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17화
“아니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쿠오와아아━
용단을 통해서 섭취한 대량의 마나.
그리드라는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흘러넘치고, 급기야 통째로 부셔버리려고 했던 그 흉포한 기운이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브라함의 영혼에 모조리 빨려 들어가며 소용돌이치는 것이다.
탑의 결사들조차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던 용단을, 브라함은 너무나도 손쉽게 먹어치웠다. 고작 이게 전부냐는 듯이 탐욕스럽게.
완전히 회복된 브라함의 영혼을 재차 느낀 그리드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고작 집이 뭡니까? 성을 지어드리죠. 세상에서 가장 큰 성을.”
[그는, 사랑했던 어느 대장장이의 죽음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인연의 상실자.]
-....기대하지.
[‘그’는, 신뢰했던 어느 대장장이의 비수에 심장을 꿰뚫린 인연의 피해자.]
“저는.”
-나는.
[인연의 상실을 통해서 단련된 그의 강철 같은 영혼이,]
“당신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인연에 배신당해 마모되었던 ‘그’의 영혼을 굳세게 이었다.]
-믿겠다.
[홀로 설 수 없었기에 도움을 갈구해온 그는]
-너만큼은 믿겠다.
[그렇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
...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사시의 세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서사시의 세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의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심(心)의 개념을 이해했습니다.]
[<무형지기> 스킬이 개방됩니다.]
[특수 스탯 <의지>가 개방됩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의지의 발현을 실천하는 계열의 스킬에 대해서 일부 내성이 생깁니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초월하는 방법을 조금 더 잘 알 것 같습니다.]
[<순보> 스킬의 정보가 활성화됩니다.]
[신위 스탯이 1 올랐습니다.]
[서사시의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칭호 <영혼의 동반자>를 얻었습니다.]
<영혼의 동반자>
깊은 유대를 나누는 대상들과 마음을 넘어 영혼까지 교감할 수 있습니다.
유대 시스템 강화.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과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는 깊은 유대를 느낍니다.]
<유대>
현재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대상 목록.
★피아로★
★브라함★
유대 레벨 1.
함께 있을 시 모든 능력치 3퍼센트 상승.
유대 대상의 생명력이 위험 수위에 놓일 경우 감지 가능.
[<전능을 잃은 대마법사의 영혼>이 <브라함의 영혼>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마법 관조> 스킬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브라함의 영혼>이 ‘완전’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
[브라함이 자신의 칭호 <지공(智公)>을 당신에게 완전히 양도합니다. 브라함의 영혼이 당신을 떠날지라도 <지공(智公)>의 효과가 유지됩니다.]
[....!]
“어?”
세 번째 서사시는 그리드에게 무척 각별하게 다가왔다.
인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개념의 가치를 시스템조차 공인했으니 그리드는 깊은 감회를 느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지배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감동과 기쁨이 사늘하게 식어버렸다.
브라함이 내게 지공을 양도한다니?
앞으로 부활하게 될 브라함은 지공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권능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드의 마음을 읽은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걱정하는 꼴이 웃기구나. 지식이란 기억과 경험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물질과는 다르니 타인에게 양도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
“아.... 다행이군요.”
안도하는 그리드.
그는 브라함과 대화하는 내내 메르세데스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성심성의껏 손기술을 발휘했다.
그 탓인지 다소 상기된 메르세데스가 다소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리드가 크게 성장한 것으로 모자라 브라함의 영혼이 완전히 회복 됐음을 알아보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우선 검의 무덤으로 가셔야겠군요.”
검의 무덤.
그곳에 브라함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파그마의 안배로 얼음 속에 갇힌 채, 수백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당장 출발하도록 하자.”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여동생 루비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와줄 수 있어?
-오빠가 부르면 가야지. 근데 왜?
-메르세데스가 다쳤어.
-바로 갈게.
“.....”
화상자국으로 엉망이 된 메르세데스의 두 손을 그리드가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자 메르세데스가 슬그머니 숨겼다.
손에 가득한 굳은살과 상처들은 모두 노력의 증거.
메르세데스의 자부심이었고, 단 한 번도 부끄럽다고 여긴 적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리드에겐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지랄 났군.
브라함이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
거슬리는 느낌표를 띄운 채 멈춰있던 알림창.
조금 더 해석이 필요하다는 듯 한동안 침묵하던 녀석이 드디어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왔다.
[<용단>의 완전 체화를 확인했습니다!]
[기적적인 업적입니다!]
[<용단>의 체화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을 끝까지 견뎌낸 당신의 근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끈기 스탯이 200 상승합니다.]
[의지 스탯이 100 상승합니다.]
[<용단>의 완전 체화로 직업 한계를 초월합니다. 마나핵이 4단계로 확장됩니다.]
[마나가 영구적으로 3,000 상승합니다.]
[마나 완전 고갈 시, 5퍼센트의 마나를 즉시 회복하고 이후 2초 내에 사용하는 마법 혹은 스킬은 마나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마나핵의 4단계 이상 확장은 오직 마법사만이 가능한 영역인데 운이 좋았구나.
“헐....”
플레이어에게 허용되는 고통의 최대치.
