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98화 (53권) (988/1,794)

템빨 53권

=======================================

템빨 53권 - 1화

‘쫓겨난 신들에게 의지하지 않았기에 칠악성은 실패했다.’

그랜드 마스터 지크프렉터의 고백이었다.

그는 주장했다.

지금의 신들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쫓겨난 신들을 만나야한다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이 바로 무저갱에 숨어있다고.

쫓겨난 신들이란 대체 뭘까?

그리드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히드라’를 레이드할 수 있는 힘을 쌓으면 가장 먼저 무저갱을 탐사해야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다.

한데.

“쫓겨난 신들이 뭔지 말해!!”

우연히 만난 무신의 추종자가 쫓겨난 신들을 언급한 것이다.

심지어 그들에 대해서 잘 아는 눈치였다.

그랜드 마스터와 달리 부정적인 방향으로.

콰르르르르르르릉-!

그리드의 연(聯)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뻗어나갔다.

수십 줄기의 검격이 이정을 덮쳤지만 이정은 신묘한 보법을 펼쳐 이를 모조리 막아냈다.

필시 막아냈을 터였다.

츠칵-!

‘뭣이?’

깜짝 놀라는 이정.

두건에 가려진 그의 눈가에 칼에 베인 듯한 상처가 새겨졌다.

주르륵, 한 줄기 피를 흘리는 그의 몸 곳곳에 몇 개의 생채기가 추가로 발생하고 있었다.

연의 4회째 타격마다 발동하는 <브라함식 윈드 커터>의 효과였다.

물론 술식이 개량된 윈드 커터는 위력이 매우 약했다. 이정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정은 의외로 동요했다.

‘상상해보지 못했던 경지다.’

검술과 술법이 이토록 완벽한 조화를 이루다니?

그 어떤 최고의 무인도, 그 어떤 최고의 술사도 재현하지 못할 경지다.

‘이게 바로 템빨이라는 무도의 위력인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궁극의 무도 중 하나임이 확실하다.

단언컨대, 위력만 높았다면 큰 낭패를 겪었으리라.

‘무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궁극의 편린을 붙잡다니....’

나의 주군께서는 이미 신의 위용을 갖추셨다, 라고 외치던 메르세데스의 모습을 떠올린 이정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해로운 자다.’

이자를 죽여야 한다.

여기서 싹을 완전히 잘라놓지 않으면 언젠가 필시 큰 위협이 될 것이다.

확신을 품은 이정이 연속적인 전투의 여파로 헐렁해진 구속구를 풀려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푸화하하하학-!

큰 고통이 이정의 등을 덮쳤다.

진정한 화검의 면모를 드러낸 아스모펠의 기습이 성공한 것이었다.

“큭....!”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 놓인 인물들과 힘을 하나로 합칩니다!]

내장을 불태우고 피를 증발시키는 듯한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힌 이정이 이를 악 물고 신법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그리드의 하단으로 파고든 그의 손끝이 그리드의 목젖을 찌르자 그리드의 시야가 아찔해졌다. 최초의 왕 효과로 발생했던 보호막이 단 일격에 깨어져 흩어졌다.

“제길....!”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이정의 강함을 재차 확인한 그리드는 소름마저 돋았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푸우우우욱-!!

“크아아아아아악!!”

그대로 그리드를 제압하려던 이정이 비명을 토했다.

메르세데스의 백호 검이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공통 히든 피스 <협동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금....!’

메르세데스가 벌어준 시간을, 그리드는 놓치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은 그가 검무를 펼쳤다.

“연살화극(極殺花落)!!”

[<협동 스킬>에 포함 된 스킬들의 위력이 240퍼센트 상승합니다!]

협동 스킬.

신뢰하는 인물들과 함께 스킬을 연계할시 발생하는 히든 피스.

그리드는 과거 피아로, 아스모펠, 맥스옹과 함께 놀을 토벌하면서 이 효과를 체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플레이어 최초의 업적이었다.

[당신은 <협동 스킬>의 존재를 최초로 밝혀낸 인물입니다.]

[업적 효과로 당신의 스킬 위력은 260퍼센트 상승합니다!]

연살화극의 기본 효과는 1,850퍼센트의 물리 공격력을 7회 입히는 것이다.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을 보유한 대악마조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인 셈.

협동 스킬의 효과로 인해서 데미지가 몇 배나 급증한 연살화극은 보스 몬스터가 아닌 NPC로 분류되는 이정이 감당할 레벨이 아니었다.

