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13화
‘검무에 약점이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검무는 말 그대로 춤이다. 칼 휘두르면서 추는 춤. 전투에서 도움이 안 되는 동작이 더러 섞였다.
제왕, 무신, 살기 등.
각 검무가 특정 대상이나 개념을 형상화하다 보니 아무래도 강제되는 동작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보폭을 밟아야한다는 점이다.
이때 드러나는 빈틈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서 여태껏 수많은 실력자들이 그 약점을 노려왔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약점을 도리어 강점으로 승화시킨 덕분이었다.
검무의 과정에 따르는 동작 대부분을, 그리드는 방어와 회피의 동작으로 역이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검무 자체를 진화시킴으로서 쓸데없는 동작을 최소화시키기도 했다.
뼈를 깎는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 순간 또 다시 검무가 공략당하고 말았다.
검무의 한계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 그리드는 큰 허탈감에 빠졌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검무는 그리드의 전부가 아닌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검무의 부정이 즉 그리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것이다.
‘이건 다를 겁니다.’
그리드가 차분하게 비반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비반의 시선은 분명히 그리드의 하체를 훑고 있었다.
보폭의 방향을 읽고 대비하여 검무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무패왕 마드라의 검술은 다리를 쓰지 않는다.
살아생전의 마드라는, 뿌리내린 거목처럼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제국의 수십만 대군을 몰살시켰으리라.
“십만대군.”
허공의 그리드가 허리를 크게 비틀었고,
“학살검!!”
“....!!”
무패왕의 유산이 공개됐다.
열풍처럼 번져나가는 검기의 세례 너머로, 그리드는 비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확인했다. 예상과 다른 검술을 상대하게 되자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통한다!’
그리드가 확신을 품는 순간이었다.
“....!?”
죽음의 기운이 그리드의 목덜미를 덮쳐왔다.
초월자의 감각이 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화들짝 놀란 그리드가 뒤로 목을 빼자,
써겅-!
그리드의 바로 코앞에서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궤적을 남기지 않고 나타난 무형의 예기가 공간을 절단하며 발생한 효과음이었다.
‘미친....!’
심검은 아니다.
심검은 ‘베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베는 것.’임을 크라우젤이 보여준 바 있다.
즉, 명중에 실패한다는 결과가 성립하질 않는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게 고작 무형지기라고?’
무형지기.
순수한 의념의 힘으로 대상을 압박하는 절대고수들의 수법.
심검과 달리 대상을 ‘반드시’ 베는 사기적인 스킬은 아니지만,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대상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용한 스킬이다.
물론 위력은 심검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비반의 무형지기는 간과할 수 없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찌릿....! 찌릿!!
찢겨나간 공기가 내지르는 비명이 피부를 저리게 만든다.
조금만 늦었어도 내 목이 잘려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리드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
1초나 됐을까?
아주 잠시 굳어있던 그리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기의 세례가 비반을 전 방위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예상대로 비반은 이를 파훼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검막을 펼쳐 직접 일일이 방어했다. 제자리에서 두 걸음 이상을 떼지 않는 그의 시선은 그리드에게 꽂혀 있었다.
[방금 그걸 피한 건 훌륭했네. 아직 감각은 무디지만 그 무딘 감각을 극복시켜주는 체(體)를 갖췄군.]
‘정말 괴물이다....’
이 와중에 전음까지 보내다니?
이를 악 문 그리드가 검지를 세워 비반을 겨눴다.
“매직 미사일!”
지이이이잉-
그리드의 손가락 끝에 하얀 빛이 집약됐다.
플레이어의 한계를 극복한 동체시력으로 검막의 빈틈을 노린 그리드가 빛을 총 쏘듯 난사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안배 따윈 없었다.
콰쾅! 쿠콰콰콰콰쾅!!
검막에 가로막혀 사방팔방 흩어진 검기가 지면과 충돌하자 결계 전체가 흔들렸고, 출렁이는 대지 위에 선 비반을 노린 매직 미사일이 비처럼 쏟아졌으며, 갓 핸드들이 묠니르를 투척했으나.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탕!!
검을 비스듬히 세운 비반이 이를 모조리 막아버렸다.
“헉....”
그리드가 헛숨을 삼켰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위에 놀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반이 중얼거렸다.
