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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96화 (986/1,794)

템빨 52권 - 22화

“아....”

검성 크라우젤과 템빨왕 그리드가 탄생시켰고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사용 중인 신검.

<천하를 짓뭉갤 고귀한 백호 검>이 자태를 드러내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메르세데스의 피부처럼 희고 투명한 검신은 선(善)과 정의를, 손잡이 부분에 달린 왕관 모양의 너클 보우는 권력과 명예를 상징하고 있었으니 뜻 깊은 예술품을 보는 듯했다.

그래, 예술품.

황제의 대전을 장식할법한.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백호 검은 장식품 따위가 아니었다. 검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전투에 특화되게끔 설계된 전쟁병기였다.

메르세데스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맞물린 그것은, 이상 속 공방일체의 경지를 현실화시켰다.

커으으으으으으응!

“....!?”

백호 검의 포효와 함께 땅이 흔들리고 숲이 격동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시야를 방해하는 수풀, 날카로운 가시덩굴과 울퉁불퉁한 바위.

모든 장애물을 유유히 돌파하던 무신의 추종자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단 한 명.

두건으로 눈을 가린 것으로 모자라 양손에 구속구를 찬 사내 한 명만이 허공을 답보해 균형을 지켰다.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메르세데스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앙-!!

백호 검과 구속구가 충돌한다.

이어서 발생하는 충격파에 대지가 다시 한 번 출렁였다. 거센 폭풍이 주변의 수풀을 뿌리 채 뽑아냈고 거목을 뒤흔들었다.

신의 격노가 세상을 덮친 듯한 광경이다.

‘이게 바로 전설의 기사....!’

레쉬와 검은 발 기사들이 침음했다.

이 순간 그들은 개안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존이라 믿었던 카일조차도 사실은 메르세데스의 아래였음을 깨달으며 우물을 벗어났다.

그들은 메르세데스의 움직임과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단 하나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해하는 순간 자신의 경지가 급격히 상승할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쩌정-!

메르세데스의 속도는 카일처럼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을 초월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레쉬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어야 정상인 속도였다.

한데 이상했다.

레쉬는 메르세데스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너무나도 정교하기 때문에 도리어 명확히 보이는 것이다.

물론, 100번의 움직임 중 하나 정도가.

더군다나.

“흡....?”

양손을 꽁꽁 묶고 있는 철판을 휘둘러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연속해서 방어하던 추종자가 희미한 신음을 터뜨렸다.

무조건 정직한 궤도로 날아오는 메르세데스의 공격을 쉽게 여기다가 낭패를 겪은 것이다.

메르세데스의 검술은 마치 세계수와도 같았다.

거대한 기둥은 올곧게 뻗어있었지만 그 끝에는 수백, 수천 개의 가지가 달려있었으니 변화무쌍했다.

첫 초식의 단순함에 현혹되어선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쾅!!

추종자의 몸은 이미 멀찍이 날아가 둘레가 족히 5미터가 넘는 거목을 하나 꿰뚫고,

콰쾅!!

그 뒤에 있는 거목을 또 하나 꿰뚫고,

콰콰쾅!!!

이어서 4개의 거목을 추가로 꿰뚫은 다음에야 멈췄다.

기사들은 그가 꿀럭, 붉은 피를 토해내는 모습을 분명히 목격했다.

한데.

쩌정-!

추종자는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메르세데스에게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카일을 지키는 추종자들을 돌파하고 카일의 목을 베기 일보직전이었던 메르세데스가 그 탓에 실패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믿기지 않는 기염을 토해낸 추종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대가 이 대륙의 최강자인가.”

질문 따위가 아닌 확신이었고,

“아니요. 저보다 강한 사람은 제가 알기로만 셋인 걸요.”

메르세데스는 부정했다. 서대륙 또한 넓다고 은연중에 말했다.

추종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의미 없는 신탁은 없다라.”

“.....”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추종자는 갑자기 지진을 일으킨 것으로 모자라 공격과 방어에 모두 특화 된 여기사의 ‘검’과 변화무쌍한 검술을 견제할 방법을 궁리했고, 메르세데스는 눈앞의 존재들이 ‘무신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간파하며 그들의 ‘이성’을 경계했다.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발견 됐던 무신의 추종자들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 사용하는 기술들을 보아 이들 또한 무신의 추종자가 확실하겠지.’

힘의 섭리에 심취해 있던 카일의 모습과 그런 카일을 ‘신탁’을 받아 도우러 왔다는 이들의 발언 등을 모두 종합해 봤을 때 가능성은 99.9퍼센트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사실은.

‘사원의 추종자들은 이성이 없었어.’

갈구노스의 사원을 배회하는 무신의 추종자들의 실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습득한 비급의 개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이성이 없다는 말은 즉 본능에 따른다는 뜻.

