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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12화 (1,002/1,794)

템빨 53권 - 15화

라인하르트 북문.

인산인해를 이루는 그곳엔 수백 명의 정예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한 채 혹시라도 수상한 자가 없는지 철저히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탑의 결사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야야! 제발 이 손 좀 놓으시게. 내가 이 나이 먹고 귀 잡혀 끌려 다녀야겠나?”

“귀를 아예 잘라버리기 전에 조용하세요.”

“.....”

“복귀가 늦기에 행적을 쫓아보았더니 이번에도 큰 사고를 치셨더군요?”

“선구자가 바뀌었을지 내 어찌 알았겠는가? 탑에서도 선구자가 바뀐 사실을 몰랐기에 내게 이번 임무를 맡겼던 거 아닌가.”

“그렇긴 하죠.”

지혜의 탑의 8좌, 제시카.

비반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그녀는 비반을 무척 잘 안다.

검술 외적인 일에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해서 딱히 믿음직한 사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탑주가 이번 임무를 비반에게 맡긴다고 했을 때 그녀는 반발하지 않았다.

당대의 선구자는 검성 크라우젤이었고, 비반 또한 검성이었으니 둘이 쉽게 의기투합하리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난 억울하다네. 이제와 내게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하지 마시게.”

“억울할 일이 뭐가 있죠? 당신이 세 명의 외부인에게 탑의 정보를 유출한 것과 선구자가 바뀐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당신이 신중하게 처신하기만 했어도 이런 사달이 발생하진 않았을 거라고요.”

“말을 뭐 그리 매정하게 하시는가? 그러지 말고 부디 2좌 앞에서는 나를 좀 변호해주시게. 또 10년 동안 벽만 보고 앉아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난단 말일세.”

“고작 10년으로 되겠어요?”

“.....”

“.....”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던 비반과 제시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존재를 완벽히 은폐하고 있는 그들의 앞길을 어떤 청년이 가로막은 까닭이다.

우연의 일치 따위가 아니었다.

청년의 시선은 비반과 제시카 두 사람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얼마 남지 않은 감자를 한입에 털어 넣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잠시 목석처럼 굳었던 비반이 중얼거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제시카는 전설의 대마법사다.

그녀의 은신 마법은 비반의 기감조차도 잠시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한데 길거리에서 감자나 먹고 다니는 철부지가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마법을 감지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탑의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세에 나온 것이 근 100년만인 비반은 지난 세월 동안 세상이 이상해졌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10년 전에도 속세를 방문했던 제시카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제시카의 시선이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으로 향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농부들의 모습을 한참동안 관찰하던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상이 아니라 이 나라가 미친 거예요.”

***

[조만간 탑에서 만나자꾸나.]

그리드는 탑의 결사가 남기고 간 전음이 영 찝찝했다.

‘굳이 조만간이라고 말한 이유가 뭐지?’

내가 광룡철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건가?

무슨 근거로?

“흐음....”

그리드가 청룡의 부츠와 갓 핸드를 살폈다.

광룡철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광물로 만든 무구였으니 제아무리 탑의 결사라도 광룡철과 연관 짓기는 힘들 것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비반의 무력에 압도당한 후유증인 듯하다.

그 키 큰 여성 또한 비반처럼 대단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사소한 말 한 마디조차 과대 해석하게 된 것 같다.

“도착했습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 차렸다.

그는 어느새 템빨성의 대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얻은 것들을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무쌍심법부터.

<무쌍심법>Lv.1

검성 비반이 각고의 연구 끝에 창안한 심법입니다. 모든 기맥을 순환시켜 검기를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만듭니다.

스킬 비활성화 시:초당 10의 검기를 자연 회복.

스킬 활성화 시:검기의 절반을 즉시 회복. 단, 이후 10분 동안 검기 회복력 초당 1로 고정. 재사용 대기 시간 1시간.

“....!”

기대 이상의 효과였기에 그리드가 뜨악 놀랐다.

검무의 강화가 거듭될수록 검기의 소모량이 늘어나 난처하던 차에 이건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본래 검기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회복되는 자원이므로 평소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르고 다녀야했는데 앞으론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초당 10이나 회복시켜줄 줄이야!’

그리드는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바로 곁에서 메르세데스가 지켜보고 있었으니 추태를 보이기 싫었다.

들뜬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가 메르세데스에게 물었다.

“너도 무쌍심법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습득한 거지?”

“네....”

죽여 달라는 말을, 메르세데스는 더 이상 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불 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좋아, 잘했어. 앞으로 꾸준히 연마해서 강해진 다음 나를 잘 지켜줘.”

“....반드시.”

메르세데스가 결의를 다졌다.

