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 2화
라인하르트, 엘리자베스의 공방.
그리드와 엘리자베스는 각자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이제 간신히 익숙해져가고 있는 재봉술로 브라함의 로브를 제작 중이었고, 엘리자베스는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브라함의 귀걸이를 세공했다.
레전드리 등급의 도안을 흔쾌히 넘겨준 그리드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조차도 브라함을 만족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애송이들. 손가락이 썩어 뭉개진 좀비들도 너희보단 실력이 좋겠다.”
“히잉....”
세공하는 내내 곁에 앉아 훈수를 두고 비방하는 브라함 탓에 엘리자베스는 거의 울상이었다.
포식이불족발의 조카이자 최고의 세공사 장인답게 공주처럼 모셔져온 그녀는 이런 취급에 내성이 없었다.
이대로는 작업에 진전이 없겠다 싶었던 그리드가 브라함의 흥미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펜릴이 대악마만큼 강하다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과 제가 힘을 합치고 피아로와 기사들이 함께한다면 희생 없이 토벌에 성공할 수 있겠죠?”
서열 정리 이후.
브라함은 그리드의 기사들이 지닌 저력에 크게 감탄한 눈치였다.
필시 긍정적으로 평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브라함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희생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펜릴이 당최 얼마나 강하기에....”
“그놈보다는 그놈이 키우는 개가 문제야.”
“개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육체능력만큼은 펜릴 이상으로 뛰어나지. 더군다나 마법이 아예 통하질 않고 우리 혈족과 달리 뚜렷한 약점이 없어. 결국 너희만으로 개를 사냥해야하고 그 동안 나 혼자서 펜릴의 발을 묶어놔야 하는데....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마법이 아예 통하질 않는다고요? 그럼 옛날에 당신은 펜릴하고 싸워서 어떻게 이긴 겁니까?”
“개한테 지옥 마견의 뒷다리 살을 100일 동안 숙성한 후 비법 소스를 발라 구운 꼬치구이를 던져줘서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빌어먹을, 그때 그 꼬치구이를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염룡에게 좀 더 쉽게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식이다.
***
하이랭커란 1,000위권의 랭커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수십 억 플레이어 중에서 1,000위에 드는 일은 손에 꼽히는 재능, 혹은 재력이나 운빨을 필요로 했으므로 대중들에게 여러 의미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평가란 늘 상대적인 법이다.
정작 랭커들은 하이랭커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100위.
100위권 실력자야말로 비로소 하이랭커의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36명의 랭커들이 전원 100위권 랭커인 이유다.
이만한 전력이 하나의 파티로 구성된 사건은 역사상 최초라고 봐도 무방했다.
템빨단이나 발할라조차도 100위권 랭커를 수십 명씩 거느리진 못했으니까.
심지어 이들 중에는 ‘힐러’가 있었다.
Satisfy에서 가장 보기 힘든 직종 말이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습니까? 포박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나요?”
빛.
그는 아이디 그대로 빛나는 사내였다.
오랜 시간 몽크 랭킹 1위로 군림했던 메드를 재치고 랭킹 1위를 차지한 거물로, 현재는 통합랭킹 21위까지 성장한 실력자였다. 수려한 용모와 매너플레이로 많은 팬을 거느리기도 했다.
펜릴의 도시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해친 일을 못내 걸려하는 그를 다른 일행들이 타일렀다.
“죽이는 게 맞았다고 봅니다. 이 위는 사막 한복판이에요. 손발을 묶인 상태로 방치됐다간 도리어 더 끔찍한 죽음을 당했을 거라고요.”
“쇠사슬로 꽁꽁 묶어놓는다고 해서 병사들이 그걸 풀지 못할 거라는 보장이 있나? 순찰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잖아. 굳이 목격자를 살려뒀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어디에 있지?”
아직 보스가 생존해있는 뱀파이어의 도시는 다소 특이한 양식을 지닌다.
앞서 입장한 파티가 전멸하거나 보스를 레이드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도시에 출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통합랭킹 39위 크레파스가 템빨국 병사들을 살해한 이유였다.
목격자만 없애면 펜릴 레이드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지난 수 년 동안 펜릴의 도시를 침입해온 ‘자살 특공대’들의 정체를 템빨국은 쉽게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흡혈 아이템이나 엘릭서 좀 먹어보자고 목숨 바쳤던 수백 명의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0명도 채 안 됐다.