오직 비급에만 집착하는 사원의 추종자들은 기술을 응용하는 능력과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고 조절해 변수를 유발하는 능력 등, 머리를 써야하는 모든 부분에서 약세를 보였고 그렇기에 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성이 존재했다.

심지어 사원의 추종자들보다 더 많은 비급을 습득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쉽게 봐선 안 돼.’

특히 구속구를 착용하고 있는 추종자.

저자는 눈을 가린 것으로 모자라 양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음에도 카일 이상의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백호 울음>에 당해줬던 다른 추종자들 또한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처음에만 잠시 방심했을 뿐이지, 이후 보여주고 있는 몸놀림이나 태도가 모두 수준급이다. 최소 이멜다와 동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거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메르세데스가 경각심을 품었다.

단지 상대가 강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장소의 특이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곳.

세계수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메르세데스는 경험해 봤으니까.

고대의 종.

나의 진원진기를 소모하게끔 만들었던 난적이, 이곳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

이곳에서의 방심은 곧 죽음으로 직결되리라....

철컥.

생각하며, 메르세데스는 기수식을 취했다.

‘되도록 빨리 승부를 내야겠어.’

듀란달을 배후에 둔 카일의 성향과 그를 비호하는 추종자들의 태도는 언젠가 반드시 전하께 해가 될 터.

확신한 메르세데스는 이 순간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다.

카일과 그를 비호하는 추종자 전원을 처리할 것.

주군을 위한 일이다.

나의 목숨을 아껴선 안 된다.

“이멜다 님, 다른 두 분과 함께 아스모펠 님을 모시고 먼저 떠나주세요.”

청한 메르세데스가 왼 팔을 뻗으며 한 바퀴 회전했다.

이때 그녀의 오른 손에 쥐어진 검은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쩌엉-!

백호 검이 구속구를 찬 추종자를 공격했고, 추종자는 이를 막았지만 목덜미를 덮쳐오는 메르세데스의 왼 손을 자각하고 급히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동시에 다리를 뒤로 올려 학처럼 뻗은 그는 메르세데스의 안면을 짓뭉갤 작정이었으나.

쿵!

구속구에 맞물린 백호 검의 무게가 갑자기 급격히 증가하자 견디지 못하고 자세를 무너뜨렸다.

이어서.

콰자자작!!

돌기둥이 솟구치며 추종자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이거?’

이어지는 후속타까지 얻어맞은 추종자가 살짝 동요했다.

‘설마 백호의 정기가 깃든 병기인가?’

사신수의 숨결로 만든 병기는 동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기보다.

어찌 그것이 서대륙에 있는가?

채챙-!

콰르르르르릉!!

치열한 공방이 지속됐다.

결자해지한 메르세데스는 추종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추종자도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가린 이유는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수련의 일환.

도리어 덕분에 메르세데스의 검술에 빠르게 적응하며 백호 검의 변수에 주의했다.

꽈과광!!

급기야 서로의 절기가 맞부딪치자 격랑이 발생했다. 기의 충돌이 두 사람 모두를 휩쓸었다.

휘청!

한 걸음 물러선 추종자가 격양 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이름은 이정! 한때는 쫓겨난 신들을 섬겼으나 이제는 무신 제라툴을 섬기는 삼제 중 하나이다!!”

추종자와 마찬가지로 한 걸음 물러선 메르세데스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뒤 응했다.

“저는 메르세데스. 위대하신 그리드 전하의 기사입니다.”

쩌정-! 쩌저저저정!!

이정의 구속구와 메르세데스의 백호 검이 수차례 다시 충돌한다.

그리고 이내 맞물렸다.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갔다.

“무신께서는 그대 같은 무재를 아끼신다. 그대 또한 무신을 만났을 터. 무신이 제시한 궁극의 무도를 엿보았을 터다. 한데 왜 무신이 아닌 인간을 섬기는 것이지? 소위 말하는 기사의 긍지 때문인가?”

“궁극의 무도보다는 궁극의 템빨이 더 위대해 보이더군요.”

“템빨?”

“이미 신과 같은 위상을 갖추신 제 주군의 능력이죠.”

“신과 같은 위상? 하핫! 재밌는 농담이군!!”

“농담이 아닙니다. 그리드 전하께서는 당신이 섬기는 신을 초월하시게 될 거에요.”

“오만함이 하늘을 찔러 미친 수준에 이르렀구나!”

“당신이 섬기는 신이야말로 오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지 않나요? 궁극의 무도? 어떤 농부가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감히 궁극을 자처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 미쳤군.”

꽈광!

이정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수련의 일환으로 눈을 가린 상태라 엿볼 순 없으나, 그는 알 것 같았다.

메르세데스.

지금 나와 겨루고 있는 기사는 필시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을 테지.

진정한 무인이란,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단련하고 수련하여 궁극을 엿봐야 한다는 낡고 광오한 사상을 지닌 채 말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편협하다.’

인간은 신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체험하고, 좌절해 보았다.

그렇기에 차라리 무신을 따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다.