그녀는 비반에게 꼼짝도 못했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지혜의 탑이 무려 드래곤을 상대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지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상대가 강하다는 핑계로 주군을 지키지 못해서야, 기사가 아니다.

‘또 그 표정인가.’

메르세데스의 결연한 눈빛을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다짜고짜 어떤 물건을 건넸다.

청룡의 부츠였다.

다행히 발 냄새는 안 났다.

“한 번 신어봐.”

“....?”

“확인해볼 게 있어서 그래.”

메르세데스는 무신의 추종자 이정과 싸우면서 새로운 기사도를 세운 바 있다.

템빨이야말로 만류귀종이라고 주장하며, 자신 역시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착용하는 아이템의 성능을 15퍼센트 상승시킨단다.

그녀가 두 번째로 세웠던 기사도,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착용할 때마다 보정 효과를 받는다.’와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서 파그마의 후예를 초월하는 템빨러가 될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회의적이었다.

과연 메르세데스가 다른 히든 클래스의 전용 장비까지 착용할 수 있을까? <최초의 성검>처럼 퀘스트, 혹은 세계관에 얽힌 특수 장비까지 착용할 수 있을까?

역시나.

“신발이 저를 거부합니다.”

메르세데스는 청룡의 부츠를 착용하지 못했다.

‘그리드’라는 착용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밸런스라는 거겠지.’

S.A그룹이 파그마의 후예를 똥캐 취급하지 않는 이상, 파그마의 후예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할 리 없다.

그리드가 브라함의 영혼을 품고 있음에도 마법을 몇 개 배우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석함이 옳다.

‘내가 브라함에게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건 바보라서가 아니라는 말씀.’

지력 스탯이 낮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플레이어 기준으로 지력을 최대치로 찍어봤자 브라함의 강화 마법은 초급 수준밖에 습득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게 그놈의 밸런스 탓일 뿐이다.

‘하지만 서사시의 마검사는 밸런스에 덜 구애받을 것 같다.’

서사시의 마검사는 그리드, 파그마, 브라함이라는 3명의 전설을 기반으로 개화한 클래스이다. 성장 한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을 거라는 것이 그리드의 추측이었고 실제로도 신화 등급까지 성장이 가능하다는 명시가 있었다.

“너한텐 나중에 더 좋은 신발 선물해줄게.”

“신발은.... 싫어요.”

“주는 대로 받아. 어차피 다 줄 거야.”

“.....”

“....?”

메르세데스의 미묘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드가 십만대적검과 이십만대적검의 정보를 불러왔다.

<십만대군 봉쇄검(열화판)>Lv.1

단 한 번의 참격을 휘두릅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의 100퍼센트 피해를 입히며 3초 동안 ‘봉쇄’ 효과를 줍니다. 봉쇄에 걸린 대상은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스킬과 마법의 사용이 차단됩니다.

★검성 비반이 검술의 제약을 일부 해금했습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8,000, 검기 1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십만대군 학살검(열화판)>Lv.1

단 한 번의 참격을 휘두릅니다.

공격 대상의 반경 30미터에 있는 모든 존재(피아 구분 불가)에게 공격력의 3,000퍼센트 피해를 입힙니다. 하나의 대상이 사망할 때마다 다음 대상에게 적용되는 피해량이 10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상승 한도 없음.

★검성 비반이 검술의 제약을 일부 해금했습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12,000, 검기 15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이십만대군 분쇄검(열화판)>Lv.1

단 한 번의 참격을 휘두릅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의 400퍼센트 피해를 입히고 적의 공격 스킬을 분쇄합니다. 분쇄 된 스킬은 효력을 잃고 사라집니다.

단, 분쇄하는 스킬의 개수가 많고 위력이 클수록 반동이 커집니다.

★검성 비반이 검술의 제약을 일부 해금했습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12,000, 검기 200.

스킬 반동 효과:생명력 하락(최소 10퍼센트 최대 50퍼센트)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우선 공통점이 있다.

자원 소모량의 대폭 상승.

이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드에게는 자원 소모량을 절반이나 줄여주는 <부조리의 반지>가 있었으니까.

스킬의 위력이 대폭 상승하고 무쌍심법까지 얻은 마당에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굳이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십만대군 학살검과 열망의 무아검의 시너지가 사라졌다는 점인데....

‘검은 불꽃은 안 터질 때도 많으니까 스킬 자체의 공격력이 몇 배나 올라간 지금이 훨씬 안정적이고 좋다.’

딱히 단점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리드는 자연히 두 가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첫째, 일격의 위력을 증폭시켜주는 종류의 무기를 새롭게 제작하는 것.

