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8화
탁.... 탁탁탁.
설렘과 흥분 탓에 손이 벌벌 떨린다.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눌러온 캡슐 조작 버튼을 누르기 힘들 정도다.
딸칵.
1분간의 방황 끝에 자리 잡는 손가락.
치이이이익─ SF영화의 효과음을 연상시키는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뚜껑이 열렸다.
그것은 안식처.
지옥보다 못한 현실로부터 유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루나.....”
아그너스가 휘청, 쓰러지듯이 캡슐에 앉았다.
‘곧.... 이제 곧....’
전날, 2회 연속 사망으로 강제 로그아웃 당했던 아그너스.
그가 밤새 잠들지 못한 이유는 격한 환희와 감동 때문이었다.
연인과의 재회.
그 유일한 염원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
‘....이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너를 지킨다.
공허한 다짐과 함께, 아그너스의 의식은 Satisfy로 전송됐다.
지옥의 심처에서 깨어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드디어 시작하는 것이냐?
옥좌에 기대어 앉은 바알이었다.
새카만 그늘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아그너스는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놈은 웃고 있다.
나를 비웃는 중이다.
조롱하고 경멸할 준비가, 놈은 이미 되어있었다.
알면서도.
“사자(死者) 창조.”
아그너스는 스킬을 전개했다.
그것은 그리드의 아이템 창조, 크라우젤의 검술 창조와 같은 궁극의 스킬.
아그너스는 시스템을 상대로 여러 질의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급기야.
“나는.... 나는 루나 카롤린을.....”
꾸욱....
연인의 초상을 쥔 아그너스의 메마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시야가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답은 ‘부활시킨다.’가 아닌, ‘만든다.’였으니까.
그래, 시스템은 계속해서 알려주고 있었다.
너는 옛 연인을 부활시키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옛 연인의 모습을 빌렸을 뿐인 시체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네가 만들 시체에는 그 어떤 기억도, 추억도 없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차가울 것이다.
시체의 몸속에 흐르는 것은 붉고 뜨거운 피가 아닌 썩은 오물일 것이며, 시체의 마음에서 순환하는 것은 너에 대한 애정이 아닌 증오일 것이다.
명심해라.
둘은, 다르다.
경고에 가까운 가르침들이 아그너스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나는....”
“루나 카롤린을....”
“....만들겠다.”
힘겹게 말을 잇는 아그너스.
그의 대답과 함께 기적은 발생했다.
제단 위에 놓여있던 생명의 돌과 다크 엘프의 시신, 그리고 온갖 것의 피와 뼈가 소용돌이치며 하나로 합쳐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검은 빛이 폭사한다.
죽음이 태어난다.
“아.... 아아아....”
아그너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성(理性)이 암전됐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 연인과 꼭 닮은 사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루나....”
“.....”
[사자 창조의 재료 중에 변질 된 물품이 있었습니다.]
[창조한 사자의 등급이 기준보다 낮게 책정됩니다.]
[당신이 창조한 사자, ‘루나 카롤린’의 등급은 레어입니다.]
[낮은 등급 판정으로 인해, ‘루나 카롤린’은 형편없는 지적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낮은 등급 판정으로 인해, ‘루나 카롤린’은 쉽게 손상되는 육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온갖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 같이 불쾌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개의치 않았다.
‘나의 루나’는 세계에서 가장 소중하니까.
아아, 어찌 그녀에게 가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정말로 쉽게 도망치는군.
옥좌 위 바알이 음침하게 웃었다.
***
소름끼칠 정도로 기괴하고 은밀한 촉수들이 땅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단풍이 떨어진다 싶더니 폭발한다.
지독한 악취를 내뿜는 꽃들이 여러 감각을 마비시킨다.
“촉수에게 사이좋게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산개해! 산개하라고!”
“하지만 화살비를 막으려면 뭉쳐야....!”
뇌신 카일의 명령으로 세계수의 숲을 침략한 검은 발 기사단.
그들은 숲의 초입부터 위기를 겪었다.
듣도 보도 못한 식물들에게 행군을 방해받는 동시에 수백 명 엘프들이 숨어 쏘는 화살 세례를 막아내야 했으니 숨 쉴 틈도 없이 방패와 검을 휘둘러야했다.
“허억.... 허억....”
말단에 불과한 레쉬는 벌써 큰 중상을 입고 있었다.
‘하이랭커’라는 구분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것.
