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7화
“아, 진짜 더럽게 짜증나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 라는 생각을, 그리드는 금방 관뒀다.
그리드가 애용하는 혜성그룹의 다이아몬드 캡슐은 이상적인 체온유지를 도왔으니까.
대한민국이 36도의 폭염을 맞이했을지언정 Satisfy에 접속해 있는 그리드의 체감온도는 완벽했고 불쾌지수는 0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계속 짜증이 치밀고 불쾌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 욕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가우스 왕국을 다녀온 후로 쭉 이 상태다.
머리가 띵한 것이 귀에 자꾸 이명이 울리는 듯한 기분도 든다.
왜?
도대체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던 그리드는 이 분노의 원인이 유페미나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젠장.”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스컹크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템을 제작하려던 그리드가 결국 관두고 대장간을 벗어났다. 그리고 유페미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야.
2시간 전.
그러니까 아직 라우엘을 만나기 전.
라인하르트로 귀환한 그리드는 가장 먼저 유페미나에게 연락했었다.
괜찮느냐고.
그리드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고 유페미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걱정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멋대로 착각한 유페미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아이템 떨군 것도 없고, 경험치야 금방 복구할 수 있어요. 당신에 비하면 아직 전 저렙이라서 경험치가 잘....
-너 괜찮다는 이야긴 아까 들었으니까 됐고.
그리드가 유페미나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분노로부터 비롯된 떨림이다.
-도무지 못 참겠어서 좀 따져야겠다.
-....?
-너, 강해져서 나를 돕겠다고 자리를 비웠던 거잖아?
-.....
-그거 거짓말이었어? 사실은 아그너스를 쫓아다닐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고, 강해지기는커녕 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었던 거야?
-그리드.
유페미나가 매우 놀랐다.
늘 동료를 배려하고 봉사하는 그리드.
동료의 선택과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고 이해해줬던 그가 갑자기 자신을 비꼬고 짜증을 부리자 당황스러웠다.
-아그너스가 그렇게 좋냐? 반하기라도 했어?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불쌍하다는 핑계도 한두 번이지!
-.....
-걔가 너 없으면 못사는 너희 집 애완견이냐? 단순한 동정심만으로 생판 남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는 태도가 정상이야? 너는 이미 그 새끼를 몇 번이나 도와줬어! 그 새끼가 아이린과 로드를 도와준 바람에 나도 몇 번이나 그 새끼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은혜를 갚았다고! 하지만 돌아온 결과가 뭐야? 그 새끼가 널 죽였어! 죽였다고!
-저를 죽인 건 아그너스가 아니라 아그너스에게 빙의 된 다른 존재....
-닥쳐!! 매번 그렇게 마음을 이해받지 못하고 배신만 당하는 주제에 왜 자꾸 녀석을 챙기는 거야? 네가 걔 가족이야? 애인이야? 아니면 애인이 되고 싶은 거냐?
-.....
-....!
분노를 주체 못하고 소리치던 그리드가 문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동료, 친구, 가족.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 그들에게 나는 늘 감사와 애정을 느껴왔다.
유페미나도 그중 하나다.
그녀가 없었다면 수인족을 얻지도 못했고 템빨국 건국 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승전을 거두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는, 앞으로 영원토록 유페미나에게 감사하고 배려할 거라고 무의식중에 다짐해왔다.
한데 그녀에게 이토록 분노하며 심하게 지껄이다니?
내가 미쳤나?
....아니, 미친 게 아니다.
이건 아주 저열한 감정이다.
질투.
내 동료가 나보다 타인을 챙기는 것 같아 속 좁은 마음에 투정을 부리는 거다.
감사와 다짐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젠장.’
자기혐오를 느끼며 얼굴을 감싸 쥐는 그리드의 귓가로 유페미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하....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저는 단지 아그너스가 불쌍하고 가엽다는 이유로 그에게 집착했고 정작 소중한 당신은 배려하지 못했죠. 아그너스가 몇 번이나 당신과 대적하고 피해를 입힌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리드 당신은 워낙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니까 당연히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했어요.
-.....
-제 이기심에 몇 번이나 실망하고 화가 나셨죠? 미안해요. 당신은 화내도 되요. 아니, 화내야해요.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유페미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아닌 슬픔으로부터 비롯된 떨림이었다.
그녀는 그리드에게 정말로 너무 미안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멋대로 행동해온 나를 묵묵히 지켜봐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그에게 나는 끝까지 멋대로 기대왔다.
그는 강하니까.
마음이 넓으니까.
언제까지고 당연히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으며.
‘멋대로 구는 나를 볼 때마다 얼마나 분했을까....’
유페미나의 마음이 찌릿찌릿 저려왔다.
그녀는 자각했다.
그리드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혹하고 이기적인 잣대를 겨눠왔는지.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그리드가 얼마나 인내하고 희생해왔는지.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
-감정을 희생하고, 상처를 감추며 늘 웃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고 솔직하게 화내줘서 고마워요.
