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11화 (1,001/1,794)

템빨 53권 - 14화

곧 수탉이 울 시간이다.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을 듯하다.

“시작하세.”

“네.”

비반이 몸을 일으키자 그리드가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반이 기다려준 덕분에 충분히 회복한 상태였다.

“마드라의 검술은 지극히 단순하다네.”

“....?”

방금 전까지 비반은 마드라를 극찬했었다.

검성인 그가 마드라의 검술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다고 밝힌 것 자체가 궁극의 칭찬이었던 셈이다.

한데 이제와 단순하다고 평가하니 앞뒤가 안 맞다.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비반이 설명을 덧붙였다.

“단순하기에 완전하지. 검에 많은 움직임과 궤적이 깃들어 복잡한 형태를 이룬 검술들과 비교해서 훨씬 더 효율적이며 절묘하다네.”

“.....”

그리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놓고 괜히 맞장구 쳤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으니, 침묵이 상책이라는 판단이었다. 범재의 지혜라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참격.”

손가락을 세워 검으로 삼은 비반이 기수식을 취했다.

제자리에 우뚝 서 정면을 바라본 채 허리를 크게 비틀고 팔을 내렸다.

고작 저런 자세로 허리에 힘을 실어봤자 얼마나 실릴까.

그런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저 특이한 자세의 정체가 바로 십만대군 학살검의 기수식이다.

“단 한 번의 참격이야말로 마드라의 검술의 본질이지. 십만대적검부터 백만대적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네.”

“단 한 번의 참격....?”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만대군 봉쇄검과 이십만대군 분쇄검은 비반의 주장이 옳았다. 각자 ‘행동 제약’과 ‘스킬 분쇄’라는 별도의 효과를 발휘하긴 했지만, 검을 단 한 번 휘둘러서 시야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벤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십만대군 학살검이라는 예외가 존재했다.

십만대군 학살검은 대상과 대상의 반경 10미터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총 30회의 검기를 날리는 검술이었다. 그만큼 다른 두 검술보다 위력이 뛰어났다.

마드라의 검술을 통틀어서 단 한 번의 참격이라는 정의를 내리기엔 어폐가 있다는 뜻이다.

“반론하고 싶겠지?”

“네, 스승님께서도 보셨다시피 십만대군 학살검은 한 번의 참격이 아니라 수십 개의 검기를 날리는 검술입니다.”

“그것은 변질 된 걸세. 사용자에게 부담을 덜 주고자 의도적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편법을 쓴 거라고 해석.... 아니, 내가 왜 자네의 스승인가?”

“심법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모자라서 검술까지 봐주시니 스승님이 아니면 뭡니까?”

“관두게. 그대는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배울 자격을 얻었고 나는 단지 탑의 규칙에 따라서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니.”

“네....”

비반이 정색하며 선을 긋자 그리드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를 제자로 삼는 게 망신이라고 생각하시나보군.’

그리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반은 당연히 내 재능을 엿봤을 것이다. 그가 봤을 땐 고작 나 따위를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불성설일 테지.

하지만 비반의 이어지는 말을 듣자 착각이었음을 알게 됐다.

“지금의 자네를 있게 만든 세 명의 스승이 존재하는데 이제와 내가 한 발 걸쳐서야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그들에 비하면 나는 단지 자네에게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니 감히 스승을 자처할 수 없네.”

“....아.”

그리드는 비반이 점점 새롭게 보였다.

비록 첫인상은 황당했지만 사실은 심계가 매우 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실은 달랐다.

비반은 단지 무인으로서 옛 강자들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반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앞서 말했듯이 마드라의 검술은 단 한 번의 참격일세. 하지만 자네가 알고 있는 십만대군 학살검은 서른 번의 검기를 난사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용자의 몸에 주는 부담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의도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어.”

비반의 해석은 정확했다.

현재 그리드가 사용 중인 마드라의 검술은 모두 ‘데스나이트 마드라’가 사용했던 검술이다.

뼈밖에 남지 않아 힘이 달리고 충격에 약했던 데스나이트 마드라는 자신의 검술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구현했었다. 온전한 검술을 구현했다가는 자신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보게.”

결계의 끝에 다가선 비반이 검술을 시연했다.

그리드가 사용했던 것과 똑같이 30회의 검기를 날렸고 그것은 완벽한 십만대군 학살검처럼 보였다. 그리드가 전력으로 날뛰어도 멀쩡했던 결계의 벽면에 서른 개의 검흔이 아로새겨졌으니 엄청난 위력이었다.