그리드와 코크의 도움 덕분에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레벨이 급격히 상승, 어느새 367레벨을 코앞에 둔 그였지만 이곳에선 하수에 불과했다.
하늘을 전부 가릴 정도로 울창한 거목 위에 숨은 채 화살을 쏘는 저 엘프들조차도 대부분 레쉬와 레벨이 비슷하거나 더 위일 정도였다.
‘본대의 수준은 다르다 이건가. 이쯤 되면 카일도 당황하고 있겠군.’
눈을 노리고 날아온 화살 한 발을 견갑으로 간신히 막아낸 레쉬가 주위를 살폈다.
방어에만 급급한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듀란달 황자가 총애하는 실력자들조차도 이상적인 요새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세계수의 숲에서는 무력했다.
‘이건 못 뚫어.’
숲 일대를 빙 둘러싸고 있는 가시 넝쿨은 해자요, 진격로를 차단하는 수풀들은 바리케이드, 높이 솟은 거목들은 수천 년의 세월이 빚어낸 성벽이다.
성벽 사이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맹수들은 몬스터보다 몸집이 더 컸고,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엘프들은 하나 같이 명사수였으니 누가 감히 이곳을 무력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
‘전 황제들은 엘프족을 이곳에 가둬놨던 게 아니야.’
침범하지 못했다, 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적합하다.
천하의 적기사단조차도 이곳에 발을 들인다는 게 자살행위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깨닫는 레쉬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쌤통이구나, 카일.’
단지 무력으로 짓밟으면 된다는 너의 판단은 어리석은 오판이었다.
이들은 네게 무참히 살해당한 선임 기사보다 더 강하고 까다로운 상대다.
대화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 너는 일벌백계 받을 것이다.
듀란달 황자가 너의 실패를 통해 배우고 야욕을 버릴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이 올바르게 흘러갈 것이다.
우리와 카일이 실패하고 엘프들의 저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
다른 왕국들도 더 이상 엘프를 좌시하지 못하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진정한 화합을 이루리라.
‘정의’를 수호하고자 기사가 된 레쉬는 그렇게 믿었고, 바랐다.
앞으로 내가 베어야할 적은 오직 흉포한 악의 무리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저 아름답고 가여운 엘프들과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채앵-!
레쉬는 엘프들의 화살에 목숨을 내어주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칼과 방패를 휘두르며 버텼다.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어찌됐든, 그는 끝까지 살아남을 각오였다.
그릇된 무력을 휘두르는 카일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최대한 두 눈에 담아야했으니까.
순간.
콰지직-!
전류의 줄기가 레쉬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더니 거목 위에서 폭발했다.
“악!”
짧은 단말마와 함께 세 명의 엘프가 후두둑, 떨어져 죽는다.
“....?!”
뒤를 돌아 본 레쉬가 깜짝 놀랐다.
후위에 선 카일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견고한 요새와 같은 숲의 저력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힘을 아껴두고 싶었지만,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파치직!
카일의 전신으로부터 전류가 방출되었다.
마법왕 골드히트의 대마법을 연상시키는 전류의 파도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숲 일대를 한 번 관통했다.
그러자.
툭!
투두두두두둑!
기사들과 얽힌 채 싸우던 짐승들, 기괴한 촉수를 휘두르던 식물들, 거목 위에 숨은 채 화살을 쏘던 엘프들 모두 감전되어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대단위 광역 스킬이 집단 마비 사태를 유발한 것이다.
그리드가 소환한 청룡의 낙뢰 세례를 연상시키는. 아니, 하늘로부터 내리쳤던 그것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뇌전의 파동이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모양새가 아침녘의 하루살이들을 보는 것 같지 않나?”
거목에서 추락한 수백 명의 엘프들을 비웃은 카일이 멍하니 선 기사들을 재촉했다.
“마비에서 풀리기 전에 사살하는 편이 쉬울 텐데?”
“크음....”
기사들은 망설이면서도 쓰러진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기사 된 도리로서, 저항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검을 꽂는다는 것은 영 꺼림칙한 일이었으나.
‘이들은 적.’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전쟁에서 도리를 논하는 건 우습다.
기사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쓰러진 엘프들의 독기어린 시선을 애써 외면한 그들이 검을 역수로 쥐기 시작했다.
학살의 서막이 오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
“기사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야한다!”
누군가가 낡은 기사도의 한 구절을 외쳤다.
“기사는, 무저항인 자를 참살해선 안 된다! 그것은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단 기사 레쉬의 소행이었다.
“.....”
기사도의 구절 중에는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 많다.