솔직한 감정의 표출은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유페미나는 기뻤다.
-이제야 당신에게 친구로 인정받은 것 같아요.
-....알겠지만 나는 늘 너를 친구로 생각해왔어. 하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쿡쿡.... 그거 알아요?
-뭘?
-당신과 대화할 때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든든하고 포근해서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앞으로는 아닐 거야. 마음에 안 드는 일 생길 때마다 바로바로 솔직하게 화내거나 혼낼 테니까.
-좋아요. 회초리라도 들고 다니세요. 언제라도 엉덩이 내밀어 드릴 테니까.
-참나. 누굴 야만인으로 아나.
묵은 때가 벗겨지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 깊은 곳에 묵혀뒀던 서운함이 씻겨나가며 마음과 정신이 청량해진다.
때때론 솔직한 표현이 필요한 거구나....
상대가 소중하답시고 무조건 배려하고 좋은 말만 해서는 혼자 지치게 마련이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의 입가에 상쾌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아.’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불쾌하고 답답한 마음에 굳었던 머리가 유연하게 풀어지자 자신이 몇 가지 사실을 간과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라우엘!!
-....크크큭, 과연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공포를 떨쳤던 존재답군요. 목청이 얼마나 크신지 외침만으로 제 고막에 붉은 블러드가 흘러내리.....
-아그너스가 다크 엘프의 시신을 챙겨갔었어.
-....흠. 아그너스의 목적은 처음부터 다크 엘프였다 이거군요.
-그래, 이유가 뭘 것 같아?
-이유야 뻔하죠.
생명의 돌 사건 때 밝혀진 바 있다.
아그너스의 행동 목적은 단 하나.
옛 연인의 부활이다.
말인 즉.
-다크 엘프의 시신을 ‘옛 연인과 닮은 인형’의 ‘제작’ 재료로 삼으려는 거군요.
-망할....!
아그너스가 가져간 다크 엘프의 시체는 진짜가 아니다.
의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그너스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줄 수 없다.
분명 다른 존재로 탄생할 것이다.
기껏 부활시킨 연인이 자신의 예상과 다른 괴물이라면....?
‘폭주한다.’
그리드는 아그너스의 광기를 몇 번이고 목도했었다.
그것이 과연 진짜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종종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상인은 아니었다.
폭주한 아그너스가 ‘가짜 다크 엘프의 시신’을 획득한 장소에 있던 인물이 그리드와 유페미나였음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괜한 원한의 화살을 돌릴 경우 템빨국에 어떤 위해를 끼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리드가 판단했다.
-라우엘, 아무래도 아그너스에게 빙의했던 악마의 정체가 뭔지 정확히 파악해야할 것 같다.
-아모락트일 거라면서요?
-그냥 대충 아는 이름을 지껄였을 뿐이야. 알잖아?
-네, 아그너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짜증나고, 불쾌하고, 귀찮다는 눈치셨으니 생각 자체도 제대로 안 해보셨겠죠.
-너무 한심한가?
-아니요. 싫어하는 상대를 논할 때면 때때로 흥분할 수도 있죠, 뭐. 저도 옆집 고양이를 떠올릴 때면 종종 이성을 잃곤 합니다.
-옆집 고양이....?
-그 녀석이 산책을 나올 때마다 꼭 저희 집 정원에 똥을 싸지르고 가거든요. 처음에는 인분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양이 푸짐하고 냄새도 심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방향제 한 통을 다 뿌려 봐도, 그 자리 흙을 아예 한 번 들어 엎어 봐도 소용이 없더군요.
-그, 그렇군.
-아, 그리고 아그너스에게 빙의했던 악마의 정체는 바알이 맞습니다.
-어?
-아무래도 전하께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기에, 그 후 스틱세이에게 찾아가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스틱세이는 그 악마의 정체가 바알일 거라고 확신하더군요.
-확신?
-네, 단지 정황증거를 놓고 추측하는 게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가진 확신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르길, ‘지옥 옥좌의 주인’임을 자처할 수 있는 존재는 대악마 중에서도 바알이 유일하다고 하더군요.
-....놀랍군. 바알이라기에는 포스가 너무 없었는데....
-다음에 만날 바알은 다를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몸에 강림하는 바알은 자아의 편린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자아의 편린?
-네, 아그너스에게 강림했던 바알은 단지 힘을 제약당한 바알이 아니라, 바알의 한 단면에 불과했던 거죠. 다음에 강림하는 바알의 자아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말투와 성격도 완전히 바뀔지 모릅니다.
-.....
-어쨌든 아그너스는 무서운 힘을 갖게 됐어요. 어쩌면 우리는 그자가 제대로 된 인형을 제작할 수 있게끔 도와줘야할 수도 있겠군요.
라우엘은 아그너스의 폭주를 막아야한다는 결론까지 이미 도달한 상태였다.
그저 감탄밖에 못하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안심시켰다.
