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21화
네가 나보다 강하므로 죽이겠노라.
아스모펠의 선언에는 심각한 어폐가 있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은 강자의 권리인 바.
약자 따위가 생사여탈을 논하다니, 황당함을 넘어서 분노가 솟구칠 지경이다.
‘감히 힘의 섭리를 부정하는가. 이는 무신에 대한 불경이다!’
무신의 기적을 체험한 시점부터.
아니, 무신이 제시한 궁극의 무도를 엿봤던 시점부터 카일은 이미 광신도로 변해있었다.
도의와 법치는 무력 아래다.
이와 같은 무신의 가르침에 완전히 교화된 그는 오직 무력만을 숭상했다.
‘내가 네게 섭리를 가르치겠다. 너는 죽음으로서 배워라.’
이를 갈며 벼르는 카일.
그는 걱정할 변수가 없다고 장담했다.
아스모펠의 칭호 <화검>에서 화(華)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아스모펠의 검술은 꽃을 피울 때가 아니라 불꽃 같은 광채를 불사를 때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하며, 주의만 기울인다면 우리의 실력차이를 감안해봤을 때 당할 일은 없다.
꾸둑. 꾸두두둑....!
칼집에 맞아 함몰됐던 카일의 한쪽 눈이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실처럼 피어오르는 전류가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어주었다.
이미 오래 전에 잃었던 팔을 재생시킬 때처럼 절정의 심법을 응용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무신 덕분에 익힐 수 있게 된 힘.
말 그대로 기적이다.
‘화의 수법은 체력의 소모가 워낙 커서 비장의 한 수로 숨겨뒀던 것일 테지만.’
어림도 없다.
내겐 통하지 않는.....
“무상농법.”
“....?”
회복 된 시야를 확인하며 아스모펠을 경계하던 카일이 귀를 의심했다.
무상검법.
그것은 피아로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져온 절기다.
피아로를 상징하는 힘이었다.
아스모펠이 무상검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너무 당황해서 잠시 착각했는데, 무상검법이랑 좀 다른 이름이었던 것도 같다.
찰나.
카일의 사고가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변화식.”
아스모펠은 1인자의 힘을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
“....이게, 무슨?”
파직! 파지지직!!
메르세데스의 개입에 대비, 사방팔방에 거미줄처럼 펼쳐놓았던 카일의 전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험의 경고였다.
“....!?”
숲이 어둠에 침식됐음을 한 발 늦게 자각한 카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기둥을.
‘줄기?’
장미의 줄기가 수천, 수만 배 부피를 키우면 저러한 형태일까.
일대를 뒤덮으며 떨어지는 기둥에는 수천 개의 가시가 달려있었다. 살짝만 스쳐도 몸이 양단날 것이 분명할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가시들이었다.
“괴상한 수법을 익혔구나!”
2인자의 저력.
1인자를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이 개화시킨 아스모펠의 고유 특성은 카일도 모르는 힘이었다.
하여, 아스모펠이 재현 중인 농법(?)의 근간이 피아로임은 상상도 못한 그는 도리어 안도했다.
그러면 그렇지.
저놈이 피아로의 절기, 무상검법을 사용할 리 없지.
어디서 이름만 비슷한 괴상한 기술을 익혀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가?
파직! 파지지지직!!
흥, 콧방귀 뀐 카일이 백열했다.
전류를 방출하며 공격용도와 추진력으로만 사용해왔던 그가 처음으로 전력을 선보였다.
그 자체가 전류가 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한 발 늦게, 카일의 머리 위로 기둥이 떨어졌다.
카일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킨 그것은 반경 약 20미터의 숲을 통째로 짓뭉개버렸다.
“어.... 어어....?”
“.....”
<혜안>을 지녔기에 아스모펠의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던 메르세데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말을 잃었다.
아스모펠이 강한 건 알았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한낱 인간의 힘으로 재해를 일으킨 아스모펠의 저력에 검은 발 기사단은 물론이고 전 솔로 넘버 나이트들마저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플레이어 레쉬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저분도 농부였어?!’
무상농법.
