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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02화 (992/1,794)

템빨 53권 - 5화

“단장, 단장이 왜 호미를 들고 다녀요?”

“피아로 님은 농부니까요.”

“은퇴, 은퇴하신 거구나....”

도망자의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끔찍한 것인지, 아멜다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직접 체험해왔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예사였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반역의 주체로 지목됐던 피아로의 삶은 우리보다 훨씬 더 끔찍했으리라....

‘크게 다치신 거야. 두 번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됐을 정도로....’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피아로 님은 잘 지내신다고 말했던 메르세데스의 ‘선의의 거짓말’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가혹한 현실일지언정 솔직히 말해주지.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움찔!

황당한 사태 속에서 일시적으로 이성을 상실한 아멜다.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순간 피아로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라플레시아가 처음으로 미동했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두리번거린 녀석이 이내 미친 듯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플라아아아아아아!!

“윽!”

라플레시아가 발광하며 비명을 지르자 그리드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를 찢는 비명과 지독한 악취가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탓이었다.

“자다 깼는데 못생긴 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놀랄 법도 하지.”

라플레시아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는 듯, 혀를 찬 놀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놀은 이미 저 멀리 도망친 상태였다. 뱀파이어는 후각이 발달한 종족이니만큼 라플레시아의 악취를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일행의 선두에 나란히 서고 있었다.

사나운 눈매의 흑발 사내와 차분한 눈매의 백발 여성이 동시에 검을 뽑아 쥐는 모습, 묘하게 잘 어울려 한 쌍 같다.

“회복에 전념하도록. 테루찬 너는 놀처럼 멀리 물러나라.”

“쿠륵. 전사는 도망치지 않는.... 꿱.”

“테루찬이 기절했습니다!”

“주군, 이들은 제게 맡기시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주십시오.”

“아스모펠 너만 믿는다.”

혼란에 빠진 동료들을 뒤로한 그리드가 라플레시아를 노려봤다.

‘지금이 기회다.’

피아로는 말했다.

땅을 팠더니 라플레시아가 잠들어있었다고.

놀은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잘생긴 그리드를 봤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냐고.

그렇다.

라플레시아는 비교적 무방비한 상태다.

바로 지금이 승부처다.

끄덕.

그리드의 눈빛을 읽은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정과 싸울 때의 감각을 상기한 그들이 동시에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허허, 놀랐느냐.”

인자하게 미소지은 피아로가 라플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플라아....?

라플레시아가 비명을 멈췄다.

뾰족한 이가 가득한 입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을 피아로는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귀여운 녀석. 안심하거라. 누구도 너를 해치지 않는다. 음?”

피아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라플레시아의 줄기 굵기가 균일하지 않고 일부분이 한껏 부풀어 있음을 발견했다.

“어허, 뭘 잘못 먹었나보구나.”

-플라?

태어나 처음 느끼는 따스한 손길에 당황하고 있던 라플레시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은 인간의 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인간은 나를 걱정해주고 있.... 아니, 날 죽이려고 한다.

-키에에엑!!

방심하고 있던 라플레시아가 비명을 토했다.

피아로가 자신의 목(?)을 갑자기 크게 조인 까닭이었다.

“조금만 참거라. 끄응!”

라플레시아의 줄기를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녀석에게 속삭여준 피아로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양팔과 허리에 힘을 주었다.

이어서.

콰아아아아아앙!!

허리를 뒤로 꺾은 피아로가 라플레시아를 거꾸로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백드롭이었다.

“....?”

“....?”

피아로가 끝까지 라플레시아를 상냥하게 대하자 공격을 멈췄던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무척 당황했다.

안심하라고, 누구도 널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상대방을 방심시킨 후에 백드롭을 시전하다니?

‘신종 몬스터 사냥법인가?’

물론 대상이 식물형 몬스터이기에 통하는 방법일 것이다.

전설의 농부인 피아로는 식물과 교감할 수 있으니까 그 특성을 활용한 것일 테지.

‘효율적인데?’

나도 언젠간 써먹어봐야겠다.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꿀럭, 꿀럭!

땅에 거꾸로 처박힌 라플레시아의 줄기가 요란하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줄기 속에 들어있는 어떤 이물질이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더니 라플레시아의 꽃잎 부근까지 도달했다.

