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3권 - 4화
“허억. 허억.”
폭발에 휩쓸려 죽었던 레쉬.
그는 부활하자마자 다시 세계수의 숲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레쉬는 스태미나를 안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숲에 도착하는 것이 그의 지상과제였기에 쉬지 않고 달렸다.
‘내가 잠깐이라도 카일의 시선을 끌어서 틈을 만들어야 돼.’
아주 미세한 틈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변수가 누군가에겐 힘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하지만 0.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도리다.
그것이, 기사다.
“그리드 님!!”
드디어 세계수의 숲에 도착한 레쉬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메르세데스 님!!”
파괴의 흔적을 쫓아 전투의 현장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목청은 커졌다.
“아스모펠 님!!”
레쉬는 필사적이었다.
이정과 카일은 괴물이었으니까.
이정 혼자서도 메르세데스와 호각이었는데 카일까지 부활해버렸다.
그리드 님께도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리드 님....!!”
레쉬는 기도했다.
나의 은인들이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다가 이내.
“아.....”
그는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드 앞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카일의 모습을.
“....??”
“어? 레쉬 님.”
이게 대체 무슨....?
멀쩡한 그리드 일행의 모습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신의 추종자들, 그리고 납작 엎드린 채 벌벌 떠는 카일.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에 놀라 넋이 나간 레쉬에게 그리드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쉬 님도 이들과 함께 행동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드는 레쉬가 듀란달의 기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레쉬, 코크와 함께 무저갱을 탐사하고 얻은 보상 중에는 듀란달과의 호감도 상승도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저 또한 엘프들을....”
레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듀란달 황자의 명령과 카일의 강요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숲을 침략했다. 엘프들을 차마 해치진 못했다.
그런 변명 따위 일체 하지 않았다.
듀란달 황자의 기사가 된 것은 결국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으며, 이곳 세계수의 숲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작은 숲들에서 엘프들을 살해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
레쉬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채 10명도 남지 않은 엘프 생존자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레쉬의 곁으로 의외의 인물이 다가왔다.
생존한 엘프 중 하나였다.
오늘 또 다시 인간에게 소중한 친구와 가족을 잃은 그녀.
인간을 증오하고 저주해야할 그녀가 레쉬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인간.”
“....무슨?”
레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가 내게 감사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는....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당신의 동포들을 해쳤습니다.”
고백하는 레쉬.
그는 질타와 원망에 대비했다.
하지만 엘프는 도리어 그의 손을 더 꽉 쥐어주었다.
“괴로우셨겠군요. 슬프셨겠네요.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저희를 도와주셨던 거군요.”
“.....”
예상치 못한 위로.
당황해서 입을 다무는 레쉬에게 메르세데스가 말했다.
“당신의 외침이 멀리까지 들려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곳의 변고를 눈치 채고 달려올 수 있었던 거죠. 결국 이들을 구한 사람은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12테는 끝까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수의 숲은 넓고 엘프의 숫자는 적어 어떤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가 없다, 따위의 핑계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살아남은 엘프들의 은인은 동포가 아닌 인간. 그것도 레쉬였다.
“.....”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는 레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엘프들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굳이 공을 내게 돌려주는 메르세데스의 배려에 감동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기사 님.”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한 그리드가 웃으며 레쉬에게 악수를 건넸다.
순간 레쉬는 울컥 솟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리드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그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로서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
나의 신념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 사실에 위로 받은 레쉬의 마음이 차츰 치유되어가는 그때.
“저기....”
또 새로운 인물이 레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를 본 레쉬가 기겁했다.
힘의 섭리에 심취해 도리를 잊은 살인마.
하지만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자.
뇌신 카일이 어느새 레쉬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큭...!”
놀란 레쉬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는 순간.
“죄송했습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카일이 머리를 숙였다.
“그, 그리드 전하의 친구 분이신 줄도 모르고 감히 결례를 범했습니다....”