조회수 수십억을 자랑하는 벨리알 레이드 영상에서 전설의 농부 피아로가 선보였던 극의.
그것을 설마 아스모펠도 사용할 줄이야....
템빨국은 농부 양성소인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전 솔로 넘버 나이트들도 머잖아 농부가 되는 걸까?
레쉬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였다.
“허억.... 허억.... 엘프들을 피신 시켜라.”
침묵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스모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녀석을 죽이지 못했다.”
동시에.
번쩍!
벼락 한 줄기가 날아든다 싶더니 아스모펠의 가슴을 관통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번쩍! 번쩍! 번쩍!
벼락은 몇 번이고 연달아 내리쳤고 그때마다 아스모펠의 몸이 넝마가 되었다.
급기야.
털썩!
아스모펠은 실 끊어진 인형마냥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폭격이 멈췄다.
파직!
아스모펠의 곁에 멈춘 백광이 점차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 싶더니 손이 뻗어 나왔다. 아스모펠의 금발을 우악스럽게 거머쥐는 그 손은 카일의 것이었다.
“네놈이 내게 온갖 수모를 안기는구나. 약한 주제에.... 약한 주제에!”
꽈득!
카일이 이를 갈았다.
전류를 떨쳐내고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의 몸은 절반 가까이가 뭉개져 있었다.
카일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신체를 전류화 시키면 물리력에 개입 받지 않으며 모든 속성 저항력이 대폭 증가한다.
이와 같은 공식이 성립되기에 기둥에 맞아도 멀쩡할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검기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기운의 집약체였던 기둥은 전류화한 카일에게도 중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당연하다.
아스모펠이 재현한 피아로의 강기는 자연의 힘 그 자체.
대악마의 육체마저 소멸시켰던 힘이니 카일이라도 온전히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다.
“크아아아아아!!”
카일이 포효했다.
나보다 약한 상대에게 죽을 뻔했다.
힘의 섭리를 설파해야할 내가 도리어 힘의 섭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위대한 무신께 불경을 범한 셈이다.
무신께서 내게 실망하실 것이 분명하다.
두 번 다시는 궁극의 무도를 제시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
“놈....! 네노옴!!”
온갖 불안과 분노가 카일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는 아스모펠에게 진심어린 살심을 품었고, 거침없이 살수를 펼쳤다.
아스모펠의 목에 전류로 만든 창을 꽂아 넣었다.
물론, 그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메르세데스가 나선 까닭이다.
꽈장-!
검기에 둘러싸인 방패가 전류의 창을 막아냄과 동시에 궤도를 바꾸더니 카일의 턱을 때린다.
이어지는 후속타는 회전력이 실린 발차기였다.
털썩!
“.....”
턱과 뒤통수를 연달아 얻어맞고 죽은 개구리마냥 자빠진 카일의 모습이 여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 명의 솔로 넘버 나이트와 아스모펠을 홀로 이긴 것으로 모자라 재앙으로부터 살아남는 기염을 토해낸 그가 이토록 쉽게 당하다니?
‘....아니, 쉽게 당할 리 없다.’
검은 발 기사단이 부정했다.
카일이 죽기를 바라고 있는 레쉬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큰 상처를 입고 흥분해서 잠시 방심한 건가?’
역시나.
“크윽....! 제길! 빌어먹을! 하나 같이! 하나 같이....!”
카일은 용수철마냥 다시 벌떡 일어났다.
눈에 핏대를 세운 그가 왼쪽 팔 전체를 전류화시켜 채찍 삼아 휘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쉬와 검은 발 기사단은 그저 ‘메르세데스의 머리에 어느새 벼락이 꽂혔다.’라고만 인지했다.
그 벼락을.
쩌엉-!
메르세데스는 방패를 세워서 막아냈다.
“이런 미친!”
쩌엉! 쩌엉! 쩌엉!!
카일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발 기사들이 보는 풍경에는 연신 벼락이 번쩍였다.
종국에는 수십 줄기의 벼락이 동시에 생성돼 메르세데스의 전 방위로 날아갈 지경이었다.