주먹이 등을 힘껏 때리는 수준의 고통을, 그리드는 무려 10분 이상 겪었다.
그 고통은 찰나의 틈조차 없이 계속해서 반복됐으며 정수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발생했었다.
어쩐지 빡세다 싶었는데, 이런 보상이 숨어있었다.
‘어지간해선 못 버티긴 하겠더라.’
학창시절에 키워놓은 맷집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새롭게 얻은 스탯과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의지>
현실을 왜곡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의지입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무형지기>-초입
견고한 의지로 대상을 공격합니다.
*무형지기가 입히는 피해량은 의지 스탯에 근력 스탯을 더한 수치와 동일하며, 대상의 방어력이나 저항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의지>스탯을 보유하고 있는 대상은 이 공격을 무시합니다.
스킬 자원 소모:최대 검기의 절반.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4시간
그리드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검성 크라우젤은 이미 오래 전에 <의지 발현> 스킬을 개방한 바 있다. 무형지기조차도 의지 발현의 일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검성의 직업 효과로 발생한 히든피스이므로 그리드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리드는 무형지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거 활용성이 엄청나지.’
키리누스와 제국의 공작들이 사용하는 무형지기를 그리드는 몇 차례나 목격했었다.
즉시 발동하며, 형체가 없기에 회피가 불가능한 공격.
기습으로 선수를 빼앗거나 마법이나 스킬을 캐스팅 중인 적을 공격해 캐스팅을 취소시키는 등 굉장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아직 초입이라서 쿨타임이 긴 게 아쉽군.’
격을 쌓다보면 키리누스와 공작들처럼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아니, 키리누스와 공작들은 아직 초월자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들보다 훨씬 능숙하게 다루게 될지도 모른다.
‘순보는.... 예상대로 미친 사기 스킬이고.’
<순보>
공간이라는 개념을 초월합니다.
‘시야’에 닿는 장소 중 원하는 곳으로 한 걸음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극악의 확률로 발동합니다.
스킬 자원 소모:알 수 없음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알 수 없음
시야에 닿는 장소 중 원하는 곳으로 순간 이동.
스킬 효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가람이나 그랜드마스터가 그렇게 대단해보였던 것이다.
갑자기 눈앞에 훅하고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리드는 화들짝 놀라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었으니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미지가 아니다.
심지어 그리드 본인이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드는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기다려라, 가람.’
너를 만날 때마다 겪었던 절망감과 굴욕을 배로 갚아주겠다.
반드시, 꼭.
“오빠!”
그리드가 다짐하고 있을 때 성녀 루비가 도착했다.
그리고 기적을 행사했다.
메르세데스의 손과 등에 생긴 화상은 물론이고 울퉁불퉁하게 박힌 굳은살까지 말끔하게 치유시킨 것이다.
“아....”
메르세데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가 되리라 맹세한 이후, 자신이 이토록 희고 고운 손을 되찾게 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고맙습니다.”
메르세데스가 정중히 읍하자,
“저야 말로 늘 고마워요. 오빠를 지켜줘서.”
루비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의 미모도 메르세데스 못지않게 빛났다.
성인이 되고나자 부쩍 예뻐진 여동생의 모습에 그리드는 불안해졌다.
‘날파리들이 꼬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브라함이 수백 년을 고대해온 부활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맞이할 수 있게끔 스틱세이의 도움을 받아 검의 무덤으로 이동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루비와 섹시여고생을 비롯한 다수의 템빨단원이 동행했다는 점이다.
전설의 대마법사가 부활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는데, 유난히 눈을 빛내는 여성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니 사심이 많이 섞인 듯했다.
“너무 기대들 하지 마세요. 잘생겨봤자 얼마나 잘생겼겠어요? 끽해야 놀이 크면 저런 모습이겠다, 수준이겠죠.”
괜히 심통 난 제드노스가 초를 치려고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놀의 성인 버전이면 세계 최고 미남인데?”
“더 궁금해지네.”
템빨단원들의 기대치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의 뇌리에는 그리드와 동화할 때 드러났던 브라함의 미모가 강렬히 각인되어 있는 상태였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입장도 같았다.
유X브에서 수억, 수십 억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는 ‘백발 그리드’의 동영상들은 여전히 매일 성지 순례 댓글이 달리는 실정이었으니까.
“기대되는군....”
이젠 심지어 남자들까지 눈을 빛냈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대상은 성별의 구애 없이 선망하게 마련인 것이었다.
“파그마의 눈.”
소란 속에서, 검의 무덤의 전경을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했다. 그의 눈이 신비하게 빛나며 검의 무덤을 장식하고 있는 4,179자루의 검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이내.
오랜만입니다.
그리드가 한 자루의 검 앞에 다가가 서자, 검이 인사를 건네 왔다.
5대 교황 프렌스의 에고가 깃든 성검이었다.
근데 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몇 달 전에 봤을 때와 달리 검날 곳곳에 이가 나가고 손상된 흔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아, 걱정 마세요. 브라함의 시신은 무사하니까요.
“침입자....?”
레베카교의 템플러들이었죠. 용케도 이곳을 찾아냈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