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9화
“심검보다 호흡의 깨달음이 늦다라.....”
크라우젤이 대상의 호흡을 읽고 이용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고수라고 불리는 작자들의 기본기를 천하의 검성이 이제야 습득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옹알이보다 달리기를 먼저 배운 셈인데, 이게 어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군.”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플레이어를 시스템의 존재조차 자각 못하는 NPC가 이해할리 만무하다.
혀를 내두르는 스승에게 크라우젤은 그저 쓴 미소를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리드.’
키리누스와의 인연이 깊어질수록 크라우젤이 그리드를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괴리감과 싸워왔는가.’
NPC는 인공지능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젤은 NPC들을 존중해왔다.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이 세계에 대한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집중력과 지구력을 높이려는 방책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피아로를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키리누스 밑에서 벌써 2년 이상 수학해오면서 크라우젤의 인식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NPC가 진짜 인간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칸이라는 대장장이를 잃었을 때 세상에 울려 퍼졌던 그리드의 분노를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때 너는 정말로 힘들었겠....?’
잠시 상념에 잠겼던 크라우젤이 표정을 굳혔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어느새 그의 바로 뒤에 서있었다.
“통탄할 노릇이구나.”
‘이 자는?’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크라우젤의 귓가에 괴한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크라우젤의 6년 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닌 크라우젤은 상대의 정체를 즉각 파악했다.
‘탑의 결사!’
“검성의 경지를 이뤘다기에 기대했건만, 초월의 격은커녕 기본적인 단련조차 모두 이루지 못하였구나. 이 상태로 검성을 자처해서야 망신밖에 더 되는가?”
“귀하는 누구요?”
대경실색한 키리누스가 나섰다.
대륙제일창인 그조차도 괴한의 등장을 뒤늦게 자각했다.
창을 쥔 그가 적의를 발산하자 크라우젤은 ‘적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호오, 창사치고 훌륭한 기도를 지녔구나.”
파팟!
키리누스에게 흥미를 보인 괴한이 크라우젤의 신체 특정 부위를 손가락으로 점해버렸다.
그러자.
[상태이상 ‘침묵’에 걸렸습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3분 동안 유지됩니다.]
“?!”
크라우젤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스킬이 금제에 걸렸다.
처음 겪는 일에 놀라는 크라우젤이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어떤 상황과 조우할지언정 혼란하지 않기에, 그는 지존이었다.
‘스승님, 괜찮습니다.’
크라우젤이 눈빛에 강한 의지를 담았다.
키리누스를 안심시키고자 눈빛으로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까앙-!
키리누스는 크라우젤과 시선을 마주칠 여력이 없었다.
창대를 세워 괴한의 검격을 막아낸 그의 두 발이 돌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귀하는 누구시기에 이러는 거요?”
“잔말 말고 싸움에 집중하라. 이 시대의 수준을 가늠해보고 싶구나.”
기운을 끌어올리며 외치는 키리누스의 질문을 묵살한 괴한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경고했다. 깊이 눌러쓴 로브 아래 드러나는 그의 입가엔 명백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경우 없는 자로다!”
키리누스의 분노가 한계치에 이르렀다.
불쑥 나타나 제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나를 아이 취급하는 상대에게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파파파팟-!
분노하는 것과 달리, 창술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
키리누스의 창술은 평소와 똑같이 극한의 유(柔)를 담고 있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창대가 괴한을 휘감았다.
“....?!”
괴한이 흠칫 놀랐다.
키리누스의 창술에 놀란 것이 아니다.
까앙-!
키리누스로부터 물러나 검을 뒤로 세운 괴한이 감탄사를 뱉었다.
그의 검이 어떤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심검이라고?”
괴한의 시선이 크라우젤에게 꽂혔다.
“기(技)와 체(體)를 완성하기도 전에 심(心)을 열었다?”
“.....”
점혈이 막힌 크라우젤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은커녕 기(氣)조차 운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괴한의 의도대로였다.
