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000화 (990/1,794)

템빨 53권 - 3화

막 쌓인 눈밭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햇살이 스며들자 투명하게 빛난다. 그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맑고 푸르러 구름 아래 바다 같다.

피부에는 잡티가 없어 흰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고, 오뚝한 코와 분홍색 입술이 조화를 이루니 저토록 아름다운 여성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너무 예쁨.

레쉬의 생중계 영상이 시작됨과 동시에 몰려든 시청자들.

그들은 순백의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화면을 장식하자 넋을 잃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영상 속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실화냐....

정신 차린 시청자들이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혔다.

메르세데스와 이정의 전투 내용만 봐도 ‘그리드 이상’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고차원적이었는데, 갑자기 깨어난 카일이 대폭발을 일으키자 최종보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유명한 전설의 농부조차도 저 카일에겐 상대가 못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카일이 보여준 순간적인 기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아, 이거 망했다.

시청자들이 탄식했다.

카일과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메르세데스가 금세 중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바로 그때.

-우와아아아아아아!!

마왕 그리드가 등장했다.

전류를 휘두르며 메르세데스를 위협하고 있던 ‘최종보스 카일’을 전류 속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그의 모습은 어떤 맹수보다 흉포했다.

그리고.

[email protected]!%#

레쉬의 생중계가 끝나버렸다.

제일 중요한 순간에 중계를 끊다니?

혼자 동영상을 녹화해뒀다가 나중에 유료로 팔아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

천상 기사인 줄 알았던 레쉬도 어느새 방송인이 다 됐다.

이를 간 사람들과 소문을 들은 기자들이 일제히 세계수의 숲으로 달려갔다.

***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최종보스의 위엄을 보여줬던 카일.

하지만 어느새 병풍으로 전락한 그가 조소했다.

‘정신 나간 놈들.’

제국과 템빨국이 혈맹이긴 하다.

하지만 검은 발 기사단은 듀란달 황자의 직속 기사단이며, 듀란달 황자는 지금의 제국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반란분자였다.

바사라 황제와 깊은 관계인 것으로 추정되는 저 괴물.... 템빨왕 그리드가 우리의 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검은 발 기사들은 염두에 둬야하는 것이다.

한데 그들은 도리어 그리드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아멜다 일행을 거두며 배신하지 않겠노라 약조하는 그리드에게 멋지다고, 감사하다고 외쳐댔다.

그들은 ‘전 적기사단의 누명을 벗겨준 사람’의 정체가 그리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그리드를 섬겼으니 정황 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드 전하 만세!”

“그리드 전하, 부디 선배님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검은 발 기사들이 기사가 된 계기는 피아로 시대의 적기사들을 동경해서였다.

실제로 그들은 아스모펠 일행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폭군 카일을 끝까지 외면한 채 마음속으론 도리어 아스모펠 일행을 응원했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삼류 연극의 엑스트라도 네놈들처럼 단순하고 평면적이진 않을 거다.’

카일의 조소가 점차 짙어졌다.

그의 눈에는 검은 발 기사들이 한심하게만 보였다.

언젠간 반드시 적대하게 될 놈들을 영웅마냥 떠받드는 행태가 정상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

아니, 굳이 먼 훗날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카일은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를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검은 발 기사단의 총사령관이 카일이었다.

카일과 검은 발 기사단 모두 당장 그리드에게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입장이라는 뜻이다.

‘바보들이 현실감각 없....’

....아니, 잠깐.

지금 내가 저놈들을 비웃을 처지는 아니다.

“.....”

연신 조소하던 카일이 이내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야말로 한심한 놈이다.’

의미 없는 삶이었다.

그리드에게 한쪽 팔을 잃은 이후,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노라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강해지고자 노력해왔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복수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굴복해버렸다.

세상에 나보다 한심한 인간이 또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여태껏 내가 하찮게 취급해왔던 ‘약자’들 중에서도 나보다 못난 놈은 없었다.

심지어 저 엘프들과 레쉬라는 이름의 말단 기사조차도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않았던가.

반면 나는 신념은커녕 복수심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기껏 쌓아온 힘이 무색하게도 공포심에 굴복했다.

심지어 오줌을 지렸다.

‘이 나이에....’

죽고 싶다.

죽어서라도 제발 소문을 지우고 싶다.

“.....”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의 손.

스스로 움직이는 그 흑금색 손에 사지를 구속당해 있던 카일이 파지직, 전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진원진기를 소모해서 회복했던 그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그럼에도 순순히 묶여있던 이유는 그리드가 두려워서였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죽겠다.’

결심한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꽈앙!

몸에 두른 전류를 일제히 폭발시켜 갓 핸드를 떨쳐낸 카일이 자유로워진 손에 단검을 꺼내 쥐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목에 쑤셔 넣으려 했으나.

콰르르르륵-!

전투의 여파로 대지 곳곳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들이 일제히 격랑을 일으켰다. 그리고 혈류의 기둥으로 변모하더니 카일을 덮쳐 행동을 제지했다.

전개 속도와 위력,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혈마법의 발현이었다.

당황하는 카일에게 어금니를 드러낸 은발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포로 따위가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이런 미친.’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다니?

아니, 그보다 그리드의 부하들은 너무 세다.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 그리고 피아로와 직계 뱀파이어, 오크 로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카일조차도 쉽게 볼 순 없는 상대들이었다.

특히 피아로 저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의 악마적인 재능은 젊었을 때부터 보아왔기에 알고 있다.

카일은 장담했다.

‘확실해.... 그리드는 역시 무패왕 이상이다.’

