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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08화 (998/1,794)

템빨 53권 - 11화

3일 전 크라우젤과의 만남은 명백한 실수이자 실패였다.

두 번의 실패는 탑의 용서를 구하기 힘들 뿐더러 본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비반은 신중하게 행동했다.

‘성질 좀 죽이자....’

다짐을 거듭한 비반은 지난 3일 동안 템빨성 주변을 배회했다. 기분에 따라서 행동하는 본성을 간신히 억누르고 크라우젤 이상의 기도를 지닌 사람을 철저히 수색해왔다.

그 끝에 발견한 사람이 바로 메르세데스였다.

메르세데스의 기량을 헤아린 비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크라우젤이 경쟁에서 밀린 이유를 절로 납득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메르세데스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품격마저 갖췄으니 누가 봐도 왕의 재목이었고, 머리 위의 작은 관은 그녀의 정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저자가 이 나라의 왕이로군.’

비반은 메르세데스를 주시한 끝에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하여 그녀와의 접선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절대로 성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허, 이 결계를 만든 자의 정체가 뭐지?’

메르세데스에게 접근하는 일은 예상과 달리 굉장히 힘들었다.

템빨 성에는 단지 마법뿐만 아니라 정령의 가호까지 받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으므로 들키지 않고 잠입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지 검(劍) 하나만을 단련해온 비반은 마술이나 잠행술 등의 잡기에 취약했던 것이다.

‘힘으로 돌파하는 거야 간단하다만.’

템빨성의 결계가 제아무리 훌륭해봤자 비반의 무력 앞에선 전혀 위협이 아니었다. 비반이 마음만 먹으면 결계 따위 손쉽게 파훼할 수 있었고 성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탑의 결사는 살인하지 않으며 속세에 행적을 남기지 말아야한다는 규칙이 존재했다.

비반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드디어 메르세데스가 궁 밖으로 나왔다.

매보다 더 뛰어난 비반의 시력에 그녀의 이목구비가 보다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허.’

메르세데스의 깊은 눈동자를 엿본 순간, 비반은 전신에 솟아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10리의 거리를 둔 채 기척을 지웠음에도 그녀가 나를 꿰뚫어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혜안....’

저건 단련으로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아니라 타고난 능력이다.

수백 년의 수련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필연적인 힘이 그녀의 두 눈에 깃들어 있다.

‘저자는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비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었기에 떠났던 속세에 다시금 흥미를 품게 되었다.

이 순간 그의 온 신경은 메르세데스에게 집중됐다.

메르세데스의 곁을 따르는 시중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 시중의 곁을 맴도는 멤피스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옥 또한 세계의 일부에 불과했으므로 지옥 제일의 마수라는 명함조차도 비반에겐 특별할 게 없었다.

터엉-!

메르세데스가 인적이 드문 길에 들어섬과 동시에 비반이 신형을 날렸다.

“그대는 누구지?”

“시중이 낄 자리가 아니다.”

“냥핫핫!”

부산을 떠는 시중과 멤피스에게 여전히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비반은 메르세데스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녀를 철저히 관찰했다.

전설의 격.

왕의 위엄.

헤아릴 수 없는 눈빛과 빈틈없이 단련 된 기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 초월의 격은 쌓지 못한 듯하나, 그럼에도 이미 완전하다.

장담컨대 뮐러, 마드라와 동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름을 떨쳤으리라.

그 둘보다 강해질 수 있었느냐면 글쎄.... 아니었겠지만.

“무구에 의존한다 하더니 과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아닌 것이 없구나.”

“귀하는 누구십니까?”

‘아아.’

비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코앞에서 마주보고 선 메르세데스의 시선은 멀리서 본 것과 차원이 달랐다.

나의 심연까지 엿보고자 시도하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대를 만나고자 탑에서 왔네.”

두근, 두근, 두근.

비반은 메르세데스의 정체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녀야말로 새로운 선구자이며 머잖아 초월의 격을 쌓고 탑을 등반할 인재라고 확신했다.

