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23화
브라함은 인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는 굳이 인류를 위해서 고민하거나 행동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이룬 업적 상당수가 문명을 발전시켰고 결과적으로 인류에 큰 도움을 주었다.
부활의 주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들이 마법의 대중성을 선도했다거나, 제자들을 효율적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만든 <마법 통신구>가 인류 최대의 발명품 취급을 받는다거나,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서 납치한 실험체들이 사실은 여러 왕국의 난적이었다거나 등등.
‘브라함이 태어난 것 자체가 세계엔 축복이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브라함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세운 업적이 몇 개인지 감히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브라함에게 당신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브라함은 일고의 고민 없이 대답할 것이다.
첫째는 그리드를 만난 것이고, 둘째는 드래곤 레어를 털어버린 거라고.
‘이놈이 벨리알의 환술에도 저항하는 모습을 보긴 했었지만....’
브라함이 쥬드에게 사용한 환술은 염룡 트라우카의 둥지에서 훔쳐온 <아몬의 서>에서 파생한 마법이다.
인계에 강림했을 때 하필 트라우카를 만나 잡아먹혔던 제7위 대악마 아몬은 미래와 과거를 투시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몬의 서는 그중 과거를 투시하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초월종이 아닌 종족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독할 수 없을 책이었지만 도리어 그 부분이 브라함의 탐구욕을 자극해버렸다.
탐독에 눈이 돌아간 브라함은 거의 반쯤 미친 상태로 트라우카의 둥지에 잠입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정말로 운이 좋게도 아몬의 서를 훔쳐오는데 성공했다.
포효하는 트라우카의 숨결에 책의 반절 이상이 불타버렸고, 그 탓에 브라함이 볼 수 있는 과거는 지극히 일부, 그중에서도 ‘대상의 가장 끔찍한 기억’의 편린에 불과했지만 브라함은 이것을 훌륭한 환영 마법으로 승화시켰다.
대상에게 끔찍한 기억을 보여줌으로써 헤어날 수 없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마법이었다.
애초에 7위 대악마로부터 파생한 마법이기에 32위 대악마 벨리알의 환술 따위와는 비할 바 없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해야 정상.
한데 쥬드가 이를 저항하자 브라함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상황을 분석했다.
‘아몬의 권능이 만능이었다면 트라우카에게 잡아먹혔을 일도 없었겠지.’
심지어 브라함이 해독한 아몬의 서는 절반이 불타버린 버전이니 더욱 불완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효력을 의심해야할 정도로 저급한 마법은 아니지만,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이놈은 필요 이상으로 멍청해서 공포심을 모르는 건가.’
돌이켜 보면, 그리드는 도리어 적이 강할수록 쥬드를 부르는 걸 꺼려했었다.
쥬드가 워낙 단순무식해서 몸을 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세포 생물에 가까운 거군.’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결론을 내린 브라함이 텔레포트를 써서 쥬드와의 거리를 벌렸다.
마나를 낭비하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육체가 워낙 저질인지라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쥬드를 뿌리치기 불가능했다.
쥬드가 다른 건 몰라도 육체능력만큼은 상당했으니까.
파지직!
브라함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푸른 전류가 튀어 올랐다.
전격 속성 마법의 기초 특성은 속도가 빠르다는 것.
그리고 브라함식 강화 마법은 마법의 특성을 극대화시킨다.
마나를 아껴야하는 브라함은 하급 마법 <라이트닝 스피어> 하나로 쥬드를 제압할 계획이었다.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공격에 대처하는 방법은 감각적으로나마 익히고 있을 테니 상황을 만들어야겠군.’
전사의 기본 소양은 공격 경로를 예측하는 것이다.
쥬드는 라이트닝 스피어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 것이다.
브라함이 그렇게 유도할 테니까.
“우오오!”
쥬드가 달려온다.
브라함은 일단 기다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고, 쥬드의 우측으로 무성하게 자란 논밭이 펼쳐졌다.
동시에 브라함이 움직였다.
자신의 왼쪽에 은근히 허점을 노출한 상태로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브라함식 강화 라이트닝 스피어가 그야말로 벼락처럼 쏘아지며 쥬드를 덮쳤다.
콰앙!
‘이놈이?’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쥬드가 브라함의 예상과 달리 일직선으로 돌진한 바람에 마법이 빗나간 것이다.
심리전이 도리어 독이 된 경우였다.
‘이놈은 본능조차 없는 건가?’
쯧, 혀를 찬 브라함이 다시 한 번 라이트닝 스피어를 생성해서 이번엔 직선으로 쏘았다.
반전은 없었다.
콰앙!