무패왕의 검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모자라 마법과 청룡의 힘까지 구사하는 괴물.

그는 심지어 무패왕과 달리 혼자가 아니다. 요새 하나를 혼자서 초토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부하를 여럿 거느렸다.

그리드에게 복수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차원이 다른 강적이었다.

“....그래,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마음대로 해라.”

어떤 끔찍한 고문과 수모를 겪을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엔 없다....

깨달은 카일이 모든 걸 내려놓았다.

약자의 비참한 말로를 체험할 각오를 다졌다.

“.....”

저벅. 저벅.

그리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움찔, 몸을 떠는 카일의 몸에 감돌던 전류가 일제히 사그라졌다.

저벅. 저벅.

그리드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카일의 몸 전체가 후들후들 떨렸다. 방광과 괄약근이 느슨해지면서 지릴 것만 같아졌다.

어느새 완전히 하얗게 질린 그에게, 그리드는 질문했다.

“무신은 나를 적대하는가?”

그리드는 무신의 유적지에서 발생했던 돌발 퀘스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신의 추종자, 카일>

난이도:SSS

다섯 기둥 중 하나인 카일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유적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무신을 만났습니다.

무신이 제시한 새로운 무도의 길을 축복이라 믿으며 무신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무신의 명을 받고 당신을 처단하고자 달려온 그와 싸워 승리하십시오.

이런 내용이었다.

난이도 SSS급의 대위기였던 만큼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리드는 카일이 ‘무신의 명령’을 받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찔리는 부분도 많았다.

유신의 무적지에서, 그리드는 무신의 심기를 거슬릴만한 짓을 많이 저질렀으니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무신께서는 당신껣....!”

“.....”

덜덜 떤다 싶더니 혀를 깨무는 카일.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우왕좌왕하는 그의 모습에 그리드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브라함은 역시 대단해.’

카일은 명백히 괴물이다.

<국왕의 검>의 효과는 ‘백성과 병사’를 관찰하는 것. 즉, 일반적으론 아군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지라 카일의 상세정보를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리드는 장담하고 있었다.

이자는 메르세데스, 피아로와 최소 동급이다.

근데 이런 괴물이 내 앞에선 순한 양이 된다. 아니, 순한 것을 넘어서 지려버린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이건 단지 브라함이 일으킨 나비효과다.

브라함이 이자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자에게 최소 2번 이상 죽었을 것이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동안, 카일은 여전히 피를 줄줄 흘리며 말해나갔다.

“무, 무신께서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흥미를 품고 계신 눈치....”

“하지만 너는 무신의 명령을 받고 나를 죽이려고 했었잖아?”

“그, 그건....”

카일은 뭔가를 숨기고 싶은 눈치였다.

계속 그리드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

답답함을 느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자.

“떫....!”

화들짝 놀라 다시 한 번 혀를 깨문 카일이 순간 개방된 방광을 간신히 조이며 말했다.

“제, 제가 당신께 복수할 거라고 말했더니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그러셨을 뿐입니다....”

“....그렇군.”

퀘스트의 전말을 알게 된 그리드가 안도했다.

그리드는 신을 적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까.

신이 아닌 ‘신의 후손’밖에 안 되는 가람에게 증오를 산 것만으로도 귀찮고 위험할 지경인데 신 그 자체에게 증오를 산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카일은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도 특별해.’

대부분의 무신의 추종자는 이성이 없으며 몬스터로 분류된다. 반면 카일은 초네임드급 NPC였고 추종자가 되고도 이성을 유지 중이었다. 그리고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정이 카일을 끝까지 챙기려고 했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무신이 카일에게 꽤나 큰 호감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수준의 호감이겠지만.

‘어쨌든 이 녀석을 죽이면 무신을 적대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어.’

내 손으로 직접 죽이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한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굳이 죽일 필요도 없지.’

카일의 성향은 악에 가까웠다.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냉정해져야할 필요가 있었다.

감정적으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이용 가치가 너무 높다.

“카일.”

잠시 생각해본 그리드가 카일에게 말했다.

“그대는 우리의 혈맹 사하란의 기둥. 우리가 비록 오해 때문에 다투게 되었다지만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

“....!?”

카일은 물론이고 검은 발 기사들까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만 그리드의 기사들은 모두 침착했다. 정작 카일에게 죽을 뻔했던 아스모펠도 동요 없이 조용히 있었다.

그리드를 오랜 시간 섬겨온 그는 그리드의 결정에 반감이나 의문을 품지 않았기에.

결국, 카일 당사자가 질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해로 빚어진 다툼 따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쯤, 당신....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저는 전하의 기사들을 해치려했고 심지어 전하께도 적의를 드러냈던 적이....”

“결국 다 무사하지 않나?”

카일은 그리드를 두려워한다.

뿌리 깊은 공포심 때문에 그리드를 거역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그리드는 이미 몇 번이나 체험했다. 카일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드에게는 있었다.

씨익.

쐐기를 박고자, 그리드는 최대한 여유 있게 웃어보였다. 브라함의 오만한 성격을 재현했다.

“지난 일 따위 잊고 앞으로 잘하면 돼. 만약 또 오해로 인해 같은 실수를 범한다면.... 그때는 기껏 다시 자란 네놈의 팔과 함께 사지를 모조리 잘라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허, 허억....! 아,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기겁한 카일이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궁극의 무도를 탐하는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카일은 힘의 섭리에 충실했으니까.

애초에 거역할 수 없는 최강자를 상대로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렇게, 무신의 추종자 카일은 사실상 그리드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브라함이 만든 스노우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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