“재미있군. 그대, 뮐러의 진전을 이었던 게 아니라 독학했던 거였어. 그래서 육체와 기술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한 반면 미칠 듯한 재능으로 깨달음을 반복해 심을 얻었군.”
괴한의 흥미가 키리누스에게서 크라우젤에게 돌아갔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검성이 됐다기에 당연히 뮐러의 진전을 이은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니?
이건 어쩌면 뮐러와 동등한 수준의 재능이다.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무재.’
사실인지 확인해주마.
“멈추시오! 그대의 상대는 나요!”
괴한이 크라우젤에게 다가가려하자 키리누스가 다시 창을 뻗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대나무처럼 유하게 흐르는 그의 창술은 쾌속했고 예측이 불허했다.
하지만 괴한에겐 통하지 않았다.
휘릭-
콰작!!
괴한이 검심을 비틀어 키리누스의 창대를 낚아채자 창끝이 지면에 처박혀버렸다.
“방해하지 마라.”
키리누스에게 향했던 괴한의 관심은 그 짧은 사이에 차갑게 식어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사였다.
‘무슨 위력이?’
유와 강을 동시에 갖춘 검술에 놀란 키리누스가 황급히 창끝을 땅에서 뽑아냈다. 이때 생기는 반발력으로 흔들리는 창대를 채찍처럼 휘둘러 괴한의 하단을 노렸다.
하지만 괴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확인시켜다오.”
파팟!
키리누스의 창대를 밟아 도약한 괴한이 크라우젤의 머리 위로 도달했다. 그리고 히죽 웃더니 크라우젤의 급소 몇 곳을 손가락으로 찔러버렸다.
“크라우젤!”
괴한이 제자에게 위해를 끼쳤다고 오해한 키리누스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를 안심시킨 사람은 의외로 멀쩡한 크라우젤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분은 적이 아닙니다.”
드디어 입을 연 크라우젤이 이어서 괴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선생님을 뵙습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6년 전에 뵌 기억이 있습니다.”
‘탑’과 ‘결사’라는 말은 일부러 피하는 크라우젤이었다.
지혜의 탑이 속세와 엮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눈치껏 행동하는 것이었다.
“과연 영리해서 눈치도 빠르군.”
괴한이 흡족해하고 있자니 키리누스가 소리쳐왔다.
“크라우젤! 아는 자인가!!”
“네, 제자가 한때 은혜를 입었던 분입니다.”
“크음!”
얼굴을 붉힌 키리누스가 콧김을 내뿜었다.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르는 괴한이 크라우젤의 은인이라고 하자 썩 마음에 안 들었다.
괴한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자? 저 창사의 제자로 들어간 겐가?”
“그렇습니다.”
“허! 검성이 창사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황당하게도 괴한이 역정을 냈다.
지금 화를 내야할 사람이 누군데?
키리누스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거의 잘 익은 대추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키리누스는 괴한을 손가락질 할 수가 없었다.
‘필시 전대의 고수다.’
괴한은 초월의 격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키리누스는 초월자에 대한 전승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초월자는 수백 년을 산다고 했으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겉모습과 달리 노괴가 분명하다.’
자존심을 세울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크라우젤과 인연이 있는 듯하니 일단 잠자코 추이를 지켜보는 게 현명하다.
키리누스가 애써 마음을 달래는 사이, 크라우젤은 괴한에게 공손한 태도로 설명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눈치 채셨다시피 저는 스스로 독학하여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보니 깨우치지 못한 기술이 많아 스승님께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드렸고, 스승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뮐러의 진전을 이었으면 되지 않나?”
영웅의 죽음은 세계의 위기와 직결된다.
그렇기에 영웅은 떠나기 전 비급을 남긴다.
후대의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세계를 수호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남겨놓았던 비급이 뮐러에게 계승되었고, 그의 비급은 뮐러로 인해 발전해 세상은 지켜졌었다.