직진하던 쥬드가 마법에 그대로 적중 당했다.
다만 브라함의 예상과 다른 점은, 쥬드가 일격에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쥬드의 마법 저항력은 한없이 약했으므로, 브라함의 계산대로라면 최소 중상을 입고 감전에 저항하지 못해서 경련하다가 쓰러져야 했는데, 놀랍게도 쥬드의 신형은 무너지지 않았고 운신까지 성공했다.
브라함은 이 비현실적인 현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의지....’
초월자,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만이 얻을 수 있는 심(心)의 깨달음을 통한 능력.
그리드조차도 최근에야 이해한 그것을, 이 자리에서 가장 약한 쥬드가 손에 넣었다.
그리드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알림창이 알려준 덕분이다.
[당신의 기사 ‘쥬드’가 심(心)의 개념을 이해했습니다.]
쿠와아아아악-!
폭풍 같은 예기가 브라함을 덮쳤다.
아직도 브라함과 거리를 좁히지 못한 쥬드는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브라함을 베고자하는 그의 의지가 실체화한 것이었다.
무형지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브라함 또한 심을 깨우치고 있었다.
무형지기를 상쇄할 수 있는 의지가 브라함에겐 있었다.
카르르르륵....
쥬드의 무형지기가 맥없이 소멸했다.
브라함에게 닿지 못하고 허무로 돌아갔다.
“....잘도 이런 놈들을 긁어모았어.”
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콰앙-!
불꽃이 폭발했다.
피를 토한 쥬드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브라함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상 입은 손에는 그리드가 하사한 검이 불끈 쥐어져 있었다.
그의 의지는 무너진 육체와 달리 여전히 굳건했다.
“쥬드.... 첫 번째. 기사....”
“쥬드...!”
그리드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쥬드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브라함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물끄러미 쥬드를 바라보던 그가 칫, 혀를 차더니 말했다.
“네가 그리드의 처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네 자리를 넘볼 생각 따위 없으니 그만 버티고 죽어라.”
“기쁘. 다.”
쿠웅!
쥬드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브라함이 친히 그를 부축해서 루비 곁으로 데려와주었다.
그리드가 헛것을 본 사람마냥 눈을 껌뻑이자 브라함이 퉁명스럽게 콧방귀 뀌었다. 딱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브라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하....”
미소지은 그리드가 굳은살 가득한 쥬드의 손을 꽉 거머쥐었다.
자신의 첫 번째 기사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그는 커다란 감격을 느꼈다.
“감동이네.”
템빨단원들과 기사들 모두 흐뭇한 표정으로 그리드와 쥬드를 지켜봤다.
이 자리에서 그리드와 쥬드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필요하지 않으시오?”
피아로가 브라함에게 푸른 물약을 건네주었다.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제조한 극상의 마나 물약이었다.
‘내가 고작 애송이 한 놈 상대한 거로 이딴 걸 마셔야겠나?’
혹은,
‘이 몸과 감히 정정당당한 싸움을 하겠다고?’
등등.
본래의 브라함이었다면 사늘하게 읊으며 물약을 불태워버렸겠지만.
“....흠.”
의외로 브라함은 순순히 물약을 건네받았다.
그의 성격이 오만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최강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 저열한 오기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약해졌다는 사실과 그리드의 기사들이 강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현 시점의 브라함에게 오만은 사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쿠르르르르르릉-!
물약을 마시고 마나를 제법 회복한 브라함은 메테오의 마법 주문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브라함이라도 대마법 중 하나인 메테오는 반드시 주문을 완성해야 현현시킬 수 있었다.
“헉....!”
심상찮은 기류가 흐르자 놀란 템빨단원들이 하늘을 올려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대기권을 꿰뚫고 날아드는 거대한 운석이 그들의 시야에 목격됐다.
논밭 바깥에 몰려있는 수만 명의 플레이어들도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저게 뭐임?”
“실화냐....”
쿠릉! 쿠르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진다.
세상이 파멸을 맞이하려한다.
점차 지상과 가까워지는 운석의 모습이 온갖 혼란을 야기했다.
“템빨국.... 망하는 겁니까?”
라우엘이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브라함, 장난이죠?”
어색하게 미소지은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브라함은 마법의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피아로를 지긋이 응시한 채로 그의 손에 들린 농기구들과 아직 빈손에 불과한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난 아직 템빨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네놈이 막아봐라.”
도발적으로 말하는 브라함에게 피아로가 당당하게 답했다.
“기필코 막아내고 그 영광을 자손대대로 전하겠소!”
전대 전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들과 겨뤄볼 기회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피아로이다.