-제가 알아서 손을 쓰도록 할테니 전하께서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일에 집중해주십시오.
마침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라우엘.
***
흑기사단과 적기사단이 제국 최강의 기사단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제국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기사단 중 99프로는 흑기사단 선에서 정리될지 몰라도 드물게 예외가 존재했다.
그 예외가 바로 듀란달 황자의 검은 발 기사단이다.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기울여 육성한 최고의 기사단.
자신을 뽐내길 즐기는 듀란달 황자가 입이 간지러운 것을 참고 ‘적당한 친위대’쯤으로 세간에 인식시켜온 조직.
그 안에선 하이 랭커 레쉬도 말단에 불과했다.
‘....훈장 얻기 참 쉽군.’
레쉬와 검은 발 기사단은 벌써 7개의 숲을 순회하고 있었다.
클리어할 때마다 무공 훈장을 획득할 수 있는 <숲의 탈환>퀘스트가 벌써 3단계로 연계된 상태였다.
숲의 탈환 과정이 지극히 수월하다는 뜻이다.
각 숲을 지키고 있는 고작 10명 내외의 엘프와 수백 마리 짐승들로는 검은 발 기사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
선임기사와 함께 도망치는 엘프를 추적, 잿빛으로 산화시킨 레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능력치를 +2 상승시켜주는 무공 훈장을 벌써 2개나 얻고도 그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기쁠 리 없다.
제국의 해방 선언을 믿고 각지의 숲으로 진출했던 엘프들.
수백 년 동안 인간에게 시달리다가 드디어 자연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게 됐던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제국의 기사들에게 학살당하고 있다.
그들 입장에선 또 다시 배신을 겪게 된 것이다.
그동안 진행해온 여러 가지 퀘스트를 통해 엘프의 역사를 알고 있는 레쉬는 가슴이 무거웠다. 자신이 지독한 악당이 된 기분이었고 손이 오물로 더럽혀진 느낌이 들었다.
“인류를 위한 성전이다.”
레쉬의 어두운 표정을 읽은 선임 기사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레쉬는 조금의 위안도 얻지 못했다.
이 학살은 성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오직 듀란달 황자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참극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숲을 점거한 엘프들의 행동부터가 잘못되긴 했어. 하지만 그들은 대화를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숲을 점거한 이유를 알고 싶다면.
숲을 다시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우리에게 대화를 요청하라.
엘프가 앞뒤 없는 바보들이 아닌 이상에야,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 이와 같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엘프에게 숲을 빼앗긴 왕국들은 엘프와 대화할 시도 자체를 안 했다.
이종족 따위에게 숲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것을 되찾기 위해 대화를 한다?
수치라고 생각했겠지.
“....?”
자괴감에 빠진 채 수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레쉬가 두 귀를 의심했다.
전 다섯 기둥 카일.
무신의 유적지를 다녀온 뒤 전광을 내뿜는다 하여 듀란달에게 ‘뇌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헛소리를 지껄인 까닭이었다.
“이런 소모전을 되풀이해봐야 끝이 없다. 어차피 엘프들은 대륙 전역의 숲으로 흩어진 바. 지금쯤 텅텅 비어있을 세계수의 숲을 점령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군.”
‘미친 건가?’
물을 삼키는 것도 잊고 주르륵, 흘리는 레쉬를 대신해서 선임 기사가 반발했다.
“카일 공, 세계수의 숲은 이름그대로 세계수가 자리 잡고 있는 성역입니다. 그곳에 창칼을 차고 들어가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도.... 컥.”
레쉬는 선임 기사를 동경해왔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긴 하지만 그만큼 충직해서 레쉬가 이상으로 그려왔던 기사 그 자체였던 인물이었다.
한데 그가 목이 잘려 죽었다.
“....?”
갑자기?
상황을 인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레쉬의 시야에 선임 기사의 머리를 움켜쥔 카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눈의 혈관에 붉은 피 대신 전류가 흐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도무지 인간 같지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천상의 신이 강림한 듯했고, 나쁘게 말하면 지옥의 악마가 기어 올라온 듯했다.
“황자 전하의 기사 중에 이단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
“제국이 인정하는 신은 빛의 여신 레베카와 무신 제라툴 등 아스가르드의 신들뿐이다. 세계수? 고작 나무 따위를 신성하게 여기는 건 어떤 이단의 발상이지?”
“.....”
“듀란달 황자께서는 내게 너희를 통솔할 권한을 주셨다.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르면 된다. 가자. 내가 세계수의 숲의 위치를 알고 있다.”
이 순간 레쉬는 확신했다.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듀란달이 황좌에 오른다면 그의 오른팔이 될 카일의 폭정을 제국은 감당할 수 없다.
‘만에 하나라도 듀란달을 지지하는 플레이어가 발생하지 않게끔 촬영을 해놔야겠군....’
눈물로 젖은 레쉬의 시야가 목격하는 모든 광경이 동영상으로 녹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