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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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4권 - 1화
결계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집에 커튼을 치듯이 외부의 시선을 가리는 용도로 쓰는 단순한 결계가 있는 반면 술자의 심상세계를 형상화해서 구현하는 고차원적인 결계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결계의 공통점은 막대한 마력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피아로는 전율했다.
브라함이 대악마와 드래곤의 고유 마법이라고 알려진 최고위 대단위 마법 <메테오>를 완성함과 동시에 결계까지 펼쳐버렸으니 반신이라도 목도한 심정이었다.
“.....”
사막에 세운 서고인가.
끝없이 펼쳐진 방에 수십만, 수백만 권의 서적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광경은 자연이 빚어낼 수 있는 장관의 한도마저 초과했다.
당대의 전설인 피아로조차도 사막의 바늘처럼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키는 수준이었다.
‘이곳이 브라함 공의 심상....’
과연 지공의 심상세계답다.
저 셀 수 없이 많은 서적들이 그가 여태껏 축적해온 지식을 상징하는 것일 테지.
브라함의 결계에 끌려온 피아로가 감탄을 거듭할 때였다.
철컥.
서고의 귀퉁이가 네모나게 잘려나간다 싶더니 문처럼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브라함이 한 권의 책을 뽑아 쥐며 물었다.
“독서를 좋아하나?”
“솔직히 말해서 별로 즐기진 않소.”
“흐음, 그런가. 그럼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
좋아한다고 대답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의문을 품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보니, 아마도 끔찍한 일을 겪었을 듯하다.
꿀꺽, 마른 침과 함께 의문을 삼킨 피아로가 브라함을 쫓아서 문을 넘었다.
그러자 시야가 뒤집히면서 서고가 사라지고 100평 남짓의 새하얀 방이 나타났다.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나 봤던 정체불명의 도구들이 즐비한 방이었다.
중앙에 설치 된 크고 투명한 유리구슬의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유리구슬을 들여다본 피아로가 흠칫 놀랐다.
새카만 연기에 휩싸인 붉은 돌멩이와 밝게 빛나는 이쑤시개 같은 것이 유리구슬 속에서 충돌하기 직전의 모양새로 멈춘 상태였다.
“바로 시작할까.”
따악.
브라함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유리구슬 속에 멈춰있던 돌멩이와 이쑤시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느껴지는 기세를 통해서 피아로는 그것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하나는 브라함의 메테오였고, 다른 하나는 무상농법의 극의로 형성한 강기의 집약체였다.
어떤 원리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라인하르트의 상공을 장악하고 있던 그 강맹한 기술들이 수천 배나 축소된 상태로 저 정체불명의 유리구슬 속으로 전이된 것이다.
꽈르르릉....
메테오와 강기가 충돌함과 동시에 화산재처럼 새카만 연기가 번져나가며 투명했던 유리구슬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쿠우웅....
절구질에 절반이 날아간 운석이 유리구슬의 바닥으로 추락해 대폭발을 일으켰다. 흉포한 불꽃이 구슬의 천장까지 솟구쳐 올랐다.
무상농법의 극의가 브라함의 메테오를 파쇄하기는커녕 상쇄조차 못했다는 증명이었다.
피아로는 긴 말하지 않았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소.”
애초에 이 결계를 벗어나는 방법조차 모르는 입장이다.
현재 내 실력으로는 결코 브라함을 꺾을 수 없다....
확신하며 고개를 숙이는 피아로의 태도에는 더없이 큰 예절이 담겨있었다.
그가 이처럼 깊이 고개를 숙인 대상은 여태껏 황제와 그리드 외엔 없었다.
그를 잠자코 지켜보던 브라함이 말없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폭발의 여파로 오염됐던 유리구슬이 새것처럼 깨끗해지더니 브라함의 메테오와 피아로의 강기가 다시 한 번 구현됐다.
한데 피아로의 강기가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이 아니라 푸른 기운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에 잠겨있는 듯한 형태였다.
브라함이 말했다.
“자연경의 가장 큰 위력은 기(氣)의 다변성에 있다. 본래 인간의 기란 성질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강도만이 단련되는 법이지만 자연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너는 흡수하는 기운에 따라서 기의 성질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지.”
“저보다 더 잘 아시는구려....”