“.....!”

이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실컷 난도질당하는 그의 생명력 게이지가 순식간에 바닥을 기었다.

이미 메르세데스를 상대하느라 온전치 못했던 만큼 대번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쿨럭, 쿨럭....!”

피를 쏟는 이정.

그는 또 다시 연계되는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손을 휘둘러 아스모펠을 떨쳐냈다.

그의 시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약을 꺼내 마시는 그리드에게 꽂혔다.

“정녕 모르는가?”

“쫓겨난 신들? 몰라. 모르니까 묻지.”

“큭....! 큭큭큭....!”

이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떤 자조를 느껴 흘리는 실소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리드가 웃겼다.

파그마의 검무를 계승한 자가 쫓겨난 신들의 정체를 모른다니, 이보다 더한 희극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됐든 다행이다.

쫓겨난 신들의 하수인은 확실히 아닌 듯하다.

그리드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까지 웃던 이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적해 너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대륙이라면 이미 가봤어.”

“그곳엔 환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

움찔, 그리드가 놀랐다.

“불로불사의 인간들이 다스리는 나라지.”

양반.

설마 그들이....?

찢어질 듯이 커진 그리드의 눈을 마주본 이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들이 바로 쫓겨난 신들이다.”

“자, 잠깐.”

양반이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그리드는 이미 체험한 바 있다.

그렇기에 부정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칠악성이 신을 부정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이유는 신들의 원죄 때문이었다.

질투, 배신, 기만 등....

신들이 저지른 온갖 죄가 인류에 해악을 끼치기에 칠악성은 싸웠던 것이며 궁극적으로 칠악성은 인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희망이 고작 양반이었다고?

‘가식’으로나마 인간을 축복하고 보살피는 지금의 신들과 달리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고 쉽게 살육하는 양반 따위가?

삐이이이이이-

그리드의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힌 그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이정을 노려봤다.

“그딴 구라.... 거짓말에 속을 것 같아?”

“핫...! 크하하하!!”

이정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름을 목격한 메르세데스가 몸을 날렸고, 어느새 구속구를 풀어버린 이정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자유로워진 양손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쫓겨난 신들은 인류의 등불이 아니다.”

“.....”

“그들은 단지 약하기 때문에 권리를 박탈당하고 추방됐을 뿐. 지금의 신들로부터 인류를 수호하고자 애쓰다가 쫓겨났다거나 하는, 그런 고상한 존재가 아니야.”

“하지만 칠악성은.... 칠악성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도움이야 당연히 받으면 좋겠지. 칠악성이 그들의 힘을 빌릴 수만 있었다면 그 옛날 신들의 전쟁에서 이겼을 수도 있겠군.”

“....?”

“네 이름이 글드, 라고 했던가?”

“주군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무엇보다도 글드가 아니라 그리드 님이십니다.”

“발음이 안 될 뿐이다.”

끼어드는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짜증스레 막아낸 이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글드여, 네가 무슨 수로 칠악성을 만났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요점을 잃지 마라.”

“....?”

“그들이 쫓겨난 신들을 ‘선’이라고 말하던가?”

“....!”

그런 바 없다.

그랜드 마스터는 단지 쫓겨난 신들의 힘을 빌려야 지금의 신들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 말했을 뿐, 쫓겨난 신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다.

“신은 모두 악이다. 심지어 이 또한 어디까지나 우리들 인간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작은 화분 안에 화초를 가꾸며 때로는 화초의 평안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화초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인간의 마음을 악하다 할 수 있는가? 때가 오면 시드는 화초를 비료로 삼는 인간의 행위를 악하다 할 수 있는가? 세계가 겪어온 역사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사건은 모두 섭리에 불과하다.”

“.....”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동대륙에서 태어난 이정.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양반을 신으로 섬기며 숭배했던 그는 수백 년 전 겪었던 일상을 떠올려보았다.

회상 끝에 도달하는 감정은 분노와 원망뿐이다.

“....지금의 신들이 쫓겨난 신들보다는 낫다. 키우는 화초를 때때로 감정적으로 대하는 주인과 키우는 화초를 꾸준히 학대하는 주인의 차이쯤으로 생각하면 쉽겠군.”

“.....”

비유 한 번 뭣 같다.

자꾸 불쾌해진다.

하지만 너무 적절해서 문제다.

뭐라 대꾸하지 못한 채 도끼눈만 뜨고 있는 그리드를 잠시 빤히 바라보던 이정이 말했다.