레쉬를 대하는 그리드의 태도는 무척이나 온화한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그리드는 레쉬에게 호감이 있었다.
레쉬를 벌레처럼 밟아 죽이려고 했던 카일 입장에선 자지러질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고 발 빠르게 대처해야만 했다.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었으면....’
레쉬가 매우 놀랐다.
카일의 말투와 태도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 황당했다.
카일이 그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리드 전하, 저는 그럼 이만 돌아가 봐도 되는 겁니까?”
“음....”
그리드가 잠시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카일을 이대로 돌려보낸다는 건 엘프들에게 다소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카일에 대한 엘프들의 원한은 그들 스스로 갚아야할 것이다.
고민을 끝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은 발 기사들의 시선을 의식해 카일의 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무신과 듀란달의 동태를 잘 관찰해라. 혹시 그들이 템빨국에 위해를 끼치려한다면.... 알지?”
“다, 당연합니다. 제가 급히 나서서 수습하거나 전하께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좋아.”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거의 도망치는 기세였다.
눈치를 살피는 검은 발 기사단에게도 돌아가라고 명한 그리드가 끝으로 레쉬를 마주봤다.
“레쉬 님, 저는 당신의 템빨단 가입을 언제라도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많이 부족한 몸입니다.”
레쉬가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드의 스카웃 제안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무저갱에서도, 오늘도 여실히 체험하지 않았는가.
나는 너무 약하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저곳에 있을만한 자격이 내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제게는 모시는 주인이 계시니까요.”
듀란달 황자는 많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세력을 지녔으니 위험했다.
반드시 큰 소동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 또 이번처럼 끔찍한 임무를 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쉬는 주인을 배신할 수 없었다.
기사였기에.
“저는 오늘부터 성장에 매진할 예정입니다.”
레쉬가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강해져서 듀란달 황자께 진언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겁니다. 그때는 제가 듀란달 황자 곁에 남아있는 편이 템빨단에도 반드시 이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해낼 것이다.
당신의 재능과 의지는 대단한 것이니까.
그리드는 이와 같은 뒷말을 삼켰다.
괜히 레쉬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이만.”
끝으로 레쉬마저 떠나자.
“왜 아무도 이들을 돕지 않은 걸까요?”
메르세데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엘프의 사정은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워낙 개체수가 적어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 타인의 임무에 쉽게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특히 12테는 가문을 수호해야하는 입장.
그들은 이처럼 숲의 초입에서 벌어지는 사건엔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경우가 심했다.
전투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며 온갖 파괴가 난무했는데도 12테는커녕 원군조차 없었으니 희생당한 경비병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혹시 어떤 변고가 생긴 걸까요?”
“그건 아닐 거야.”
그리드는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다만 두려운 거겠지.”
“두렵다고요?”
매번 짓밟히는 모습만 보여줬다지만, 엘프는 강한 종족이다.
특히 12테의 실력은 메르세데스도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그들이 대체 무엇이 두려워 동포들마저 외면한 채 숲 속 깊은 곳에 숨은 걸까?
메르세데스가 의문을 품을 때였다.
“12테께서는 겁쟁이가 아니십니다.”
엘프들이 나서서 해명했다.
“다만 어머니 세계수의 명령 때문에 칩거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랬군. 세계수의 명령이었나.”
“전하.... 실례가 안 된다면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습니다.”
“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와 관련이 있어. 고대의 종 중에는 라플레시아라는 녀석이 있는데 그놈이 베니야루를 잡아먹었다는군.”
“베니야루 공 또한 12테 중 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녀가 당했다고?
심지어 다른 12테 또한 당할 우려가 있어 칩거하고 있고?
‘12테 전원이 뭉쳐도 토벌할 수 없다는 뜻....’
라플레시아가 곱등이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꿀꺽, 메르세데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곱등이조차도 진원진기를 소모해서 간신히 토벌했을 정도인데 라플레시아를 상대하려면 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하는 걸까.... 솔직히 두렵고 긴장이 되었다.