피아로는 최근에야 얻었던 심득이다.
라플레시아를 심어놓은 땅에서 자연경을 썼을 때 우연히 독의 성질을 흡수하였고, 이를 활용할 수 없을까 고심해본 끝에 강기와 함께 분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새로운 오의 <농약 뿌리기>였다.
한데 브라함은 자연경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어본 것이다.
피아로는 브라함의 오성이 자신의 오성을 아득히 넘어선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축복 수준의 강점이다.”
꾸르르르릉....
유리구슬 속 메테오와 피아로의 강기가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이번엔 놀랍게도 두 개의 기운이 상쇄했다.
피아로의 강기가 메테오에 지지 않고 메테오와 함께 소멸해버렸다.
속성의 상성에 따른 결과였다.
“이럴 수가....”
감탄하는 피아로의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
“피아로!”
“피아로 님!!”
라인하르트 논밭.
피아로가 메테오, 절구와 함께 갑자기 사라지자 걱정하고 있던 템빨단원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피아로의 모습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던 까닭이다.
반면.
콰지직-
피아로의 뒤를 이어 공간을 찢으며 나타난 브라함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확연히 초췌했다.
사람들은 결계 속에서 진행 된 승부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피아로 님께서 이겼다....!’
‘수백 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끊임없이 단련해온 피아로를 이길 순 없었겠지.’
그때였다.
“브라함 공.”
피아로가 브라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인에게 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평생토록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승으로 섬기겠습니다.”
“....!”
피아로.
전 사하란 제국의 기둥이자 현 템빨국의 기둥.
템빨왕 그리드의 최측근이며 군부의 정점인 그가 그리드가 아닌 사람에게 무릎을 꿇다니?
파장은 무척 컸다.
특히 여태껏 피아로가 무릎을 꿇었던 대상은 황제와 그리드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 전 적기사단 출신들은 헛것이라도 본 반응을 보였다.
브라함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됐다. 너 같은 놈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관둬라.”
질투심에 치를 떠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쯧, 혀를 찬 브라함이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가.
벗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열정리는 끝나신 겁니까?”
“그래, 당연히 내가 최강이었다.”
“하하.”
그리드가 내심 예상했던 결과다.
같은 시대의 전설끼리도 큰 격차를 보이는 실정인데, 하물며 전대 전설과 당대 전설의 격차는 더욱 더 큰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브라함은 전대 전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실력자였다.
그를, 그리드는 얻은 것이다.
“다만 첫 번째는 저놈에게 양보하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아니, 저놈 저거 잔다.
코를 골고 누워있는 쥬드를 노려봐준 브라함이 한숨 쉬더니 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지팡이 내놔라.”
“아, 네.”
그리드가 군말 없이 지팡이를 넘겨줬다.
당연히 벨리알의 지팡이였다.
무기도 없이 피아로마저 제압한 브라함의 신위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템빨국 최강의 기사였던 피아로의 패배를 달갑게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의 귓가에 브라함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패배와 실패는 끝이 아니다. 앞으로 네 기사들은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나마 나아질 거다.”
“네, 믿고 있습니다.”
“.....”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리드를 노려본 그가 이내 책 한 권을 건넸다.
수백만 권의 서적이 보관돼 있던 <지식의 방>.
심상세계 따위와는 격이 다른 진짜 이계(異界)인 그곳에서 가져온 책이다.
피아로를 마중하며 뽑아들었던 책이기도 했다.
“이게 뭐.... 헉.”
그리드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브라함의 모자 제작법>
<브라함의 로브 제작법>
<브라함의 장갑 제작법>
<브라함의 부츠 제작법>
<브라함의 반지 제작법>
<브라함의 팔찌 제작법>
<브라함의 귀걸이 제작법>
<브라함의 목걸이 제작법>
브라함이 건네준 책에 담긴 내용들이었다.
이것은 브라함이 직접 집필한, 오직 브라함만을 위한 마도구의 제작법인 셈이다.
심지어 모든 등급이 ‘레전드리’ 확정이었다.
“앞으로 내가 입고 다닐 옷들이다. 기왕이면 네가 직접 만들어주면 좋겠군. 단, 액세서리는 예외다. 대장일 잘하는 것 빼면 오물이나 다름없던 파그마조차도 보석 세공엔 약했으니 너도 마찬가지겠지.”
