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22화
“피아로 공과 오크 로드께서 대결하신다고?”
“전설의 농부하고 돼지가 싸운대!”
그리드 일행이 논밭에 자리를 잡는 동안 소문이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고작 몇 분 만에 논밭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평범한 마을 주민, 상인, 병사, 귀족, 그리고 플레이어들에 이르기까지....
논밭에 몰려든 군상 중에는 라우엘도 있었다.
“템빨단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는 입장 못하게 하세요.”
“네!”
코크가 라우엘의 명령을 받들자 주변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코크와 기사들이 직접 병사들을 통솔해서 외부인들을 모두 논밭 바깥으로 쫓아내버렸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외곽을 빙 둘러싸자 템빨단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들은 논밭 안 광경을 엿볼 수 없게 됐다.
“왜 우리는 안 보여주는 건데!”
“우리도 피아로 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우리에게도 구경할 권리가 있다! 템빨단 너희가 이 땅 전세 냈....! 아, 너네 땅이지....”
“피아로 님 힘내세요!!”
논밭 바깥으로 쫓겨난 플레이어들이 소란을 피웠다.
그들 중 상당수가 피아로의 팬이니만큼 실망도 커서 불만이 폭주했지만, 누구 하나 감히 소요를 일으키거나 잠입을 시도하진 않았다.
고작 수천 명의 병력으로 수만 명의 플레이어를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템빨국 기사들의 솜씨에 위축된 것이다.
애초에 템빨국을 상대로 선 넘을 멍청이도 없었고.
“이제 은신을 푸셔도 됩니다.”
스틱세이가 결계를 펼쳐서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하자 라우엘이 허공에 말했다.
스르륵.
인비지블리티 마법으로 투명해져 있던 브라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둘 사이에서 잠자코 관망하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왜 사람들을 쫓아낸 거야? 우리 길드 전력이 노출될까봐?”
“맞습니다.”
“흠....”
그리드가 납득했다.
“잘했네. 돌다리도 더듬거려보고 가라는 말이 있으니까.”
“더듬.... 어감이 좀 별로긴 하지만 뭐 맞습니다.”
피아로와 테루찬 등.
그리드의 기사들은 분명히 강했다.
하지만 무적은 아니다.
스킬과 능력치, 혹은 성격 등으로부터 비롯되는 약점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노출 될 경우 누군가에게 노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굳이 제2의 베라딘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전력을 노출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했다.
그리고 브라함의 정체를 감춘 이유는 괜한 어그로가 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과 여론이 귀찮게 들러붙는 것은 둘째 문제다.
마법왕 골드히트 등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들이 브라함과 엮이려 들 수 있었고, 이 경우 사건사고에 휘말릴 여지가 있었으니 굳이 브라함의 정체를 공표할 이유가 없었다.
“제 생각엔 베리드의 인피면구를 브라함 님께 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인데?”
그리드가 순순히 인피면구를 꺼냈다.
<베리드의 인피면구>
등급:레전드리(초월)
내구력:10/10(수리불가)
베리드가 인간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가면입니다.
거짓과 왜곡이 장기인 베리드의 마력이 깃들었으므로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변장 대상의 얼굴뿐만 아니라 체형, 음성마저 변조시키는 수준으로 단순한 가면의 영역을 넘어선 보구입니다.
인피면구는 굉장히 유용한 아티팩트였다.
그리드가 여황제 바사라의 모습으로 변장했을 때, 그 누구도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려 12시간이나 된다는 점. 하지만 착용 후 해제하지 않으면 문제도 아니다.
다행히 브라함도 흥미를 보였다.
“좋군. 안 그래도 내 얼굴은 여러모로 귀찮으니까.”
“그 얼굴이 왜 귀찮아요?”
“암컷들이 나만 보면 비명을 지르거나 넋을 잃어버린다. 일부 수컷들도 마찬가지고.”
“아, 네네 그러시겠죠. 그것 참 귀찮으시겠군요.”
“비꼬지 마라.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이지를 지닌 종족은 모두 똑같이 반응하기 때문에 나름 심각한 일도 많이 겪어왔다.”
“흠....”
하긴 그럴 것 같긴 하다.
심지어 그리드도 브라함이 귀 뒤로 머리를 넘기는 모습을 보고 두근거렸었다.
‘너무 잘 생긴 것도 안 좋군....’
저렇게 잘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안도한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인피면구를 건네주자 브라함이 그것을 즉시 뒤집어썼다.
그러자 절세의 미남이 길에서 흔히 보이는 마을주민3 정도의 외모로 변해버렸다.
이름은 럭스.
그리드가 브라함의 시중으로 붙여줬던 기사다.
바뀐 체형과 음성에 적응한 브라함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훌륭하군. 고작 22등위라 할지언정 야탄에게 친히 권능을 하사 받은 대악마가 맞다 이건가.”
“어쩐지.... 현실마저 왜곡시키는 거짓이라더니 신의 권능이었던 거군요. 근데 22위 대악마가 그렇게까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인가요? 한 자릿수 대악마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겁니까?”
놀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부분이다.
시조 베리아체가 3위 대악마였던 시절에는 10위 바깥의 대악마들을 홀로 압도했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 오버 파워 아닌가?
사실상 10위대 대악마도 두려워해야하는 그리드 입장에선 너무 까마득한 파워 밸런스였다.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다. 권능에 따른 격차가 크긴 하지만, 육체능력 자체가 10위 이하의 대악마들과 비할 바 없이 강하니 압도적이라 할 수 있지.”
“그럼 혼자서 헬가오를 봉인했다는 뮐러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죠?”