“너는 확실히.... 쫓겨난 신들의 하수인 따위가 아니군.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적일 이유는 없다.”

“.....”

“내 이름은 이정. 무신이 제시하는 무도를 탐구해온 삼제 중 하나다. 나는 반드시 궁극의 무도를 얻어 쫓겨난 신들을 토벌할 것이다. 반드시....”

그는 양반에게 어떤 일을 당한 것일까.

몇 번이나 되새기는 이정으로부터 깊은 원한이 느껴진다.

뭐, 가람 그놈의 성격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그리드가 질문했다.

“칠악성은, 선한가?”

그랜드 마스터쯤 되는 인물이 양반들의 성향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협력하려 한다.

단지 지금의 신들을 끌어내리겠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그것은 과연 인류를 위한 행동인가?

도리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 아닐까?

여러 의문이 함축 된 그리드의 질문에 이정이 콧방귀 뀌었다.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나? 결국 네 자신이 판단할 문제다.”

선악의 구분은 입장에 따라서 다르다.

그리드 또한 공감했다.

애초에 칠악성의 성향은 나와 큰 관계가 없다.

이미 나는 한 번 선택한 바 있다.

굳이 신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그래, 알았다. 갈 길 가라.”

일단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이정과 싸워서 희생 없이 이길 자신도 없고.

“아, 카일은 두고 가.”

“.....”

카일을 데리고 떠나려던 이정이 멈칫했다.

나름 많은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굳이 적이 될 필요가 없음을 확인시켰는데도 내 앞길을 가로막겠다고?

“의외로 지혜롭지 못하군.”

적의를 드러내는 이정에게 그리드가 피식 웃어보였다.

“입장은 다른 법이잖아?”

그리드는 살아남은 엘프들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생존자들.

또 다시 인간에게 짓밟힌 그들은 무신의 추종자가 아닌 카일에게 분노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카일이라는 뜻이며, 그리드는 카일에게 책임을 물 자격이 있었다.

대화가 안 된다고 판단한 이정이 메르세데스에게 눈짓했다.

“네 주인에게 전해라. 먼 훗날엔 몰라도 지금의 너희로써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구속구를 풀었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이라면 내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터.

이 싸움은 무의미하다.

단언하는 이정이었으나.

“기사 소환. 피아로, 놀, 테루찬.”

“전하의 부름에 응합니다.”

호미 쥔 농부.

“앗! 자고 있었어! 자고 있었다고!!”

다람쥐마냥 빨간 감자를 입안에 우겨넣고 있는 흡혈귀.

“쿠륵. 속옷. 안 벗는다. 쿠륵.”

누런 팬티 한 장 걸치고 있는 오크.

“.....”

갑자기 빛과 함께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자 천하의 이정이라도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정은 농부를 경계했다.

“알겠다.... 카일은 두고 가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칫.”

환국을 떠난 후에 이토록 많은 굴욕을 겪은 날이 또 있던가.

어이가 없어 혀를 찬 카일이 그대로 떠나려는데 그리드가 붙잡아 세웠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더 묻자.”

“뭐냐?”

“무저갱을 알고 있나?”

“세계의 끝을 말하는 건가? 그야 당연히 알고 있다. 허락 없이 환국을 출입하려면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하니까.”

‘그래서였군.’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서대륙에서 꾸준히 활동할 계획이야?”

이게 중요한 질문이다.

무신의 추종자들은 너무 강했으니까.

특히 이정은 최소 그랜드 마스터급이었다.

이자가 서대륙에서 활동할 경우 우리 템빨국도 여파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

경계하며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이정이 즉각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놀 시간은 없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곳은 아마도 적해 너머 동대륙에서겠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이정의 배려가 딱 거기까지였다.

허공을 밟고 오른 이정은 그리드 일행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놀과 테루찬이 싸우고 있었다.

“네, 네놈, 천한 오크 따위가 감히 내 식량을 빼앗아 먹어?”

“생간. 쿠륵. 같아서. 쿠륵. 맛있다!”

“오냐! 오늘 네놈의 피를 포식해주마!!”

“.....”

영 피곤하다.

그리드가 미간을 어루만지는 동안 피아로는 옛 동료들과 재회했다. 그리고 녹초가 된 스컹크 일행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카일은 인생 포기한 채 가만히 있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죽은 척을 해봐도 메르세데스의 혜안에 모조리 간파 당했으니 무의미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