“좋아. 잘 참았구나.”

덥썩!

라플레시아를 칭찬해준 피아로가 녀석의 줄기를 다시 한 번 끌어안더니 땅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줄기를 꽉 조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라프르르르르르르르!!

라플레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토악질을 시작하자,

푸화하하하하학-!

악취가 진동하는 진액과 함께 라플레시아의 줄기에 걸려있던 이물질이 튀어나왔는데 그 이물질의 정체라는 것이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베니야루!”

라플레시아에게 먹혔던 12테, 베니야루.

끈적거리는 흰 액체에 휩싸인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뜬다.

“허....”

옷을 벗은 피아로가 베니야루의 나신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영양분을 잃은 탓인지 비틀거리는 라플레시아를 어깨에 짊어지며 동시에 베니야루를 부축해주었다.

“괜찮소?”

“....당신.”

따스하고 포근한 흙냄새.

거목의 뿌리처럼 든든한 목소리와 하늘 위 태양처럼 상냥한 눈빛.

이자의 정체를, 베니야루는 알고 있었다.

“피아로....”

허약하고 비열한 엘프 남성들과 다른 ‘진짜 남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이자가 또 한 번 나를 구해줬다.

와락, 피아로의 넓은 가슴에 안겨 든 베니야루가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12테인 자신이 인간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도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

피아로는 말없이 베니야루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겪었던 고통을 지난 수백 년 동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왔을 여자.

애써 강한 척 해왔을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안쓰러운 피아로였다.

그리드는 알림창을 마주하고 있었다.

[퀘스트 <수색>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세계수와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세계수에게 새로운 가호를 받기까지 머지않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베니야루와의 호감도가 최대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베니야루는 당신의 부탁이 무엇이라도 들어줄 것입니다. 단, 청혼만은 예외입니다.]

‘나도 됐거든?’

누가 청혼 한대?

예뻐서 그런지 자의식과잉이 엄청나다. 메르세데스보다 조금 덜 예쁜 주제에.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속으로 투덜거린 그리드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피아로의 여자를 내가 왜.’

그리드는 보았다.

베니야루를 품에 안은 피아로가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모습을.

‘이제 정말.... 이제 정말로 괜찮은 거구나.’

따스한 미소가 그리드의 얼굴을, 무한한 감동과 행복이 그리드의 가슴을 채워나갔다.

과거에 얽매여 복수심만을 불태워왔던 피아로가 다시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하려 했으니 주군으로서, 친구로서, 제자로서 응원해주고 싶었다.

‘칸.’

그리드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보고 있죠?’

당신께서 남겨주신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

엘프족 마을.

언제나처럼 맨발로 뛰어나온 엘프들이 무사히 돌아온 베니야루를 끌어안고 환영해주었다. 특히 젖살도 안 빠져 얼굴이 동글동글한 소녀 엘프는 눈물과 콧물을 다 쥐어짰다.

데루야루였다.

그녀는 다른 12테들과 달리 체통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 같았다.

“라플레시아가 사냥감을 포획하는 찰나에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공기 중에 오랫동안 노출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깊은 땅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사냥할 기회 자체가 적기 때문에 한 번 사냥감을 섭취하면 최대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소화시키려는 습성이 있죠. 사냥감을 포착할 때를 제외하고 항상 동면 상태에 있다고 봐도 무방해요.”

데루야루는 베니야루가 라플레시아에게 먹히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었다.

“오랫동안 멸종하지 않은 것은 그 조심성과 동면이라는 습성 덕분이었군.”

“허허, 불쌍한 아이로고.”

-플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납득하는 반면 피아로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라플레시아를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걔 그러다가 죽을 것 같은데?

그리드는 라플레시아의 잎사귀가 눈에 띄게 시들해졌음을 눈치 챘다.

몬스터가 죽으면 경험치와 아이템을 떨굴 테니 나야 좋지만 피아로는 괜찮은 건가?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주군.”

피아로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청해왔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이 있나이다.”

“부탁?”

킁킁, 그리드가 황소마냥 콧김을 내뿜었다.

늘 은혜를 갚겠다며 희생해온 피아로의 부탁인 것이다.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는 증거와도 같았으니 그리드는 기쁘고 흥분됐다.

