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21화
“저주를 극복해봤자 노력을 안 하면 끝까지 벌레인 거다.”
‘노력.... 젠장!’
놀은 반박하지 못했다.
어머니께 물려받은 힘조차 부정한 저 <마법 관조>가 바로 브라함의 노력이 이룬 결실일 테니까.
단지 타고난 힘에 의존해왔을 뿐인 놀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저주를 핑계로 헛되이 보냈던 지난 시간에 아쉬움을 느꼈다.
“브라함, 이제 그만하세요.”
놀을 계속 조롱하고 비방하는 브라함과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하는 놀.
이대로는 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겠다고 우려한 그리드가 중재에 나서는 순간 놀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분하다는 듯이 뺨을 잔뜩 부풀리고 도끼눈 뜬 녀석이 브라함을 노려보며 외쳤다.
“보여주마. 나도 노력만하면 네놈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마! 그때는 내가 네놈을 벌레취급해주겠다!!”
“흥.”
브라함이 파리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네놈 따위가 뭘 어쩌든 관심 없으니 꺼지라는 태도였다.
놀은 분개했지만 그리드는 보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는 브라함의 입가에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미소를 말이다.
‘형제는 형제구나....’
그리드는 브라함이 혈족을 증오하고 급기야 실험도구로 삼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함께 저주를 극복하고 어머니를 도와야할 혈족들이 매일 잠들어있음에 실망하고, 절망한 끝에 증오하게 됐으리라.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혈족마저 희생시켰으리라.
비록 그것이 잘못 된 선택임을 알지라도, 그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브라함은 혼자가 아니다. 지금의 그에겐 더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드는 문득 큰 위화감을 느꼈다.
과연 펜릴을 사냥하는 게 옳은 일인가 싶었다.
“....저기.”
그리드가 브라함을 불렀다.
그러자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의 표정을 보고 그의 사고가 현재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눈치 챈 것이다.
그리드와 긴 시간 한 몸으로 지내며 성격을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라함이 그리드의 머릿속으로 음성을 구겨 넣었다.
[지금 네가 상상하는 것과 사실은 다르다. 여동생 라티나를 내 손으로 친히 봉했던 사실을 잊은 거냐? 우리에겐 형제간의 애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근데 왜 놀을 보고 웃....”
[쓸만한 장기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을 뿐이다. 복수를 위해선 장기말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
[무엇보다도 펜릴은 반드시 없애야한다. 그래야만 마리로즈의.... 아니, 마리로즈를 죽일 수 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브라함이 그리드로부터 시선을 뗐다.
피아로가 잔뜩 상기 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기색이었다.
브라함이 손을 까닥였다.
“덤벼라.”
피아로에게 있어서 브라함은 전설의 재림, 단지 그 정도 대상에 불과했지만 브라함은 피아로를 각별하게 느끼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온 여파다.
그리드를 위해서 고군분투해온 피아로의 모습을 브라함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리드가 피아로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함께 공유해왔으니 어렴풋한 호감마저 느꼈다.
속내를 모르는 아스모펠이 끼어들었다.
“피아로에게 도전하시기 전에 저와 먼저 겨뤄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도발적인 언사였다.
브라함이 피아로를 아랫사람처럼 대하자 어지간히 불쾌한 눈치다.
“그래, 그럼 너부터 와라.”
브라함이 피식 웃었다.
아스모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니 아스모펠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브라함은 주군의 벗이며 전대의 전설이니만큼 존중해야 마땅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군의 다른 기사들, 특히 템빨국의 대장군인 피아로를 무시하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
참지 못한 아스모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그러자 불꽃 같은 광채가 폭사하더니 원탁을 가르고 날아가 브라함을 덮쳤다.
하지만 그것이 브라함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아스모펠이 서있는 땅이 폭삭 주저앉았다.
“....!”