“어디 한 번! 새로운 선구자의 실력을 확인해 볼까!!”

먼발치에서 뮐러를 엿봤던 그날 이후 수백 년 만에 느끼게 된 고양감이다.

흥분에 휩싸인 비반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일방통행, 강행돌파, 일자무식.

속인이었던 시절부터 쭉 들어왔던 평가 그대로, 비반은 당장 솟구치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한 마디로 이성을 잃었다.

제3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떠들어댄 끝에 급기야 검초를 펼쳤다.

채앵-! 채채채챙!!

“내 일초를 버티다니! 대단하도다!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재가 있었구나!!”

저 깊은 눈이 나의 검로를 읽는다.

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쏘냐.

타앗-!

검술이 막히자 도리어 신중해지고 이성을 되찾은 비반이 시중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이제라도 ‘목격자’를 기절시킬 의도였다.

한데.

촤르르르르르륵-!

“....!?”

여태껏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시중이 순식간에 검과 갑옷, 그리고 망토와 관을 무장했다.

밥 먹고 옷 갈아입는 연습만 해온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경악스러운 속도였다.

‘이럴 수가!’

점혈에 실패하고 뒤로 물러난 비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자를 왜 이제야 본 거지?’

전설과 초월의 격.

왕의 위엄.

단련을 넘어서 한계를 몇 번이나 넘어온 듯한 기도.

심지어 희미한 투기에 이르기까지....

시중인 줄 알았던 오징어. 아니, 사내를 뒤늦게 똑바로 마주본 비반은 아차 싶었다.

사내 또한 메르세데스와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망했다.’

감정에 매몰되었던 이성이 통째로 끄집어진다.

망했다, 돌겠다, 미치겠다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끊임없이 부상했다.

잠시 조용히 선 채 생각해보던 비반이 소리쳤다.

“하긴....! 일국의 왕이 평범한 시중을 거느리고 다닐 리 만무하지!”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이었다.

이 순간 펼쳐지는 모든 가정이 부디 잘못 된 것이길 바라며,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탑의 존재는 외부인에게 유출돼선 안 되네. 하니 기사를 잠시 물리도록 하시게.”

“귀하는 대체 누구시죠?”

“탑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영원의 탑 말씀이신지요?”

“핫, 우리 지혜의 탑을 그딴 하찮은 마탑과 비교하다니.”

“지혜의 탑....? 처음 들어보는데요.”

“.....”

쥐고 있던 지푸라기가 끊어졌다.

현실은 냉혹했다.

제대로 망했다.

또 다시 실수했고, 실패했다.

비반은 깨달았으나 한 번 더 부정해보았다.

“나는 그대가 왕궁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네. 왕궁의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대에게 예를 갖추는 광경을 확인했으며 그대의 기량이 이 도시의 정점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했네. 그대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닌가?”

제발 맞다고 해라.

간절한 바람이 담긴 눈빛을 보내봤으나.

“아닙니다만.”

메르세데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순간 울컥한 비반이 소리쳤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두 번의 연속적인 실수와 실패.

이는 정말 큰일이다.

이번 체벌은 정녕 가혹할 것이다....

좌절하는 비반의 귓가로, 여태껏 시중이라고 오해했던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길거리 행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왕이 누군지 알려줬을 텐데요.”

“.....”

아아, 속세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다.

부끄럽게도 교류하는 법을 잊었다.

멍하니 있던 비반이 결국 깨끗하게 인정했다.

“내 실수다. 그대들에겐 잘못이 없으니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지.”

“뭐라는 건지....”

“미친 인간이다옹.”

“.....”

사내와 멤피스가 황당해하며 혀를 내둘렀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 것이 얄밉다.

하지만 비반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드디어 선구자를 찾아냈기에.

“그대가, 왕이로군.”

확신에 찬 음성.

단언하는 비반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꽂혔다.

그리드가 일단 부정했다.

“왜 이제 와서 저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대가 왕이 아니라면 세상에 누가 왕이 될 수 있을까?”

“....?”

“더 이상 감추려고 하지 말게. 나는 이미 그대의 위엄을 엿봤으니.”