한데.
“.....”
메르세데스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작은 정전기조차 허용하지 않았다는 듯이, 결 고운 백발은 처음 모습 그대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카일의 말문이 막혔다.
음속에 가까운 전격을 모조리 막아내는 메르세데스의 순발력과 민첩성이 황당했고, 물체를 관통하고 감전시키는 자신의 전류가 고작 방패 하나에 무효화되고 있었으니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철제 방패 아닌가.
‘전류를 검기로 상쇄시킨다 해도 잔류는 남아야 정상이다.’
잔류가 방패로 스며들고, 급기야 갑옷까지 전이되어 메르세데스를 감전시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야만 했다.
한데 왜 모조리 차단당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어 심화되는 혼란 속에서, 발악적으로 계속 채찍을 휘두르던 카일은 문득 깨달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아....”
카일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갈비뼈가 모조리 뭉개져 홀쭉하게 들어간 허리가 반쯤 찢겨나가 있었다. 덜렁거리는 왼쪽 어깨 아래로 백골이 드러나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본능에 의거, 대부분의 전류가 상처 회복에 투자되고 있었으니 공격력이 약화될 수밖에.
심지어 상대가 혜안의 기사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점을 공략당하고 있었으리라.
‘이건 안 된다.’
승산이 없다.
아스모펠에게 이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는다는 건 계산에 없었다.
비틀.
한 걸음.
비틀.
두 걸음.
카일이 메르세데스로부터 천천히 물러섰다.
그는 계산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오만한 12테라도 이쯤 되면 방관을 관두고 달려오고 있을 터.’
12테는 엉덩이가 무겁다.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자신의 자리를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숲이 크게 훼손 된 지금이 바로 특별한 경우 중 하나였다.
‘어서 이곳을 떠야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검은 발 기사들을 방패삼으면 메르세데스 한 명의 추격쯤이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12테들에게까지 포위당하면 진원진기마저 소모해야할 것이다. 서둘러야한다.
“퇴각한다. 시간을 벌어라.”
카일이 명령하자.
“....싫습니다만.”
“....??”
검은 발 기사들이 명령을 거부했다.
당황한 카일이 소리쳤다.
“나는 듀란달 전하의 대리인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너희들의 주인인 셈이다! 너희는 기사임에도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가!!”
격노하는 카일의 기세가 흉흉하다.
움찔하는 검은 발 기사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레쉬였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기사의 도리를 어겼습니다. 바로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죠. 이제 와서 또 한 번 도리를 등지는 일쯤, 어렵지 않습니다.”
“도리를 논할 게 아니라 반역이다! 듀란달 전하가 네놈들을 살려둘 것 같으냐!”
“여기서 싸워봤자 죽는 건 같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무의미한 살육을 피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레쉬와 검은 발 기사들이 주변을 살폈다.
엘프들이 활을 겨눠오고 있었다.
메르세데스 일행이 나타난 시점부터 그들은 이미 포위되어 있던 것이다.
어차피 살아남을 길은 없다.
“괘씸한 놈들.... 네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주마....”
나는 어차피 죽지 않는다.
기사들을 방패로 삼을 수 없게 된 이상 큰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결국 도망칠 수 있다.
파직-! 파지지직!!
카일이 진원진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하자 그를 감싸고 있는 전류가 전에 없는 기세로 커져갔다.
바로 그때.
슈슉! 슈슈슈슈슉!!
회색 무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카일의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 같이 두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 그 꼴이 기이했다.
“카일이여. 우리는 신탁을 받아 그대를 구하러 왔다.”
서대륙에서 활동 중인 무신의 추종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경이로운 경공술을 발휘한 그들은 그대로 카일을 데리고 떠나려 했으나.
“당신들, 도망 못가요.”
유리처럼 하얗고 투명한 검을 뽑아 쥔 메르세데스가 추종자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커으으으으으으응!
“....!?”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숲을 격동시켰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시야를 방해하는 수풀, 날카로운 가시덩굴과 울퉁불퉁한 바위.
모든 장애물을 유유히 돌파하던 무신의 추종자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