고작 손가락으로 휘두른 검술이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검술의 위력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흡.”

조금 전과 똑같은 자세에서 크게 숨을 들이켠 비반의 근육들이 살짝 팽창한다 싶더니,

꽈아아아아아아앙-!

단 1회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결계의 벽면이 쪼개져버렸다.

반월의 형태로 벌어진 결계의 틈새로 여태껏 단절되었던 세계의 일부가 엿보였다.

혹시라도 누가 훔쳐볼까, 후다닥 결계를 복구한 비반이 말해나갔다.

“똑같은 힘을 사용해도 그것을 분산시키느냐, 일점으로 모으느냐의 차이일세. 힘을 일점으로 모으면 당연히 속도와 위력이 상승하니 도리어 완전하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이 경우엔 당연히 사용자에게도 무리가 따른다네. 특히 마드라의 검술은 기의 흐름을 극대화시키는 묘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용자의 정신력과 체력, 검기를 매우 크게 소모하지. 일정 수준 이상 단련하지 못한 사람은 그 반동을 결코 감당할 수 없네.”

열화판 십만대군 학살검이 서른 개의 검로로 나뉘어있던 이유다.

그리드는 확실히 이해했다. 하지만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십만대군 봉쇄검과 이십만대군 분쇄검은 한 번의 참격만 날리는데도 몸에 별 무리가 없습니다.”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사용할 때 생명력이 소모되는 이유는 대상의 스킬과 충돌할 때 생기는 반동으로부터 비롯된다. 검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두 개 검술은 위력 자체를 크게 약화시킨 거고.”

“....!”

“봉쇄검과 분쇄검은 무형지기를 응용한 검술일세. 적을 베는 것 외에도 별도의 효력을 발휘하는 만큼 굳이 위력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겠지. 반면 십만대군 학살검은 적을 베는데 집중하는 검술이니만큼 위력을 조금이나마 보존하기 위해서 이런 편법을 가미한 거고.”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비반이 품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묻고 싶군. 자네는 마드라의 검술을 무슨 수로 습득한 게지? 그는 비급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말이야.”

“그건....”

그리드가 번헨 열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나갔다.

파그마에 의해서 데스나이트가 되어 있던 마드라와 대결해서 승리하고 인정받아 일기장을 얻기까지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당시 마드라는 긴 세월의 풍파를 겪고 크게 약화 된 상태였습니다. 악마 군단과 싸우고 남은 상처들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죠.”

“강제로 언데드가 되었으니 정신적으로도 지쳐있었겠군. 그 몸으로 사용할 수 있던 건 지금의 열화판 검술들뿐이었고.”

“네....”

“하여튼 파그마 그자는 중간이 없군. 세계를 위해 싸운 숭고한 정신은 존경 받아 마땅하지만 너무 과한 면이 많아.”

“....저기, 어르신.”

그리드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의문을 끄집어냈다.

“당시에 지혜의 탑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신과 대악마들에게 고립 당한 채 홀로 싸웠던 파그마를 지혜의 탑은 돕지 않았다.

지혜의 탑의 존재의의는 세계의 평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반이 쓰게 웃었다.

“당시 구젤이 잠에서 깨어났었네.”

“구젤?”

“드래곤일세. 광룡 네바르탄에게 큰 상처를 입고 회복 중이던 녀석은 대악마들의 마력을 흡수해서 재기하기를 노렸었다네. 번헨 열도의 전투에 난입하려고 했었지.”

그리고 드래곤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했다.

악마 군단을 향해서 쏘아지는 녀석의 브레스 한 방에 번헨 열도가 통째로 소멸할 우려가 있었다.

“우리 결사들은 놈을 막기 위해 싸웠어. 탑의 목적은 인류가 막을 수 없는 재앙. 즉 드래곤을 막는 것에 있으니까.”

“....!”

그리드는 비반의 힘에서 한도를 느낄 수 없었다.

보통 NPC와 달리 레벨을 추측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이유가 드러났다.

플레이어가 개입할 일 없는 별세계의 스토리, 다름 아닌 ‘드래곤’을 감당하는 조직의 일원이었으니 강할 수밖에.

“드래곤이 사냥할 수 있는 대상이라곤 상상도 못해봤습니다.”

“사냥은 무슨. 어림도 없지. 우리의 주된 임무는 드래곤의 영역을 수호함으로서 항상 만족감을 유지시키고 최대한 오랫동안 잠들게 하는 것에 있네. 일종의 사육사라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광룡의 마력을 품은 광룡철의 증식은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야. 광룡은 모든 드래곤의 표적이니까.”