아스모펠의 신형이 무너지면서 그가 날렸던 광채의 궤도가 비틀어졌다.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는 브라함을 스치지도 못하고 지나가 애꿎은 창문을 부쉈다.
‘마법 주문을 미리 완성해놨던 건가?’
아래층으로 추락하는 몸을 비틀고 허리를 크게 튕긴 아스모펠이 다시 회의실로 솟구쳐 올라왔다.
한데 예상했다는 듯이,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이미 그를 조준하고 있었다.
눈앞에 가득 떠있는 섬광을 목도한 아스모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게끔 움직여야지.”
쯧, 혀를 찬 브라함이 손가락을 퉁기자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아스모펠에게 쇄도했다.
이쯤이야 무시하려던 아스모펠이지만 어깨를 한 방 맞아보더니 사색이 되선 방어에 급급했다.
하지만 방어조차 쉽지 않았다.
발을 딛는 바닥마다 기름이라도 칠한 듯이 미끄러워 운신이 어려웠고,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이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주문을 미리 완성해뒀던 게 아니다....!’
대마법사 아슈르조차도 마법을 사용할 때는 잠시의 캐스팅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브라함은 그 수준조차 뛰어넘어서 캐스팅 없이 마법을 즉시 시전하고 있었다.
네 종류, 다섯 종류, 여섯 종류를 넘어서는 기초 마법들이 거의 동시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게 연계되자 아스모펠은 점차 낭패를 겪었다.
이대로 방어만 하다간 말라죽는다고 판단한 그가 피해를 감수하고 스킬을 전개했다.
“피어....!”
퍼퍼퍼퍼퍼펑-!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자 노출되는 아스모펠의 몸을 매직 미사일이 연달아 강타했고,
“....나라!”
이를 악 문 아스모펠은 스킬의 전개에 성공했다.
스파아아아아앗-
검기로 이루어진, 투명하고 붉은 꽃 봉우리가 멀찍이 선 브라함의 몸을 감싸며 펼쳐졌다.
실전이었다면 동귀어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한 수였다.
‘의지력이 대단하군.’
눈에 이채를 띠운 브라함이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한데.
‘소용없다.’
아스모펠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스킬은 표적에 귀속되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수를 써도 떨쳐낼 수 없다는 뜻이다.
“호오라...?”
빛과 함께 다른 위치에 떨어진 브라함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텔레포트로 이동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꽃 봉우리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감지한 그가 다시 한 번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소용없다는 걸 모르시오!!”
철컥!
소리친 아스모펠이 착검했다.
그것은 신호였다.
브라함의 몸을 감싸고 있는 꽃 봉우리가 만개하며 폭발할 거라는 신호.
순간.
스팟!
“....!”
아스모펠의 바로 코앞에 브라함이 나타났다.
텔레포트로 떨어진 위치가 아스모펠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당황한 아스모펠이 다시 검을 뽑아 베려고 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브라함의 몸을 감싼 꽃 봉우리가 이미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을 뽑을 틈도 없이 폭발에 휩쓸린 아스모펠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콰쾅!
콰콰콰콰콰쾅!!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 강하게 연쇄되며 회의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좌시할만한 위력이 아니었기에 방패를 펼친 메르세데스가 그리드를 보호했고 다른 기사들 역시 각자 방어 스킬을 전개했다.
단 한 명.
아무 생각 없던 쥬드만 고스란히 폭발에 휩쓸려 상처를 입었기에 그리드가 급히 물약을 건네줘야 했다.
“쿨럭, 쿨럭....!”
폭발이 끝난 후.
몇 번이나 피를 토한 아스모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뻥 뚫린 천장 너머 창공에 브라함이 떠올라있었다.
아스모펠이 착검하자 만개한 꽃 봉우리가 폭발한 직후, 다시 한 번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피해를 최소화시킨 그였다.
폭발하기 직전에 텔레포트를 사용했다면 꽃 봉우리도 함께 쫓아왔을 테니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는 선에서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졌습니다.”