“흑살광격.”

──!

보기 드문 인재다.

편린을 통해서 무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면 동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은 이정이 스킬을 전개하자 메르세데스의 시야가 암전됐다.

온통 암흑뿐인 세계에 섬전이 스친다 싶을 땐 이미 이정의 권이 그녀의 명치를 꿰뚫고 있....

....어야 정상이었다.

“....?!”

흠칫 놀란 이정이 주먹을 회수하고 도약했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예리한 검광이 그의 한쪽 발목을 끊어놓았다.

이정의 음성이 떨렸다.

“혜안....!? 혜안을 지녔다고!?”

두 눈을 가린 이정이 감각을 연마하는 궁극의 목표는 심안을 개화시키기 위함이다.

한데 심안보다 상위에 있는 경지를 이미 지닌 자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흥분한 이정이 소리쳤다.

“멜세데여! 그대에게는 궁극의 무도를 개척할 자격이 있다! 그대는 고작 인간 아래 있어선 안 되는 존재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제 이름은 메르세데스에요.”

“알고 있다! 발음이 잘 안 될 뿐이다! 아니, 논점을 흐리지 말라!”

“그리고.”

“....?”

처음부터 끝까지.

카일이 한창 위용을 선보였을 때도, 아스모펠이 피아로의 힘을 재현했을 때도, 무신의 추종자들이 개입했을 때도, 심지어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을 때도 변치 않던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담담했던 그녀의 얼굴 위로 노기가 서렸다.

“자꾸 은근히 제 주군을 비하하지 마세요.”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가 새로운 기사도를 세웁니다.]

“당신이 섬겨온 신들보다 나의 주군께서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만류귀종. 결국 끝은 템빨로 향하게 되어있으니까요.”

“....?”

“궁극의 무도도, 마도도.”

결국.

“템빨 아래 평등하다는 거예요.”

[당신의 기사 ‘메르세데스’는 앞으로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으며 착용하는 아이템의 성능을 15퍼센트 향상시킵니다.]

“저를 설득할 생각일랑 관두세요.”

“.....”

대체.

대체 자꾸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이정은 도무지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자 템빨이라는 개소리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당장 알고 싶었다.

한편.

파직! 파지지직!!

추종자들의 비호 속에서 카일은 회복하고 있었다.

오늘날 입은 굴욕을 떨쳐내야만 정진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급기야 진원진기마저 소모한 것이다.

‘힘의 섭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나약한 주제에 고귀한척 구는 엘프들.

되도 않는 긍지를 외치는 기사들.

내게 굴욕을 안긴 아스모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메르세데스.

카일은 이 자리의 모두가 마음에 안 들었다.

“모조리 죽어라!!”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끝내 회복한 카일이 전력을 다해서 전류를 방출하자 일대의 모두가 휩쓸렸다.

엘프와 기사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고 아스모펠을 부축하고 있던 전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위기를 느꼈다. 재빨리 방패를 세우고 검기를 두른 메르세데스조차도 쉽지 않음을 직감할 정도였다.

레쉬는 이미 사망하고 있었다.

‘제....기랄.....’

플레이어의 성향은 각기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보다 쉽고, 편하고, 즐거운 게임 환경을 원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나의 의도를 읽어주지 않을까?

사망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강제 로그아웃되는 바.

여태껏 모든 상황을 녹화하고 있던 레쉬가 동영상 촬영을 녹화가 아닌 생중계 형식으로 바꿔버렸다.

그러자 그의 계정에 연동돼 있는 유X브 개인 방송국이 활성화 되면서 그가 지켜보는 잿빛 풍경이 실시간으로 세상에 전파됐다.

몰려드는 시청자들.

그중 누군가가 이곳으로 찾아와 다음 상황을 중계해주길.

듀란달 황자의 야욕과 카일의 위험성을 세상에 경고해주기를.

레쉬가 바라는 그때.

채챙!

채채채채챙!!

메르세데스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욱 강해진 카일과 협력한 추종자들이 동시에 압박해오자 제아무리 메르세데스라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그녀의 흰 머리와 피부가 점차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안.... 되는데....’

메르세데스는 우리를 도와준 은인이다.

또한 그녀는 전설의 기사이기에 앞서서 그리드 님의 기사이다.

그녀를 죽게 놔둘 순 없다.

나라도 다시 와서 도와야한다.

도움은 안 될지라도, 그래야한다.

‘로그아웃....’

강제 로그아웃 시간까지 버티려던 레쉬가 자발적으로 로그아웃을 외치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한 줄기의 벼락이 현장에 난입했다.

카일의 전류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전류 속에 숨어있는 카일을 끄집어내어 관통해버리는 진정한 뇌신의 힘이 기껏 회복했던 카일을 다시금 피토하게 만들었다.

지존.

플레이어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초월의 경지에 오른 흑발 사내의 모습이 꺼져가는 레쉬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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