“어설프게 배웠다더니 과연... 브라함의 마법과 마드라의 검술은 완벽히 재현하지 못하는군.”
“....꿀꺽.”
오직 선구자만이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이라서 그럴까?
세계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인물인 까닭인지 비반의 강함에는 한도가 없어 보였다.
칠악성의 화신인 그랜드마스터나 양반 가람보다 몇 차원 위에 있는 강자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마리로즈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을 품게 될 정도였다.
‘최대한 도망치면서 받아 친다.’
선공은 무의미하다. 도리어 빈틈을 드러낼 뿐이다.
판단한 그리드가 언제라도 <여왕의 왜곡>이나 회(回)를 사용할 수 있게끔 대비했다.
애초에 이 대결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기다.
심지어 고작 1분만 버티면 되는 간단한 승부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그리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그리드를 바라보는 비반의 눈빛이 여태까지와 달리 깊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로다.’
비반은 감정에 솔직한 만큼 단순하다.
살아온 세월에 비해서 지혜롭지 못한 것이 다른 결사들과의 차이점이었고 그 탓에 실수도 밥 먹듯이 해왔다.
하지만 그는 무능하진 않았다.
천 번의 실수를 범할지언정 한 번의 검술로 만회할 수 있는 실력이 그에겐 있었다.
수백 년 전, 수천의 악마 군단이 번헨 열도를 침공했을 때 깨어나 개입하려했던 석상룡 구젤의 한쪽 날개를 베었던 인물이 바로 비반이었다.
‘파그마의 전인이되 브라함과 마드라의 기술을 계승했다라....’
비반은 검의 성인(聖人).
그는 검과의 교감이 가능했다.
상대방의 검에 깃든 힘, 기술, 감정과 목적성을 토대로 상대가 여태껏 어떤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추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반조차도 그리드의 길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다.
‘저 아이는.... 타고난 무재가 아니다.’
그리드는 분명히 강했다.
체(體)는 이미 완성되었고 부족한 기(技)는 다양한 도구의 운용으로 충족시켰다.
하지만 여러모로 조잡했다.
완성 된 육체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혹사당한 흔적이 산재했고, 검무의 약점을 보완하겠답시고 노력한 흔적들에선 재능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전까지의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단 말인가?’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안 된다.
범인이 천재를 이해할 수 없듯이, 천재 또한 범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시험이 시작되고 어느새 27초가 지나고 있었다.
비반은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다.
하지만 그리드를 제압하지 않았다.
묵묵히 선 채, 브라함과 마드라가 그리드에게 기술을 가르쳐준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동정? 아니, 존중과 존경인가.’
없는 재능을 쥐어짜 영웅왕으로 등극한 사내.
브라함과 마드라는 자신들과 전혀 다른 범재의 활약에 이해하기 힘든 감동을 느꼈을 수도 있다. 감동은 깊은 여운이 되어 흥미와 호감으로 변해갔으리라.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그러했으니까.
“재미있군....”
30초가 지났고, 비반은 미소 지었다.
이를 본 그리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제길, 무슨 속셈이지?’
허공의 그리드는 비반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여왕의 왜곡과 회를 사용할 수 있게끔 준비하며 비반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관찰했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긴장하면서 극도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1초는 1시간처럼 길게 다가왔다.
시간이 멈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비반이 영문 모를 미소를 짓자 찝찝하고 두려웠다. 이쪽의 속내를 눈치 채고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싶었다.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지? 이제 10초는 지났나?’
“잡념을 버리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게. 깊은 생각은 도리어 그대의 발목을 붙잡을 터이니.”
“큭....!”
비반의 무릎이 굽혀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약할 기세였다.
그리드는 결계의 천장에 정수리가 닿기 직전까지 높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터엉-!
급기야 비반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땅을 박차고 도약한 그가 내뿜는 기세가 폭풍이라도 된 양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거칠게 뜯겨나간 대지가 소용돌이치며 그리드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리드를 지키고자 나선 네 개의 갓 핸드가 교차시킨 검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갈려나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건 안 돼. 못 막는다!’
드래곤의 발톱처럼 위협적인 비반의 검 끝이 다가오는 광경을 보면서 그리드는 직감했다.
