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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93화 (983/1,794)

템빨 52권 - 19화

바사라가 황제로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의 지난 과오를 시인하고 사죄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과거의 제국에는 내가 없었다. 과거의 제국이 저지른 모든 악행과 잘못, 그리고 실수는 내가 범한 것이 아니다. 내게는 그저 지나간 역사일 뿐이다....

이와 같은 핑계들로 지난 세대의 잘못을 외면하고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다면, 제국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들은 누구에게 위로 받고 원한을 달래겠는가?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뿌리내린 상처는 누가 지워줄 수 있겠는가? 그들과 함께 미래를 논할 수 있겠는가?

대륙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서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한다는 사실을, 바사라는 알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검은 발 기사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얼굴 중앙에 세 줄기의 검흔이 아로새겨진 여성, 왼쪽 귀가 없는 키 작은 남성, 양쪽 눈 색깔이 다른 노인.

구형 레드 아머를 무장하고 있는 그들의 정체를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아멜다, 켄트릭, 단테.

그들은 피아로와 함께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솔로 넘버 나이트.

검은 발 기사들의 우상이었던 용사들이다.

“감사드립니다.... 빛의 여신께 감사드립니다....”

기사들이 갑자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격에 떨고 있었다.

새 황제 바사라가 밝혔던 진실 덕분에 그들 또한 알게 된 것이다.

피아로와 적기사단은 반역자가 아니었음을.

그들은, 여전히 영웅이었다.

“아멜다 경! 켄트릭 경! 단테 경!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급기야 무릎까지 꿇은 기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그들의 눈시울은 붉게 젖어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역자로 내몰린 영웅들.

평생을 헌신했던 조국에 배신당하고 가족을 잃은 그들이 지난 세월 동안 겪어왔을 분노와 증오, 슬픔을 기사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조국에게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게끔 존경하는 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을 뿐이다.

아멜다가 헤헤 웃었다.

“뭐야, 뭐야? 진짜였네? 우리 누명 완전히 풀렸네?”

켄트릭은 침중한 목소리로 읊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던 놈들이 이제 다시 선배 취급이라....”

“.....”

단테는 침묵했다.

셋 모두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도리어 황당하고 불쾌한 기색이었다.

당연하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누명이 풀렸다고 해봤자 반가울 리 없다.

함께 기뻐해줄 가족도, 동료도 이제는 남지 않았으니까.

남은 것은 원한 뿐.

우리에게 검을 겨누고 우리의 가족을 해쳤던 제국의 모든 병사와 기사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진정하세요.”

웃는 낯으로 살기를 피어 올리는 아멜다를 제지하는 메르세데스.

이미 그녀는 상황 파악을 끝내고 있었다.

‘바사라 황제는 제국에 피해를 입었던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진행하고 있으니 제국의 국고가 텅텅 비어가고 있을 터. 온건파가 그녀를 비난하며 듀란달에게 붙었고 그 과정에서 카일까지 손에 넣은 듀란달이 타 왕국들과 교섭하기 위해서 엘프 처단을 선택한 거군.’

이처럼 완벽한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메르세데스가 듀란달 황자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번째 기사였던 만큼 황족과의 만남이 잦은 편이었고, 듀란달의 성격 상 바사라를 인정할 리 없었으니 상황을 통찰하기가 쉬웠다.

‘싸움을 피할 수 없겠어.’

과거, 내 주군 그리드께서는 엘프들을 지키고자 싸우셨다.

주군께서 지켜낸 그들을 지키는 건 나의 당연한 소명이다.

생각한 메르세데스가 카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섯 기둥 중에서도 유난히 쥬앙데르크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

당시에는 기둥 중 최약체로 평가받았으나 잠재력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사람이다.

‘전보다 많이 강해졌을 테지. 신중하게 상대해야한다.’

템빨국과 제국은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본래 서로 싸우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템빨국과 동맹을 맺은 주체는 바사라 황제이며, 듀란달 황자는 바사라로부터 황좌를 뺏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듀란달 황자의 부하들과 싸워도 국제 문제로 번질 우려는 적다.

메르세데스가 계산을 끝내는 순간.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는 관둬라.”

메르세데스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 또한 상황 파악을 끝낸 눈치였다.

“10년 넘게 폐인으로 허송세월한 퇴물 주제에 여전히 나를 애송이 취급하는가.”

잠시 굳어있던 카일의 얼굴에 여유가 돌아왔다.

전류를 흘리며, 근엄한 표정과 말투로 아스모펠을 쏘아붙였다.

아스모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를 내려다본 적도, 애송이 취급한 적도 없다. 다만 정말로 많이 컸기에 감탄했을 뿐이야.”