아스모펠이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다.
텔레포트를 연속 사용하여 계속 공간을 도약하는 괴물을 세상의 어떤 검사가 이길 수 있겠는가?
자신이 죽었다 살아나도 브라함은 이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한편 브라함은 말이 없었다.
사실 그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초월자나 전설도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상처를 입어본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던 탓이다.
피칠갑한 채 축 늘어진 한쪽 팔.
상처 입은 그 팔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브라함이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도 이런 놈들을 긁어모았군.”
사실 놀만 해도 경천동지를 일으킬 실력자다.
그런 놈이 이 자리에만 무려 4명 이상 있다.
아스모펠, 피아로, 메르세데스, 테루찬을 차례대로 훑어본 브라함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다음 상대는 누구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텔레포트를 연속으로 사용한 대가로 마나가 아슬아슬했다.
브라함식 강화 텔레포트는 보통의 텔레포트와 달리 쿨타임이 없는 대신 마나 소모량이 수십 배나 높았으니까.
전성기였다면 하루 온종일 텔레포트만 써도 마나가 남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
잠시 어색하게 있는 브라함에게 예상치 못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행정관 라빗이었다.
소란에 놀라서 달려온 그가 잿더미로 변한 회의실과 뻥 뚫린 천장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누가....! 어떤 돈 남아도는 분께서 이런 끔찍한 짓을....!!”
“.....”
지옥을 기어 올라온 대악마가 저런 모습이던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범인을 물색하는 라빗의 일그러진 얼굴은 흉살악귀 같았다.
돈과 관련 된 일에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에 아스모펠은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놀조차도 라빗의 시선은 피했다.
다만 템빨국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되는 테루찬, 그리고 생각 없는 쥬드, 기고만장한 브라함 세 사람만 멀뚱멀뚱 라빗을 쳐다봤다.
그중 브라함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라빗이 테루찬과 쥬드에게 소리쳤다.
“조만간 손해배상을 청구할 테니 각오들 하셔야할 겝니다!”
“쥬드. 알았다.”
“나는. 쿠륵. 왜?”
“.....”
일행은 장소를 옮겼다.
피아로와 메르세데스 등, 평소 라인하르트에서 생활하는 기사들은 당연히 대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브라함이 다른 장소를 지목했다.
“저곳이 좋겠군.”
브라함이 지목한 장소는 공교롭게도 외성 바깥의 논밭이었다.
피아로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에 가능한 제안이었고, 피아로는 마다하지 않았다.
“공께서 양보해주시니 감사히 받겠소.”
“흥, 그저 맑은 공기가 쐬고 싶을 뿐이다.”
그때였다.
“쿠륵. 내가 먼저. 싸운다.”
다짜고짜 테루찬이 끼어들었다.
<최강의 전사를 기리는 실패작>을 뽑아 쥔 그가 브라함에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기면. 행정관에게 자수해라. 쿠륵.”
어지간히도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행정관에게 진범을 고자질하지 않았던 이유는 테루찬 나름의 의리였다.
어린 오크들을 위해서 오크 로드가 된 전사답게 마음씨가 고와 동료를 팔아넘기진 못한 것이다.
“애송이가....”
콧방귀 뀐 브라함이 테루찬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겨루도록 하지.”
이번엔 피아로가 끼어들었다.
예로부터 강자와의 싸움을 즐겨왔던 피아로는 사실 이 자리 모두와 겨뤄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맛있는 음식은 아껴먹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브라함과의 싸움을 가장 뒤로 미루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테루찬은 전사답게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브라함에 대한 원한을 그새 잊고 좋다고 콧김을 내뿜었다.
“좋다! 쿠륵!”
쥬드와 테루찬을 번갈아 쳐다본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실 넌 범인(凡人) 중에서는 똑똑한 편이었나?]
“.....”
그리드는 못 들은 척 했다.
앞으로의 규율을 위해서라도 서열 정리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