“말만 해. 뭐든지 들어줄게.”

꿀꺽.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니야루가 마른 침을 삼켰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던 피아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템빨국으로 데려가 키우고 싶습니다.”

“.....”

베니야루의 표정이 사늘하게 식었다.

그리드는 당황했다.

“식인 식물을?”

“지성이 무척 뛰어난 아이입니다. 제가 잘 교육시킨다면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키우려는 이유는 뭔데?”

“그야 귀엽.... 험험, 땅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뿌리내리는 토양의 성질을 자신에게 적합하게끔 바꾸는 능력이 있음이 분명하며, 그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일 것입니다. 세계수의 숲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비옥한 토지라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이곳의 땅이 비옥한 이유는 세계수님 덕분 아닌가?”

“....또한, 이 아이를 잘 교육시킨다면 침입자들에 대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들의 수호자가 될 것이옵니다.”

“그래.”

“....예?”

“키우라고.”

“정녕, 정녕 소인이 몬스터를 키워도 되는 것입니까?”

“네가 철저히 교육시키겠다며? 나는 너를 믿어.”

“주군....!”

피아로의 본심은 이미 처음에 나왔다.

귀엽다. 그래서 키우고 싶다.

그리드 입장에선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솔직히 말해서 취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리드는 피아로의 바람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피아로가 지금부터라도 다시 행복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마침.

-인간의 관점에선 라플레시아의 생김새가 흉측해 보일 수도 있으나, 라플레시아는 생김새와 달리 착한 아이랍니다. 애초에 그 아이는 악심을 품은 침입자로부터 숲을 지키는 수호자이니까요.

세계수의 울림이 들려왔다.

그녀(?)의 따스한 목소리가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지친 그리드 일행의 정신과 체력을 순식간에 회복시켜주었다.

-이제는 혼자밖에 남지 않아 긴 세월 외로웠을 텐데 좋은 주인을 만나 잘 되었군요.

“아.”

세계수가 라플레시아의 토벌이 아닌 수색을 부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깨닫는 그리드에게 세계수가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영웅왕께서 매번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시는군요. 저는 당신께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답니다.

“.....”

예전 같았으면 그저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칭찬이다.

빛의 여신께서 세계수의 뿌리 위에 대지를 세우셨다.

창세에 그런 구절이 있을 정도로 위대한, 세계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에게 칭찬을 받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의 그리드는 냉정했다.

“제 소중한 동료들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리드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엘프족을 소중히 여기시는 마음은 압니다. 물론 저 또한 어머니와 엘프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프족이 멋대로 벌인 일을 수습하다가 희생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습니다.”

“.....”

어머니께 무슨 불경한 태도냐고 외쳐야할 엘프족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녀들은 눈치 챈 것이다.

“엘프족이 무리해서 대륙 각지의 숲을 점령한 까닭에 인간 세력이 반격을 개시했고 이에 휩쓸린 우리는 큰 화를 겪었죠. 물론 엘프족이 숲을 점령한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인간에게 착취당해온 자연을 수호하고 싶었을 것이고, 엘프족의 권리를 외쳤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제아무리 엘프의 사회성이 결여됐다곤 하나 결코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었다.

12테 중 하나인 레미야루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영웅이자 은인이여.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일체의 반감 없는, 단지 순수한 궁금증으로부터 비롯된 질문.

이에 대한 그리드의 답변은 간단했다.

“앞으로 엘프족은 어떤 행동을 실행하기에 앞서서 내게 보고해주십시오.”

“뭣....”

엘프들이 술렁였다.

이건 마치 복속하라는 뜻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먼 옛날 사하란 제국의 태도와 비슷하다.

“엘프족의 방침을 당신이 정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저 조언을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내 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들이라면 엘프족에게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드를 겪어온 엘프족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리드는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체의 허세조차 없다.

그는 엘프족을 위해서. 더 나아가 자신들을 위해서 제안하고 있었다.

데루야루가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베니야루도 동의했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다른 엘프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인간들의 방식을 모르니까요.”

“이참에 아예 정식적인 수교를 맺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템빨국에 상주하는 게 상호 간 교류에 좋겠어.”

“베니야루가 직접?”

“응, 그게 좋겠어.”

“.....”

새로운 동료가 생길 것 같다고, 그리드는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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