“놈에 대해서는 이미 말해주지 않았더냐. 녀석은 나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최강의 인간이었다.”
“당신보다 강했다는 거죠?”
“닥쳐라.”
“....정확히 얼마나 강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게끔 알려주세요.”
“단순한 녀석일수록 수치화하는 걸 좋아하는군.”
브라함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꽤 흥미로운 주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말했다.
“놈이 봉인한 헬가오가 9등위 대악마였으니 15등위 바깥의 대악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헬가오를 해칠 수 없었을 테고.... 뭐, 베리드 같은 놈은 10마리가 있었어도 뮐러에게 모조리 격살 당했을 거다.”
“....!”
“전투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심지어 난 뮐러의 진짜 실력을 직접 목도해본 경험이 없으므로 녀석의 실력을 정확히 수치화하는 건 어려워. 그저 대충 참고만 삼으면 된다. 그리고 꼭 알아둬야 할 사실은, 뮐러와 싸웠던 헬가오는 ‘인계에 현현한’ 헬가오였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뮐러라도 지옥에서 헬가오를 만났다면 절대로 헬가오를 이기지 못했겠지.”
“인류가 지옥을 침범하는 일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겠군요.”
“그건 발생하지 않을 일이다. 지옥은 황폐한 땅인데 굳이 인류가 넘볼 이유가 없지. 대악마 놈들이 인계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흠....”
그리드는 문득 유라가 떠올랐다.
지금도 홀로 지옥에서 사냥하고 있을 그녀가 새삼 대담하다고 느꼈다.
마침 피아로와 테루찬의 전투 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팔굽혀펴기 500회로 몸을 푼 테루찬이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을 위시하며 외쳤다.
“위대한 전사여! 쿠륵! 나! 테루찬을! 쿠륵! 즐겁게 해다오!!”
“전사가 아니라 농부일세.”
꽈앙!!
피아로의 호미와 테루찬의 실패작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이 발생했다.
피아로가 힘에서 크게 밀렸다.
당연했다.
종의 정점인 테루찬의 성장력은 네임드NPC의 성장력마저 초월하는 수준.
레벨 자체가 테루찬이 피아로를 앞섰다.
능력치 차이를 고려해야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테루찬은 이제 템빨까지 갖춘 상태였다. 최강의 전사를 기리는 실패작은 기본 공격력도 높았지만 테루찬의 공격력을 20퍼센트나 증폭시켜준다.
반면 피아로가 사용 중인 호미는 농사에 초점을 맞춘 농기구였다. 무상농법을 여러 방면으로 강화시켜주긴 하지만 공격력 자체는 상당히 낮았다.
꽈앙! 꽝! 꽈꽝!!
호미 한 자루로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낫까지 꺼내 쥔 피아로가 그것을 호미와 교차시켜서 테루찬의 검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슬그머니 씨앗을 뿌렸다.
콰르르르르륵!!
콩 나무가 급성장했다.
나무 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테루찬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테루찬의 멱살을 붙잡은 피아로가 그대로 테루찬을 땅에 꽂아버렸다.
지켜보는 그리드의 정수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로 임팩트 있는 공격이었지만, 근력보다 체력이 더 높으며 전투가 지속될수록 더 강해지는 테루찬답게 멀쩡하게 벌떡 일어섰다.
보다 격해지는 공방의 기세가 대단했기에 그리드조차도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누가 이길지 모르겠군....’
사실 그리드는 피아로가 쉽게 이길 줄 알았다.
테루찬의 신체능력이 피아로보다 뛰어나다고 해봤자 경험 면에선 피아로가 월등히 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루찬은 신체능력이 높은 대신 보유 스킬 자체가 적은 반면 피아로는 활용 가능한 스킬이 매우 많아서 전투를 주도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심지어 진원진기를 소모하는 <불굴의 전사> 패시브는 대련 모드에선 발생하지 않으니까 테루찬이 많이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예상과 달리 너무 치열했다.
NPC에게 레벨이란 개념은 수치화되는 능력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한 달 사이에 레벨을 3개나 더 올리고 나타난 테루찬은 전보다 기교도 늘어나 있었다.
짐승 같은 감각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랄까.
격랑과도 같은 논밭의 변화에 실시간으로 적응하며 피아로를 강하게 압박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맹수 그 자체였다.
‘내가 저 녀석을 이겼던 일이 꿈만 같을 지경이군....’
물론 그리드가 테루찬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행운의 덕이 컸다.
마침 운 좋게 청룡의 부츠를 제작했고, 마침 운 좋게 뇌신 효과가 발생해준 덕분에 그리드는 테루찬과의 대결에서 상성 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사정이 달랐다.
레벨에 밀려 경험이라는 이점도 무용지물이 된 지금, 그가 테루찬보다 우위에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설마 피아로가 지는 건가?’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아로와 테루찬 모두 소중한 동료인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피아로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언제나 태산처럼 우뚝 서있던 피아로가 쓰러지는 모습을, 그리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강하구나!”
테루찬의 맹공에 묵묵히 저항하던 피아로가 갑자기 웃으며 소리친다 싶더니,
“무상농법 오의.”
‘자연경?’
“농약 뿌리기!”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농부의 성지를 좀먹는 해충을 모조리 박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실로 무시무시하고 치명적인 기술이었다.
“....!”
흠칫 놀란 테루찬이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검막을 펼쳤다.
강기의 입자가 안개처럼 퍼져나가며 논밭을 모조리 장악해버렸는데, 이것을 들이마시는 순간 농약 먹고 죽는 벌레 꼴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었다.
“저 오크는 기술이 너무 적군.”
브라함이 중얼거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