“제 목표는 뮐러를 넘어서는 것이니 뮐러의 진전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허....”
뮐러와 견주는 재능을 지녔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하긴, 환경이 다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역대 최강자라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던 뮐러는 굳이 타인과 경쟁하지 않았던 반면, 뮐러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이 아이는 스스로 확신을 품기까지 긴 증명의 시간을 갖게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성이란 자가 한낱 창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는 검사들의 자존심을 짓뭉갤만한 대사건이었다.
세상 모든 검사들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괴한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혜의 탑의 결사는 속세와 관여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이미 지혜의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속세에 개입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바 있었다.
크라우젤이 내 후인의 후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잠시 들떠 필요 이상의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밝혀진 이상 선은 확실히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뭐, 됐다. 그대가 어찌하든 내가 알 바 아니지.”
퉁명스레 말하는 괴한의 시선이 키리누스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살짝 위축된 키리누스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이때 괴한은 크라우젤에게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선구자여. 지혜의 탑이 그대의 협력을 구한다.]
이제 괴한은 크라우젤을 사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검성이 아닌 선구자로 칭하며, 속세와 지혜의 탑을 잇는 유일한 교두보인 그에게 탑의 입장을 전달했다.
[광룡철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광룡 네바르탄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광물로써 네바르탄을 노리는 다른 모든 드래곤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성질을 지녔다.]
‘....역시 지혜의 탑이로군.’
오직 드래곤을 경계하는 세력답게 그 외 소식엔 너무 취약하다. 아니,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지혜의 탑은 속세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만큼 선구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아직 모르는 듯했다.
“저기, 선생님.”
크라우젤은 전음, 즉 NPC에게 보내는 귓속말 방법을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선구자가 아니라고, 잘못 찾아오셨으니 이만 돌아가시라고 육성으로 말하려는데 괴한이 호통을 쳤다.
[어허! 외부인에게 탑의 사정을 유출할 수 있는 사람은 탑의 수장뿐임을 잊었는가? 제아무리 저자가 그대의 스승일지라도 입 조심하게!!]
“그게 아니라.... 읍읍!”
[잠자코 들으라니까! 그대의 스승이 벌써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않았는가!! 탑의 사정을 외부에 함부로 발설했다간 제아무리 그대라도 체벌을 피할 수 없단 말일세!!]
“읍읍....!”
[조용해!]
“.....”
아, 이 사람.
6년 전 탑에서 봤을 때도 벽창호 같은 기질이 있었다.
내가 검사라는 사실에 흥분해서는 다른 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격해왔었다.
다른 결사들과 달리 속인의 기질이 남아있는 인물이었다.
‘탑이 사람을 잘못 보냈군....’
이자가 오게 된 경위는 뻔하다.
내가 검을 쓰니까 말이 잘 통할 거라며 이번 임무를 자처했겠지.
괴한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크라우젤은 영혼이 가출한 사람마냥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힘으로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수가 없었으니 이젠 될 대로 되라는 태도였다.
크라우젤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만족한 괴한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광룡철이라는 위험한 광물을 속세의 인간 중 누군가가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선구자여, 그대는 그간 속세에서 쌓아온 입지를 이용해 그자를 수색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모든 비용은 당연히 탑에서 처리할 것이며 충분한 보상도 마련해 두었다.]
드디어 용건을 끝낸 괴한이 크라우젤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드래곤이라는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사명을 지닌 인물답게 엄숙하고 결사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크라우젤이 곤란하단 표정으로 키리누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둘 사이에 뭐가 있다고 짐작한 키리누스가 눈치껏 자리를 물러나주었다.
그제야 발언권을 얻은 크라우젤이 사실을 밝혔다.
“선생님, 저는 더 이상 선구자가 아닙니다.”
“....?”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밀려 선구자의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세계가 어찌될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일세. 농담하지 말게.”
“사실입니다.”
“.....”
침묵은 꽤 길게 이어졌다.
장장 몇 분을 무표정하게 서있던 괴한이 이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