“말들이 너무 많네. 여기에 친구 사귀러 왔대?”
일행의 후미에서 이동하던 아스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템빨단의 독주 속에서도 10등대 랭킹을 꾸준히 유지해온 그녀는 전원 100위권 하이랭커로 구성 된 파티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22위 대악마 베리드가 출몰했을 당시.
아스카와 휴렌트, 그리고 지발과 크라우젤 등의 미국을 대표하는 랭커들이 서로 협력해서 미국인 플레이어들을 통솔하기만 했어도 베리드 레이드에 성공했을 거라는 여론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아스카는 베리드 레이드에 참전하는 게 불가능했다.
광기.
광전사가 가장 우선시해야하는 파라미터.
그것을 상승시킬 수 있는 히든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레이드에 참전했어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아스카는 알고 있기도 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처리하는 건 그리드나 크라우젤의 역할이지.’
사실 펜릴도 마찬가지다.
펜릴 또한 베리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강력한 보스라는 사실을, 아스카는 여러 문헌과 증언을 토대로 확인했다.
하지만 펜릴에겐 대악마와 달리 명확한 약점이 있었다.
태양과 수면욕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약점을 공략할 수단은 충분히 갖췄다.
뻐뻥-! 뻐뻐뻥!!
주위에서 수박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아스카의 집사이자 53위 랭커인 블랙테디와 다른 일행들이 몰려오는 흡혈귀들을 살육하면서 발생하는 효과음이었다.
아직 초입에 불과해서인지 죄다 일반 뱀파이어였다. 펜릴의 도시에 서식하는 놈들답게 400이 넘을 정도로 높은 레벨을 자랑했지만 랭커들의 상대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오우, 흡혈 반지.”
누군가가 신나서 휘파람을 불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95위 랭커 킬데스가 투명한 적색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있었다.
“와 씨. 들어오자마자 흡반을 먹네....”
“운이 참 좋으시네요?”
질투와 시기에 찬 음성들조차 지금의 킬데스에겐 환호처럼 들렸다.
“....!?”
싱글벙글 웃던 킬데스가 흠칫 놀랐다.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날린 그의 가슴 위로 붉은 빛줄기가 스쳐지나갔다.
혈마법이었다.
진혈족 이상의 뱀파이어들이 구사하는 마법.
“큭....!”
가슴에 화상을 입은 킬데스가 급히 물약을 복용하려했지만, 짙은 어둠을 꿰뚫고 날아든 수백 마리의 박쥐가 그를 덮치며 방해했다.
하지만 어쌔신 랭킹 2위인 킬데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속하게 물러나며 단도를 휘둘러서 박쥐들을 떨쳐냈다.
그 과정에서 박쥐 떼가 아름다운 여성의 형상을 갖췄고, 동시에 손을 뻗어 킬데스의 목덜미를 거머쥐었지만 그건 사실 킬데스의 모습을 꼭 닮은 자폭인형이었다.
어쌔신 랭킹 1위 페이커가 속도로 상대방을 농락하는 반면 킬데스는 온갖 도구로 상대방을 농락하는 전투를 구사했다.
꽈아앙-!!
“....!”
폭발에 휩쓸린 진혈족 뱀파이어가 휘청거렸다.
그 사이 다른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해치운 랭커들이 킬데스와 함께 그녀를 둘러쌌다.
“후훗. 가소로워.”
진혈족 뱀파이어는 여유가 넘쳤다.
특유의 흡혈 능력으로 빠르게 상처를 회복하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박쥐 중 단 한 마리라도 인간의 피를 섭취하면 그녀의 몸에 있던 상처가 사라졌다.
“오랜만에 포식하겠구나.”
진혈족 뱀파이어가 여태껏 상대해온 인간들은 모두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랐다.
푸욱-!
푸푹! 푹! 푹!!
“끅....! 끄아아아악!!”
인간들의 실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여럿이 힘을 합치자 위대하신 펜릴의 피조물인 자신조차도 상대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특히 서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곰 인형들의 알 수 없는 의식이 박쥐나 연기로 화하는 뱀파이어의 고유 능력을 억제하고 있었다.
본래 혈마법을 난사하는 한편 박쥐로 몸을 분산시키며 전투를 주도했어야할 진혈족 뱀파이어가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수세에 몰렸다.