“전하, 설마 세계수는 전하께 라플레시아의 토벌을 부탁드린 겁니까? 감히 청하건대 거절하십시오. 전하께서 사지로 향하시는 걸 저는 원치 않습니다.”
메르세데스가 분노를 표출했다.
12테조차 상대가 안 되는 괴물을 그리드에게 토벌해달라고 부탁한 세계수가 그녀는 괘씸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리드가 손사래 쳤다.
“토벌이 아니라 단순히 수색을 부탁 받은 거야. 그래서 이들을 데려온 거고.”
그리드가 스컹크 일행을 소개했다.
탐험가 랭킹 1위 스컹크를 중심으로 뭉친 수백 명의 탐험가 집단이었다.
엘프와 비교해도 도리어 더 예쁜 메르세데스의 미모에 현혹되어있던 그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마,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메르세데스 님.”
그리드가 설명했다.
“라플레시아는 마음에 어둠을 품은 존재들을 현혹해서 양분으로 삼는 종족이라고 해. 그리고 메르세데스 너도 알다시피 엘프들의 마음엔 깊은 어둠이 있어.”
스컹크가 덧붙였다.
“예전에 탐사하면서 발견했던 고대의 식물도감에서 말하길, 라플레시아는 ‘땅 속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합니다. 사냥감에게 은밀히 속삭여 정신을 조작하고 유인한 뒤 불시에 나타나 집어삼킨다고 하더군요.”
12테가 칩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라플레시아는 엘프의 완벽한 카운터였다.
모습을 숨긴 채 엘프를 현혹해 먹어치울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그리드가 아스모펠과 아멜다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들만큼. 혹은 엘프들 이상으로 큰 상처를 입고 마음에 어둠을 품은 그들은 라플레시아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스모펠, 미안하지만 너는 먼저 그들과 왕도로 돌아가 줘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아스모펠이 간신히 대답했다.
카일에게 진 것으로 모자라 이번엔 아예 주군께 도움이 못 된다고 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놀, 너도.”
“....쳇, 알았다.”
놀 또한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그리드가 끝으로 피아로를 찾았다.
그 또한 누구보다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니 라플레시아 수색에 동행시킬 순 없는 것이었다.
이번 수색에 전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메르세데스와 오크 로드 테루찬 둘 뿐이다.
판단하고 피아로도 돌려보내려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뭐야? 어디 갔어?”
피아로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부터 없었던 것 같다.
“설마?”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라플레시아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알게 된 직후인지라 사람들 모두 최악의 상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마, 설마 단장이 당한 거야?”
“아, 안 돼! 피아로 님! 피아로 님!!”
아멜다 일행은 거의 패닉에 빠졌다.
기껏 재회한 우리의 대장이 그새 당했다고?
아직 회포도 풀지 못했는데?
아멜다 일행이 거의 울부짖기 시작할 때였다.
“주군! 주구운!!”
저 멀리서, 피아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헉!”
다행히 아직은 무사한 건가?
전속력으로 내달린 그리드 일행이 잠시 후 피아로를 발견했다.
흙투성이가 된 피아로는 크기가 5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고 기괴하게 생긴 꽃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주군! 소인이 신기한 식물을 발견하였습니다!!”
“.....”
그리드 일행의 말문이 막혔다.
라플레시아.
피아로가 짊어지고 있는 꽃의 이름이었다.
그렇다.
황제 쥬앙데르크가 죽은 이후 혼란을 겪었다가 각성한 피아로의 마음엔 이제 어둠 따위 없었다.
“지반이 이상한 부분이 있기에 호미로 파보았더니 이런 녀석이 잠들어 있지 뭡니까? 정말로 귀엽지 않습니까?”
“.....”
“단장, 단장이 왜 호미를 들고 다녀요?”
아멜다의 질문이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