“알겠습니다. 최고의 옷을 만들어드리죠.”
전설의 대마법사의 부활을 절실히 실감한 그리드가 맹세해보였다.
***
웅성웅성.
라인하르트 논밭 외곽.
여전히 수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이유는 단 하나.
승부의 결과가 궁금해서였다.
전설의 농부와 오크 로드의 대결에서 과연 누가 승리를 거머쥐었을까?
만에 하나라도 오크 로드가 이겼다면 그리드가 피아로보다 강하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여러모로 궁금할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아무래도 헛것을 봤나봐.”
플레이어들이 맑은 창공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조금 전 그들은 죽는 줄 알았다.
메테오.
대악마 벨리알이 선보였던 전설의 마법.
그것이 생뚱맞게 라인하르트 상공에 나타났을 때 누군가가 외쳤었다.
부활한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은 역시 템빨국에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리드가 이미 오래 전부터 브라함과 동화하는 모습을 목격해 왔으니, 이번 브라함의 부활에도 필시 그리드가 연관돼 있다는 게 대중들의 의견이었다.
브라함을 죽였던 범인이 파그마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진 바람에 브라함이 사실은 그리드에게 원한을 품고 접근한 거라는 해석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당장 브라함은 템빨국에 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메테오가 나타났을 때 의견은 확신으로 굳었다.
브라함이 파그마의 후예인 그리드와 템빨국을 통째로 불태우기 위해서 메테오를 사용한 거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발생했고 온갖 방송사들이 그 모습을 촬영했다.
하지만 메테오는 지상에 도달하기 직전에 소멸했다.
세상을 통째로 불태울 것 같았던 열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미 발동한 마법은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체로 환각을 본 거라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환술을 쓸 수 있는 거지?”
“피아로와 테루찬이 싸우고 있으니까 둘 중 한 명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농부하고 오크가 환술을 쓴다는 설정은 좀 아니지 않나?”
“피아로가 보통 농부냐? 전설의 농부야. 테루찬이 보통 오크야? 오크 로드라고.”
“맞아. 그 둘이면 메테오처럼 보이는 환술 좀 쓸 수도 있지.”
“사람들이 단체로 미쳤나....”
술렁술렁!
소란이 더욱 더 커질 무렵이었다.
논밭 전체를 감싸고 있던 스틱세이의 결계가 갑자기 소멸하더니 병사들이 길을 열었다.
피아로와 테루찬의 대결이 끝난 듯했다.
과연 누가 이겼을까?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사람들이 곧 나타날 승자를 기다렸다.
보통 공식적인 대결에선 승자가 선두에 서는 게 규칙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승자를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데 가장 선두에서 나오는 사람은 피아로도, 테루찬도 아니었다.
럭스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이름 색깔도, 생김새도 지극히 평범한.
누가 봐도 행인1처럼 생긴 그런 NPC였다.
잠시 당황하던 사람들이 이내 그를 무시했다.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교통 정리하러 나선, 일종의 안전요원쯤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잠시 후 피아로와 테루찬, 그리고 그리드와 메르세데스 등 쟁쟁한 템빨국 인사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럭스는 선두를 지켰다. 도리어 일행을 선도하듯이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와, 나쁜 놈들.”
“기다린 사람들 성의 좀 봐주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대결의 승자를 은폐함으로써 정보의 유출을 피하는 템빨국의 철두철미함을 욕하면서도 감탄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레이단의 사막.
“가자.”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보초를 서던 템빨국 병사들을 해치운 후 펜릴의 도시에 입장하고 있었다.
의외로 자주 있는 사건이었다.
다른 모든 뱀파이어의 도시는 템빨단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반면 펜릴의 도시만큼은 예외였으니까.
템빨단은 아직 공략 못한 펜릴이 두려워서 이곳을 금지(禁地)로 지정한 후 방치했다.
템빨단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가 흡혈 반지 등의 귀중품을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냥터라는 뜻이니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이곳에 몰려들곤 했다. 죽어도 좋으니까 득템 한 번 해보자는 각오였다.
하지만 이번에 펜릴의 도시에 입장한 일행은 범상치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펜릴 레이드를 노리고 찾아온 하이 랭커 집단이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하이 랭커가 무리 짓고 활동한 경우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