‘감춘 적 없는데.’

“또한.”

비반의 심계가 깊어졌다.

그리드의 육체에 새겨진 흔적은 그가 여태껏 몇 번이고 한계를 뛰어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고, 그리드의 영혼에 새겨진 격은 그가 여태껏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대가 걸어온 영웅의 길이 그대야말로 이 시대의 선구자임을 증명해주고 있다네.”

“.....”

영웅의 길.

기분 좋은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묘한 떨림을 느낀 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괴한의 손을 덥썩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바로잡고 망설였다.

‘경계해야 돼. 정황 상 이자는 탐욕을 찾아온 게 분명하다.’

일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지혜의 탑과 선구자는 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구자는 지혜의 탑을 ‘출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도리어 지혜의 탑은 선구자에게 호의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눈앞의 괴한은 메르세데스를 극도로 긴장시키는 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살의나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대련 형식의 도전만 잠시 취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지혜의 탑과 선구자의 관계가 좋을지 몰라도 광룡철은 별개의 개념이었기에.

‘시스템은 분명히 경고했어.’

탐욕에 깃든 광룡철의 기운을 감지한 지혜의 탑이 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고. 그들이 광룡철을 발견하는 즉시 그것을 파괴할 거라고.

‘이자에게 정체를 밝히는 즉시 탐욕을 빼앗기고 파괴당할 가능성이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없다.

괴한은 이미 내 정체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당장 거리로 나가서 조사하면 그 즉시 내 정체를 밝힐 수 있다.

‘...가만?’

초조해하던 그리드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괴한이 청룡의 부츠를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광룡철의 기운이 삭제 돼서 그런가? 탐욕을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물론 내 인벤토리 속에 있는 ‘온전한 형태의 탐욕’을 감지하고 찾아온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그렇다면 탐욕의 주인이 나라는 걸 진즉에 알아봤을 테니.

‘탐욕을 쫓아온 게 아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바로 이 나라의 왕이며 선구자입니다.”

“오오....”

비반이 로브를 벗었다.

흑금색으로 빛나는 이름을 당당히 드러낸 그가 환한 미소를 짓고서 악수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네.”

동시에 그는 그리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메르세데스가 듣지 못하도록 신경 쓰는 것이었다.

[선구자여. 우선 한 가지 알려줄 규칙이 있다. 지혜의 탑에 대해서는 절대로 외부에 발설해선 안 된다. 탑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할 경우 큰 체벌을 피할 수 없게 되니 유념하도록. 이에 대해서는 훗날 그대가 탑을 방문하는 날 잘 설명해줄 터이니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도록 하지.]

‘당신은 발설했잖아?’

태클을 걸고 싶은 그리드였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끼어 들었다간 대화의 진전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반은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었다.

[선구자여. 지혜의 탑이 그대의 협력을 구한다. 광룡철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광룡 네바르탄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광물로써 네바르탄을 노리는 다른 모든 드래곤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성질을 지녔다. 한데 어떤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광룡철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자칫하면 그자에 의해서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

“....?”

[세계의 평화가 달린 일이다. 선구자여, 그대는 속세에서 쌓아온 입지를 이용해 그자를 수색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모든 비용은 당연히 탑에서 처리할 것이며 충분한 보상도 마련해 두었다.]

띠링~

[★히든 퀘스트★ <탑의 임무>가 생성 됩니다.]

<탑의 임무>

★히든 퀘스트★

지혜의 탑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비밀 결사 조직입니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드래곤이라는 재앙을 억제하는 것에 있습니다.

탑에 협조하여 광룡철의 주인을 찾아주십시오!

퀘스트 수락 보상:1,000골드. 최상급 버프 물약 각 20개.

퀘스트 클리어 조건:광룡철의 주인으로부터 광룡철 탈취, 혹은 광룡철의 주인을 말살.

퀘스트 클리어 보상:용의 비늘(속성 랜덤)

“.....”

떠오르는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그리드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더니 울컥해서 소리쳤다.

“이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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