“아....”

지혜의 탑이 광룡철을 경계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 그리드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탐욕을 계속 증식시켰다간 사달이 났을 거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두 가지 불길한 사실을 눈치 챘다.

“탑의 결사들은 모두 어르신처럼 강하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께서 합심해도 드래곤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요?”

“구젤처럼 상처 입은 드래곤이나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헤츨링 같은 경우엔 운 좋게 사냥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드래곤의 영역을 수호한다고 하셨는데, 영역에 침범하는 존재들을 배제하시는 겁니까? 설령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드워프의 도시 탈리마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반드시 탈리마를 방문해야했는데 그곳은 하필 염룡 트라우카의 영역이었다.

자칫 탑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비반은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의 마력은 몬스터에게 강력한 힘과 지혜를 주지. 드래곤의 영역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조직화되어 있다네. 자연히 경비가 삼엄해지는 까닭에 인간은 설령 초월자라 할지라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 그러니 굳이 우리가 나서서 침입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네.”

“한데 드래곤의 영역을 수호하신다는 것은....?”

“바알이라는 놈이 가끔씩 장난을 치거든. 그놈이 드래곤을 잠에서 깨우려고 드래곤의 영역에 게이트를 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가 나서서 막고 있네. 바알은 드래곤과 비교해도 조금밖에 손색이 없으니 속인들이 감당할 수 없어 우리가 나설 수밖에.”

“....그렇습니까.”

제1위 대악마 바알.

녀석의 의식체 중 하나를 그리드는 한 번 만나본 바 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놈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파그마의 영혼이 걱정될 정도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하세나.”

비반이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엔 이십만대군 분쇄검의 기수식이었다.

***

비반의 결계가 펼쳐진 길목.

템빨성과 대장간 지구를 잇는 그곳은 본래 인적이 드물다.

주변에 민가와 상가가 전혀 없으니 이용하는 사람 자체가 적었다. 기껏해야 성을 왕래하는 대장장이와 병사들이 이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소집해서 길목 주변을 철저히 봉쇄시켰다.

그리드가 들어가 있는 결계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끔 철통 같이 지켰다.

“.....”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결계 속 비반은 그리드에게 최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고자 노력했고 그리드는 이를 소화하고자 발악했다.

끝내.

촤르르르르륵-!

메르세데스도 감히 접근하기 힘들었던 날카로운 검의 결계가 걷혔다.

비반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리드는 흡족한 표정으로 결계에서 나왔다.

그리드 앞에 무릎 꿇은 메르세데스가 다짜고짜 청했다.

“죽여주소서.”

“어?”

갑자기 왜?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염려되는 마음에 결계 속 전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감히 전하의 심법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의도치 않았으나 자연히 이해되어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낱 기사인 제가 전하의 기술을 훔쳤으니 처형당해 마땅합니다.”

“....!”

“....!”

무슨 말인지 이해한 그리드는 기뻐하는 반면 비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 아이의 눈은 결계마저 꿰뚫어볼 수 있단 말인가?’

기겁하는 비반의 귓전에 소름 돋는 음성이 스며들었다.

“혜안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신조차도 경계하는 힘이랍니다.”

“....!”

화들짝 놀란 비반이 뒤를 돌아보자 짙은 화장으로 얼굴의 주름을 감춘 여성이 보였다.

키가 190센티미터에 이르는 비반과 그에 맞먹는 그리드조차도 올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큰 여성이었다.

“귀인께서는 누구신가요?”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잠입하다니?

급히 검을 뽑으며 일어선 메르세데스가 그리드를 보호하며 나섰다.

어째선지 비반도 메르세데스의 등 뒤로 숨었다.

여성이 싱긋 웃었다.

“예쁜 아이야, 경계할 필요 없단다. 나는 거기 숨은 주책바가지를 데리러 왔을 뿐이니까.”

“.....”

메르세데스의 등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비반이 숨을 죽였다.

지금이라도 기척을 지우면 숨을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거의 고양이 수준의 발상이었다.

“어르신....”

그리드가 안쓰러운 눈으로 비반을 바라보았다.

체벌에 대해서 얼핏 들은 바가 있으니 동정심이 생겼다.

비반은 억울했다.

“결계 속을 엿볼 수 있다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아!!”

“.....”

절규와 함께, 비반은 떠났다.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란한 퇴장이었다.

[조만간 탑에서 만나자꾸나.]

여성이 남긴 전음이 그리드의 뇌리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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