“네놈들....! 고작 인간 따위가 이러고도 무사할....!”
“조용.”
치를 떨며 외치는 진혈족 뱀파이어의 말을 누군가가 도중에 끊었다.
전투 내내 후미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스카였다.
광전사이되 웨폰 마스터리의 보유자이기도 한 그녀가 인벤토리를 열더니 한 자루의 검을 꺼내 쥐었다.
화르륵....
태양처럼 밝고 뜨거운 빛을 불사르는 장검이었다.
그 빛만으로도 진혈족 뱀파이어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확인한 아스카가 씨익 웃었다.
“역시 이건 진짜네.”
아직 그리드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전.
집사 블랙테디와 함께 그리드와 싸웠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아스카는 그것을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여겨왔다.
남들보다 빨리 주제파악을 하고 힘을 키우는데 열중하는 계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동안 그녀는 남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력에 집착해왔다.
아무리 강해져도 만족하지 않고 정진했다.
재벌 3세라는 지위가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일조해주었으니 재능과 재력, 거기에 집념까지 갖춘 그녀는 랭킹 이상의 강함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레벨 이상의 강함이란 대개 템빨로부터 비롯되는 법이다.
아스카가 다른 랭커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펜릴 레이드에 도전한 계기는 그녀의 45번째 레전드리 컬렉션 <태양의 귀검>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에게 추가 데미지, 뱀파이어의 혈마법 확률적 무효화, 뱀파이어의 재생력과 흡혈능력 무효화, 뱀파이어의 방어력 일정량 무시 등등.
태양의 귀검은 뱀파이어에게 완벽한 카운터를 발휘하는 조건부 최강 무기다.
“여기군.”
구역마다 수백 마리씩 무리 짓고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다섯 마리의 진혈족 뱀파이어를 쓰러뜨린 끝에 굳게 닫힌 방문 앞에 도착한 일행이 상태를 점검했다.
스킬 쿨타임, 자원과 패시브 상태, 아이템 내구도와 물약 보유 현황 등.
일행의 상태는 완벽했다.
“갈까요?”
어느새 아스카는 파티의 리더가 되어있었다.
일행 모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아스카의 명령을 기다렸다.
‘귀찮아.’
눈살을 찌푸린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열어.”
“네!”
“오케이!”
힘차게 대답한 일행이 커다란 방문을 밀어젖혔다.
짙은 어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전해서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이었다.
하지만 아스카와 일행은 하이랭커답게 기감이 발달하여 어둠에 금방 적응했다.
그들은 방의 중앙에 놓여있는 관을 발견했다.
여태껏 봤던 그 어떤 관보다 크고 화려한 관이었다.
필시 저 안에 펜릴이 잠들어있을 것이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블랙테디가 빛에게 눈짓했다.
아스카가 이번 레이드에 참가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는 바로 빛의 능력에 있었다.
한때 레베카교의 사제였으나 어느 토착신의 세례를 받아 몽크로 전향한 사내.
그는 ‘저주’를 입은 대상의 저주를 잠시나마 배 이상 강화시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스카는 저주로 펜릴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끔 만든 후 태양의 귀검으로 재생력을 억제, 일행과 협공하여 도살할 계획이었다.
“성공했습니다!”
굳게 닫힌 관.
정확히는 관속에 잠들어있는 펜릴을 지정해서 마법을 전개한 빛이 환희에 찬 얼굴로 외쳤고,
“좋아.”
레이드 성공을 확신한 일행이 일제히 관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동시에.
덜컹.
높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불 꺼진 샹들리에가 미묘하게 기울여진다 싶더니,
“컥....!”
뭔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 내리며 39위의 랭커 크레파스가 양단당해 죽었다.
“....!”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크릉. 크르르.
신을 잡아먹는 늑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펜릴을 연상케 만드는 거대한 짐승이 펜릴의 관을 지키듯이 서며 일행과 대치했다.
놈이 거친 숨을 토해낼 때마다 아스카의 살결 위로 찌릿찌릿, 소름이 돋아났다.
“....이거 재밌네.”
인벤토리를 연 아스카가 태양의 귀검을 집어넣고 사냥꾼의 활과 덫을 꺼냈다.
템빨왕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템 스왑 속도였다.
“죽을 땐 죽더라도 저 개새끼는 잡고 죽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