<초월자의 감각>이라는 시스템적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드 본인이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리드는 ‘호흡’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태껏 그가 꺾어온 강자들은 알게 모르게 그리드의 호흡을 노려왔었다.
호흡과 호흡 사이의 틈을 노려 그리드에게 일격을 먹이곤 했었다.
무수히 당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리드는 자신이 비반의 공격 타이밍을 정확히 잡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었다.
절망 속에서.
“이십만대군 분쇄검!!”
그리드는 회가 아닌 비기를 꺼내들었다.
지정한 대상의 스킬과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무패왕의 검술.
베고자하는 스킬이 강할수록 심한 반동이 발생하지만, 당장 목이 날아가는 것보단 낫다.
콰르르르르르릉!!
열망의 무아검과 비반의 검이 충돌하며 천둥보다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이십만대적검의 반동으로 내상을 입었습니다.]
[50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쿨럭....!”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그리드의 두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그리드는 전신의 근육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허.”
비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금 그리드가 막아낸 일격은 석상룡 구젤의 한쪽 날개를 베었던 무쌍검의 절초였기에.
심지어.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리드는 방금의 교전으로 힘의 차이를 실감했을 텐데도 전혀 의지가 꺾이지 않고 있었다.
기합을 내지르며, 갑자기 여러 명으로 나뉘더니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검을 휘둘러왔다.
사방팔방에서 전개되는 검무의 중앙에 선 비반이 짙게 웃었다.
‘나도 이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구나.’
동시에.
철컥.
비반이 검을 칼집에 돌려 넣었다.
그러자 비반의 주변으로 수백 개의 사선이 뒤늦게 그려지더니 그리드의 분신들이 모조리 찢겨져 소멸했다.
유일하게 남은 그리드의 본체는 마침 <뇌신> 상태에 돌입한 덕분에 비반의 절세검법에도 베이지 않았으나,
“이제 그만 쉬게나.”
비반이 ‘베겠다.’고 마음먹자 베여 지상에 곤두박질 쳤다.
심검(心檢)의 발현이었다.
“컥....! 쿨럭, 쿨럭!!”
[생명력이 최소치로 떨어졌습니다.]
[시험이 종료됩니다.]
차디찬 바닥에 처박힌 그리드가 절망했다.
그래도 10초는 버텼겠지? 생각하면서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그는 단지 30초를 채우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쉬울 뿐이었다.
마침 알림창의 내용이 갱신 됐다.
[당신은 정확히 1분을 버티셨습니다.]
“윽.... 어?”
그리드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닥에 처박힌 채 석상처럼 굳어 있는 그의 앞으로 비반이 다가와 앉았다.
“자, 이것은 용단이고.”
[시험 보상으로 <용단>을 획득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무쌍심법의 구결을 전수해주도록 하지.”
“.....”
비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드의 지식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이 그리드의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며 그의 몸속 기의 흐름을 전보다 원활하게 만들어주었다.
[시험 보상으로 <무쌍심법>을 습득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검기 자원의 자연 회복 속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아....”
앞으로는 허공에 검 휘두르는 삽질을 안 해도 되는 건가?
기쁘다.
그리드는 여전히 비반의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문은 잠시 접어둔 채 감격에 몸을 맡겼다.
바로 그때였다.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무쌍심법>을 습득하였습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제안했다.
“마지막 남은 보상으로 마드라의 검술을 조금 손봐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네?”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만, 자네가 습득한 십만대적검과 이십만대적검은 원본이 아닐세. 그렇다고 가짜란 말은 아니고. 마드라가 만든 것은 분명한데 뭐랄까.... 마치 허약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끔 배려해서 개량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
그리드가 경악했다.
비반의 지적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2대 전 검성이라더니, 과연 대단한 안목이었다.
감탄해서 할 말을 잃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웃어주었다.
“하지만 자네의 몸은 매우 튼튼하지 않은가? 자네라면 보다 원본에 가까운 마드라의 검술을 체득할 수 있을 걸세. 아, 그래도 너무 기대는 말게나. 아무리 나쯤 되는 천재라도 마드라가 창안한 검술을 완벽하게 재현할 순 없으니.”
“감사.... 감사합니다....”
그리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1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비반의 호의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리드는 비반 같이 대단한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비반 같이 대단한 사람이 마드라를 기억하고 있음에 감격했다.
지하의 마드라도 기뻐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