피아로에게 있어서 브라함과의 만남은 그리드와의 만남 이후 가장 큰 행운이었고, 실력을 겨뤄볼 수 있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진심전력을 다해서 브라함과 맞서 싸우고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측량해보고 싶었다.
콰앙-!
땅을 박찬 피아로가 몸을 날렸다.
그가 분석한 브라함의 현재 몸 상태는 최악.
브라함에게는 메테오의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텔레포트까지 사용할 정도의 여력이 없다는 게 피아로의 판단이었다.
더블 캐스팅이 가능하다고 해봤자 마나가 없으니 무용지물인 셈.
피아로는 브라함이 방어 마법이나 단일 공격 마법으로 대처할 것을 예상했고, 바로 그 순간 허를 찌르고자 미리 씨앗들을 뿌려 놨다.
적어도 지금의 브라함을 상대로는 자신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사태가 발생했다.
알림과 텔레포트의 연계.
피아로가 덤벼올 타이밍을 미리 정확히 어떻게 예측한 것인지, 브라함은 쥬드와 겨룰 때 써놨던 알람 마법의 도움을 받아 텔레포트를 타고 피아로의 공습을 가뿐히 회피해버렸다.
심지어 브라함의 마나는 실시간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메테오의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마나 드레인을 써서 농작물들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지체하면 필패다!’
감탄한 피아로가 저 멀리 나타난 브라함에게 강기를 날렸다.
방어 마법을 사용하게끔 강제시킴과 동시에 시야를 방해하고 그 틈에 오의를 날려 승부의 우위를 점한다는 작전이었다.
역시나.
콰콰콰쾅!
빠르게 날아오는 강기를 좌시하지 못한 브라함이 방어마법을 펼쳤고 뿌연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그 틈에 바람에 물결치는 벼들 사이로 숨어든 피아로가 자연경을 전개, 흙과 벼의 기운을 흡수하더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속도로 농사를 지었다.
촤르르르르륵!
인간을 난쟁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고구마 줄기가 피아로를 태운 채 용꼬리처럼 자라났다.
순보나 강화 텔레포트처럼 공간 자체를 도약하는 기술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분명히 엄청난 속도였다.
순식간에 브라함의 근처까지 도달한 피아로가 괭이를 크게 휘둘러서 반월을 그렸다.
“추수!”
콰득!
콰드드드드득!!
밭이 파도친다.
고구마줄기들이 일제히 퍼덕대며 흙을 파고나오자 집채처럼 커다란 고구마 수십 개가 주렁주렁 딸려 나오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
압도적인 광경에 놀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할 말을 잃었고,
“감자가 아니라니?”
마검사 블란드가 크게 실망했으며,
“무상농법 오의! 밤고구마 난타!!”
농기구 대신 고구마 줄기를 손에 거머쥔 피아로가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집채만한 고구마들이 브라함의 머리 위로 암석처럼 빗발쳤다.
콰쾅! 콰쾅!! 콰콰콰콰콰쾅!!
“크윽....!”
자연경, 씨뿌리기, 급성장, 추수를 모조리 연계해야 발동 조건이 성립되는 피아로의 새로운 오의.
과연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무시무시한 스킬이었다.
브라함이 소환한 운석이 하늘 전체를 불태우고 있는 반면 피아로가 소환한 고구마. 아니, 밤고구마들은 대지 전체를 박살내고 있었다.
아이템 변신 스킬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복제한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와 함께 루비와 쥬드를 보호했다. 갓 핸드들과 노에, 그리고 랜디는 템빨단원들을 지켜줬다.
‘피아로의 승리다!’
아스모펠은 장담하고 있었다.
전투 내내 피아로를 응원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열기에 놀란 아스모펠과 템빨단원들이 하늘을 올려봤다.
여전히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다.
땅과 충돌하기 거의 직전이었다.
피아로의 새로운 오의조차도 브라함의 마법 캐스팅을 멈추진 못한 것이다.
“큭....!”
어떻게 된 거지?
이처럼 큰 충격 속에서 마법의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혼란에 휩싸인 피아로가 기를 펼쳐 브라함의 기척을 탐색했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빌려도 브라함의 기척을 찾아낼 수 없었다.
브라함이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무상농법 극의!”
일단 저 운석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피아로가 강기를 한 점으로 모아 거대한 절구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스팟-!
갑자기 공간의 일부가 갈라진다 싶더니 피아로를 집어삼켜버렸다.
지상과 충돌하기 직전이던 운석과 그를 뒤쫓아 내려오던 절구 또한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총 삼계로 나뉘어있는 브라함의 결계 중 하나가 작동한 것이다.
브라함이 결계까지 펼치게 만든 인간은 피아로가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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