아멜다가 끼어들었다.

“헤헷, 헷. 맞아. 카일은 또래보다 왜소했었잖아. 근데 이젠 완전히 어른이 됐네. 그건 그렇고 안 어울려. 카일은 모범생 아니었어? 항상 모두에게 존댓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었잖아? 근데 그 말투랑 표정은 뭐야? 응, 응? 못 본 새 높은 사람이 된 거야?”

“그게 애송이 취급이라는 거다. 아멜다, 당신은 전혀 변하질 않았군. 다 늙은 할망구 주제에 여전히 애 같은 말투를 쓰다니, 수치심을 모르는가? 아니면 도망자로 지내는 동안 머리라도 다친 건가?”

“뭐어? 나는 아직 삼십, 삽십대라구! 할망구 아니야!”

“큭....! 큭큭큭!”

카일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긴장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해보았다.

피아로가 이끌었던 적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제국의 기둥이었던 아스모펠, 다섯 번째 기사 아멜다, 일곱 번째 기사 켄트릭, 아홉 번째 기사 단테.

과거의 그들은 눈부시게 강했었다.

이제 막 황제의 눈에 띄었을 무렵의 자신은 감히 그들과 눈조차 맞추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15년도 더 전의 일이다.

지난 세월 동안 아스모펠은 마법과 약물에 절어있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제국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그들 모두 전성기 시절의 실력을 상실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설령 전성기 시절의 실력을 되찾았거나 그 이상으로 발전했어도 문제는 없다.

카일은 압도적으로 강해졌으니까.

전 황제의 비호 아래 노력해서 적기사를 넘어서는 ‘기둥’이 되었고, 최근에는 무신 제라툴에게 선택 받아 각성을 맞이했다.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가 봤을 때 이 불청객들 중에서 경계해야할 상대는 단 한 명,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녀조차도 전설이 된지 몇 해 되지 않아 아직 완숙하지 못했다.

이들을 상대로 긴장할 필요 따위, 전혀 없는 셈이다.

“아스모펠.”

한참을 웃던 카일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네놈의 인성은 예전부터 최악이었지. 사람을 전기뱀장어라고 부르질 않나, 열등감에 친구 피아로를 배신하고 누명을 씌우질 않나. 하지만 아무리 네놈이라도 이렇게까지 염치가 없을 줄은 몰랐다. 네놈으로 말미암아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가족을 잃은 옛 동료들을 이제와 다시 불러 모을 줄이야. 나였다면 미안해서라도 그들과 다시 재회할 생각은 꿈에도 못 꿨을 텐데 말이지.”

카일은 예전부터 아스모펠이 싫었다.

내가 아직 황궁의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을 무렵.

두렵고 위축되어 숨죽여 지내는 내게, 놈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며 전기뱀장어라고 지껄여왔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낄낄 비웃는 바람에 무척 불쾌하고 민망했던 기억은 여전히 카일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카일은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 앞길을 가로막은 놈을 문답무용으로 죽이기보다는 한껏 조롱하고 비웃어주었다.

한데 아스모펠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화를 내거나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저 계속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내가 저지른 죄이기에 내가 책임지고자 재회했다. 내게는 이들을 만나야할 의무가 있었어. 그리고 옛날의 내가 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은....”

아스모펠의 설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자작-!

번개 같은 전류가 아스모펠이 섰던 자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고자 도약한 아스모펠의 시선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지상의 카일이 말해왔다.

“시시해졌다. 너희는 선택해라. 이대로 떠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내 손에 죽을 것인지.”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이곳은 그리드 전하께서 지킨 땅. 버리고 떠나지도, 네게 죽지도 않을 것이다.”

“좋다. 그럼 어디 살아봐라.”

스파아앗-!

카일을 중심으로 전류의 파동이 발생했다.

일대의 엘프들을 마비시켰던 대단위 마법이다.

전기란, 카일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고유한 속성.

유년기와 청년기의 카일은 남들과 다른 자신의 특성이 부끄럽고 두려웠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신의 힘을 완벽히 통제하고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쥬앙데르크라는 기연, 본인의 노력, 무신 제라툴의 가호 아래 비로소 그는 완전체가 된 것이다.

[물리적인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1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5초 동안 마비됩니다.]

“윽....!”

메르세데스, 아스모펠, 아멜다, 켄트릭, 단테, 그리고 레쉬와 엘프들.

카일이 ‘적’으로 인식하는 대상들을 관통한 전류의 파동이 무서운 효과를 발생시켰다.