무패왕의 검술은 물론이고 살(殺)계열의 스킬 위력을 극대화시켜줄 무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열망의 무아검은 연(聯)계열의 다단히트 스킬을 전개할 때 스왑해 사용하는 식으로 운영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

둘째, 무패왕의 검술의 원본을 얻는 것.

도대체 진짜 무패왕의 검술은 얼마나 대단하기에 검성이자 탑의 결사인 비반이 손봐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여전히 ‘열화판’에 불과할까?

비반의 호의가 깃들었다는 등의 수식어가 붙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열화판이라니 정말 의외다.

원본을 더욱 더 갖고 싶어졌다.

‘마드라의 일기장의 해석이 가능해지면 원본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 그리드가 품에서 작은 환단을 꺼냈다.

새카만 것이 한약냄새를 풀풀 풍길 것 같이 생겼는데 실제로는 꽃처럼 달콤하고 산뜻한 향기가 났다.

‘이건 엘릭서의 상위버전쯤 되려나?’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용단>

등급:신화

석상룡 구젤의 심장과 각종 영약을 조제해서 만든 비약입니다.

지혜의 탑의 결사들은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 100년 이상의 시간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천상의 신조차도 탐낼 절세의 비약으로, 복용자의 마나핵을 크게 확장시켜줍니다.

*복용 횟수가 늘어날수록 효과가 크게 감소하며 3회째 복용부터는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무게:0.1

‘마나핵?’

마나핵은 마법사들에게나 익숙한 시스템이다.

마나핵을 확장할수록 마나의 총량이 늘어나고 마나 자체가 정순해져서 마법 공격력 상승,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의 등급 상승, 마법 캐스팅 속도 상승 등의 효과를 발휘한다.

지력 스탯의 상위 개념으로, 마법사들은 히든 퀘스트나 전직 퀘스트 등을 통해서 마나핵을 아주 조금씩 성장시켜나갔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플레이어들에겐 그런 개념이 희미했다. 보통 사람들은 마나핵을 골렘의 제작 재료쯤으로 생각했다.

‘마나핵이 확장되면 좋다고 들어본 기억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에 한정되는 이야기일 텐데....’

너무 아쉽다. 차라리 엘릭서 등의 보통 영약처럼 스탯을 올려주는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뭐, 무려 신화급 비약인데 일단 먹으면 좋겠지.’

언젠간 익히게 될 브라함의 강화 마법들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가만?’

용단을 섭취하려던 그리드가 잠시 보류했다.

‘이걸 증거로 제시해야겠다.’

그리드는 비반과 대화하는 내내 한 아이를 걱정했었다.

네펠리나.

템빨성에 서식 중인 해츨링.

매일 돼지 4마리와 소 4마리를 먹어대는 바람에 나라 재정에 손해를 끼치는 중이지만 그리드는 그 아이에게 큰 호의를 품고 있었다.

사냥 시 경험치 획득률을 높여주는 축복을 내려주기도 했고, 아직 알이었던 시절부터 지켜봐온 만큼 정도 들었다. 부친과 마안족의 복수를 이뤄야한다는 숙명을 타고난 신세에 동정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드는 네펠리나가 무사하길 바랐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기원했다. 만에 하나라도 지혜의 탑의 표적이 되지 않게끔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혜의 탑이라는 조직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설명해봤자 콧방귀나 뀔 것 같아서 염려했는데 드래곤 하트로 만든 이 비약을 보여주면 경각심을 품을 듯하다.

***

“의문이긴 했다. 그 포악한 드래곤들이 왜 그다지 활개를 치지 않는지.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구나. 인간들이 노력한 결과였어.”

네펠리나의 침소.

한때는 그리드의 침실이었던 그곳에서 뒹굴고 있던 작은 용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알았다. 나는 아직 어리고 약하니 그자들을 조심하도록 하마. 내 기척이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끔 결계를 강화하고 주의를 기울이겠다. 그러니 그리드야. 너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위엄 있는 말투로 말하지만, 정작 목소리는 어린 소녀다.

생긴 것도 통통하니 살이 올라 전보다 더욱 귀여워져 있었다.

특히 눈이 너무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보석을 가져다가 박아놓은 듯하다.

네펠리나의 반질거리는 비늘을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욕구를 참지 못해서 브레스를 얻어맞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서둘러 물러나는 그리드의 귓전에 네펠리나의 희미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고마워.”

그리드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기쁜 마음으로 연무장에 돌아온 그는 곧장 용단을 꺼내 삼켰다.

“큭....!”

실실거리던 그리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배꼽 아래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더니 급기야 전신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몸이 불타는 듯한 격통에 휩싸인 그리드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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