 혹 재수 없게 드래곤과 마주치더라도 꼬치구이를 뇌물로 바치면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하다.

이쯤 되니 펜릴이 키운다는 개한테 던져줘야 할 꼬치구이가 아까울 지경이다.

‘새로운 명성 획득처도 확보했겠다, 나중에 또 뽑기를 돌려서 새로운 꼬치구이를 얻는 수밖에.’

계획을 세운 그리드가 브라함의 부츠 제작에 돌입했다.

그리고 정확히 3일 뒤.

그리드 일행은 펜릴의 도시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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