폼생폼사.
기사도는 폼에 죽고 폼에 사는 기사들이 만든 이상(理想)이니만큼 비효율과 비현실의 극치가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람들이 기사도를 고리타분하다며 비웃는 이유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이 기사가 된 이유는 그 기사도에 반해서였다.
“.....”
레쉬의 외침이 수백 명 기사들의 행동을 정지시켰다.
찰나.
1초조차 못되는 찰나였다.
푹-!
푸콱!!
서걱!!
“꺄악!”
“컥!”
“윽....”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기사들이 일제히 살육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항하지 못하는 엘프들을 찌르고, 베며 확실하게 죽여 나갔다.
기사가 되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에게는 이상보다 소중한 현실이 생겼으니까.
이상 따위는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체험한 바 있다.
그들에게도 지켜야할 가족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주인의 명령은 도리보다 위다.”
기사도의 마지막 구절이 그들에게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아.....”
교차하는 단말마.
나무와 땅을 적시는 붉은 피.
거대한 숲을 잠식해나가는 눈물과 증오.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레쉬는 그저 멍한 얼굴로 지켜보았고.
“레쉬! 정신 차려라!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기사들은 레쉬의 손에 강제로 검을 쥐었다.
꽉 막힌 녀석.
처음 본 그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의를 외치는 막내 기사가 그들은 싫지 않았다. 그대로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했다.
레쉬에게 살육을 강요했다.
레쉬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저 분노한 카일에게 처형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레쉬! 어서!”
카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레쉬의 뒤통수를 꿰뚫듯 노려보고 있다.
초조해진 기사들이 레쉬를 재촉했지만 레쉬는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그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씨발, 내가 왜 여기서 이딴 짓을 하고 있어야하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Satisfy를 시작한 계기는 어려서부터 동경해온 영화 속 기사를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Satisfy는 게임이다.
게임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만들어진 수단이다.
근데 왜.
왜 매번 이렇게 X 같은 일을 겪어야하는 거지?
‘그냥 접을까?’
꽈드득, 레쉬의 이가 갈림과 동시에 카일이 레쉬의 등 뒤에 다가와 섰다.
전류를 머금은 카일의 손이 레쉬의 목을 겨눴다.
“이단 다음에는 반역자인가. 개혁이 필요한 조직이군.”
“닥쳐!!”
몇 년 동안 나를 챙겨줬던 선임 기사, 게온.
카일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한 그의 모습을 떠올린 레쉬가 억눌러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물론 무의미했다.
공작을 초월한 것이 분명하다, 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뇌신 카일이 고작 일개 플레이어의 공격을 허용할 리 없었다.
레쉬의 검을 가볍게 피해낸 카일이 전류를 방출했다.
“약함은, 죄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카일은 무신의 추종자이다.
그는 힘의 논리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읊었고, 레쉬는 통감했다.
‘그리드 님이었다면 이놈의 재수 없는 면상을 후려쳐줬을 수도....’
본래, 끝까지 이어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카일은 이미 전류를 쏘았고, 그것에 관통당한 레쉬는 진즉에 죽었어야 했다.
“....?”
내가 살아있다고?
당황한 레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뒷모습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흩날리는 여성.
철판을 몇 겹이나 덧대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와 커다란 방패, 그리고 검과 엄숙한 자세가 알려주고 있다.
그녀 또한 기사다.
심지어 이 자리 누구보다도 고결한 기사.
“메르세데스....님?”
“그대의 신념, 훌륭했다.”
적막으로 물든 숲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류를 방패로 흘려보낸 전설의 기사가 백호의 기운이 담긴 검을 휘두르자 카일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베여서 떨어져 내렸다.
“네놈....!?”
수치심에 도끼눈 뜬 카일이 반격하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이제는 골동품이 된 2세대 전 레드 아머.
그것을 무장한 기사 3명과 푸른 망토의 금발 사내가 메르세데스의 좌우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뭐야, 뭐야? 근처를 지나는 김에 세계수한테 인사한다고 들렀던 거잖아? 근데 왜 적이 있어?”
“꼬맹이 메르세데스. 네가 우리를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우연입니다.”
레드 아머의 기사들은 전장 한가운데에 난입해 놓고도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기색 따위 조금도 없었다.
도리어 카일이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그야 그럴 것이.
“전기뱀장어 카일인가. 못 본 새 많이 컸군.”
“아스모펠....!”
이들은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2대 전 적기사단.
그중에서도 솔로 넘버 나이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