방패를 들어 막아도 무의미하게 감전 된 레쉬가 파르르, 경련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떨리는 시선이 메르세데스 일행에게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메르세데스 일행이 각자 쏘아낸 검기에 난도질당하는 전류의 파동을.

“시시하군.”

케트릭이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를 상대로 잡기를 쓰다니, 진심으로 우리를 퇴물로 보나보군.”

아멜다도 뺨을 부풀렸다.

“맞아, 맞아! 그동안 우리가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발악을 해왔는데!”

단테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겪어온 역경을 조롱하지 마라.”

“.....!”

레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명의 기사가 전광석화와 같이 이동한다 싶더니 어느새 카일의 주변으로 접근,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속도와 예리함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불리는 검은 발 기사단의 단장급이었다.

쐐애애애액-!

아멜다의 송곳 같은 단도 두 자루가 카일을 찔렀고, 카일이 발출하는 전류가 그것의 도달을 막아냈다.

꽈앙-!!

넓은 철판처럼 생긴 케트릭의 대도가 카일의 정수리에 꽂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카일이 땅을 차자 솟구쳐 올라온 바위덩어리가 대도의 경로를 차단했다.

콰작!

땅을 참과 동시에 몸을 띄우는 카일의 가슴을 단테의 메이스가 스쳤다.

“아....”

레쉬는 물론이고 검은 발 기사단 전원 넋을 잃었다.

1초 사이에 수차례의 공방을 펼치는 카일과 솔로 넘버나이트들의 격전은 그들의 상식 수준 밖이었으니 감탄조차 못하는 것이다.

퍼펑-! 콰콰콰쾅!!

공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전류를 무기처럼, 갑옷처럼 다루며 계속 물러나는 카일을 세 명의 기사가 바짝 추적하며 몰아붙이는 형세였다.

‘몰라볼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타고난 속성에 의지할 뿐인 전투방법으로는.’

‘수십 년 동안 생사를 넘어온 우리의 경험을 이길 수 없다.’

세 명의 기사가 승산을 엿봤다.

카일은 모든 상황에 전류로 대처하고 있었고 검술 등의 무술은 일체 구사하지 않았으니까.

전류를 수족처럼 부린다면, 그것을 베어내면 그만이다.

서걱-!

츠카카칵-!

머리 아홉 개 달린 괴물처럼 갈라진 채 날뛰는 전류들을 세 명의 기사가 일제히 베어버렸다.

날카로운 세 개의 검기가 허공을 수놓자 갈기갈기 찢겨나간 전류의 잔류들이 그 주변을 맴돈다.

카일은 노출되었고, 그 틈을 놓칠 기사들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형태와 궤도를 지닌 기사들의 무기가 카일의 급소에 꽂혔다.

아니, 꽂히는 듯 보였다.

“흥.”

콧방귀 뀐 카일의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혀지더니 급기야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내려가자 기사들의 공격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카일의 주먹은 마침 자신의 코앞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단테의 가슴을 정확히 노리고 꽂혀 들어갔다.

이때, 흩어졌던 전류들이 다시금 카일의 주먹에 응집되어 있었다.

퍼어어어어엉-!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피를 한 움큼 토한 단테가 기세를 잃고 땅에 처박혔다.

“제법....!”

이를 악 문 아멜다가 카일의 양쪽 허벅지에 단도를 꽂았으나,

파지직-!

전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더니 그녀의 작은 몸을 그대로 허공에 날려버렸다.

틈을 노리고 쇄도해왔던 페트릭의 대도는 찰싹! 손뼉을 마주치는 카일의 양손에 붙잡혀 멈춰버렸다.

세 기사들의 예상과 달랐다.

카일은 단지 자신의 속성을 단련하고 강화시켜왔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수준의 체술까지 습득하고 있었다.

그는 무신의 추종자였으니 당연하다.

“저런 괴물일 줄이야....”

과연 공작 이상의 실력자답다.

어쩌면 ‘대륙 최강’이라는 수식언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궁극의 실력자가 레쉬를 위축시켰다.

‘변하는 건 없다.’

검은 발 기사단은 예정대로 엘프들을 학살하게 될 것이다....

레쉬가 절망하는 그때였다.

“피어나라.”

격랑에 휩쓸린 숲에 아스모펠의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스파아아아아앗-

커다란 꽃 봉우리가 카일의 몸 위로 떠올랐다.

투명하고 붉은 봉우리였다.

검기로 이루어진.

“....!”

기고만장하던 카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를 악 무는 그의 코와 귀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이진 않겠다.”

말하며, 화검 아스모펠이 착검하자.

퍼어어어어엉-!!

카일의 몸 위에 떠올랐던 봉우리가 만개하며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후두둑, 피가 숲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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