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5화
어눌하고 느린 말투.
근육 하나 없이 말랑한 살.
조금만 걸어도 가빠지는 숨.
개미 한 마리조차 짓밟지 못하는 유약한 심성.
사람들은 나의 모든 면을 싫어했다.
한심하고 답답하다며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늘 죄의식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잘못 된 줄 알았다.
내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녀를 만났다.
“네가 잘못된 게 아니야.”
그녀는 말해주었다.
너는 느린 게 아니라 신중한 거라고.
너는 약한 게 아니라 남들과 다를 뿐이라고.
네가 개미를 해치지 못하는 이유는 배려와 존중을 알기 때문이라고.
“너는 죄가 없어. 너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못된 거야.”
그녀는 나의 등대였다.
그녀는 나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나는 그녀의 품에 의지했고, 그녀는 나를 지켜주었다.
짐승 같은 놈들이 그녀를 욕보일 때도.
제발 그만 두라고 울부짖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보다 백 배, 천 배.
아니, 억만 배는 더 두렵고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그녀는....
“아....”
이번에도 닿지 않는다.
창가에서 몸을 날리던 그녀를 붙잡지 못했던 내 팔과 다리는 지금도 여전히 느렸다.
슬픈 표정으로 미안하다 말하던 그녀에게 나야말로 미안하다고 외치지 못했던 내 둔한 입은 이번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푸우욱─
내 마음처럼 새카만 화살은 이미 유페미나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의 모습은 창밖으로 떨어지던 옛 연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있었다.
“아아....!”
알고 있다.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과 달라서 하찮다.
애초에 그녀들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한데.
한데 왜 나는 이토록....
“크아아아아악!!”
쩌렁쩌렁!!
아그너스의 절규가 불타는 숲에 메아리쳤다.
쓰러지는 유페미나를 통해서 옛 연인의 최후를 떠올린 그가 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인간은.... 용서 못 한다.”
유페미나에게 활을 쏜 장본인.
그리고 아그너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존재, 다크 엘프 베니야루의 음성이 아그너스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네놈....! 네노옴!!”
증오로 물든 아그너스의 시선이 베니야루에게 꽂힌다.
이 순간 아그너스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왜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왜 그녀에게 여지를 주었는가.
나 같은 쓰레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왜.
나는 역병이다.
누구도 내게 가까이 다가와선 안 된다.
“죽인다!!”
짐승처럼 포효하는 아그너스의 신형이 베니야루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마리로즈 일행과 지발을 연달아 상대하며 한계를 맞이한 아그너스의 상태는 평범한 플레이어보다 못했다.
느리고 무딘 그의 공격을 가뿐히 피해낸 베니야루가 화살을 쏘자 아그너스의 갈비뼈가 박살났다.
휘청!
아그너스의 볼품없는 육신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안면으로 베니야루의 단도가 쇄도해오고 있었다.
“아그너스!!”
“꺼져!!”
미간에 박힌 단도를 뽑아낸 아그너스가 엉겁결에 나서는 지발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혼자이고 싶었다.
새로운 인연 따위, 필요 없었다.
다만 옛 연인을 부활시켜 그녀에게 평생토록 속죄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붉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그는 여태껏 외면해왔던 스킬 하나를 떠올렸다.
<동화>
제1위 대악마 바알의 자아 일부를 당신의 신체에 강림시킵니다.
이때 클래스가 <대악마>로 전환되며 육체의 주도권이 바알에게 넘어갑니다.
스킬 발동 조건:새로운 계약을 맺을 것.
스킬 지속 시간:2분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인간의 목숨 3,000개를 빼앗을 때마다 초기화.
외면해올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신체의 주도권을 넘긴다는 것부터가 무척 큰 거부감이 생겼다.
세상에 어떤 등신이 자신의 신체를 타인에게 양도하겠는가? 어지간한 바보나 미친놈도 꺼려할 일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스킬 발동에 필요한 ‘계약의 내용’이 진짜 문제였다.
<앞으로 평생 매일 100명의 인간을 학살할 것. 계약 위반 시마다 레벨 1 하락.>
매일 100명의 인간을 해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상대가 강할수록 쉽게 해칠 수 없으니 하루종일 인간 사냥만 하고 다녀도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해결책은 존재했다.
상대적 약자들을 학살하면 된다.
작은 마을을 방문해 그곳을 파괴하거나 초보자 플레이어들이 모인 사냥터에 대마법 하나만 떨구면 100명의 목숨쯤이야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그너스에게는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가 없었다.
특히 죄 없는 어린아이를 해치는 일을 그는 극도로 꺼려했다.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아그너스가 동화 스킬을 외면해온 결정적인 이유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이성을 잃은 아그너스는 알량한 양심과 같잖은 가식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다.
나는 약하다는 이유로 모든 걸 잃지 않았던가.
최소한의 존엄마저도 짓밟혔었다.
세상에 똑같이 갚아줄 권리가, 나에게는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각성한 아그너스가 소리쳤다.
“바알!!”
[<동화>를 전개합니다.]
[지옥의 절대군주 바알이 유쾌하게 웃습니다.]
-으응~? 뭐냐, 아그너스. 착하디착한 네가 이런 선택을 내릴 줄은 몰랐는데?
“비꼬지 마라!”
-크크큭, 비꼬려던 게 아니야. 칭찬해주려던 것이다. 아주 잘했다. 드물게 올바른 선을 내렸구나.
[바알의 자아 일부가 당신의 육신에 강림합니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
하나 같이 피처럼 붉은 먹구름이었다.
숲의 모든 식물들이 빠르게 썩어갔고 대지는 검게 오염됐다.
역한 공기가 상처 입고 쓰러져있는 유페미나는 물론이고 지발과 베니야루의 숨통마저 옥죄었다.
호흡할 때마다 밀려오는 독기가 그들의 칠공으로부터 피를 분출시켰다.
“뭣....”
갑자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혼란에 찬 유페미나와 지발의 시선이 아그너스에게 향했다.
온몸이 마기로 뒤덮인 아그너스가 보였다.
검게 물든 흰자위가 그의 차가운 금안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크큭, 크하하하하핫!!”
뿌득!
크게 웃은 아그너스.
아니, 아그너스의 육신을 통해서 강림한 바알의 자아 파편이 자신의 이마에 솟아난 뿔을 뽑아내 검처럼 쥐었다.
동시에 베니야루가 털썩, 쓰러졌다.
그녀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바알이 뽑아 손에 쥐었던 뿔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다.
“타락? 숲의 그늘에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는 것을 타락이라 할 수 있나?”
성큼.
베니야루와의 거리를 한걸음에 좁힌 바알이 조소했다. 베니야루의 머리카락을 포악하게 거머쥔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춘기 소년처럼 소심한 엘프여, 명심해 둬라. 타락한 자가 범해야할 의무는 복수와 파괴, 그리고 혼돈뿐이다.”
꽈아아앙-!
“뭐, 네게는 그 의무를 수행할 기회가 없다만.”
“.....”
바알의 주먹에 얻어맞고 거목에 처박힌 베니야루가 움찔움찔 경기를 일으켰다.
피칠갑한 채 눈이 뒤집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해서 지발은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심장에 치명상을 입고 상태이상 ‘기절’에 걸려있던 유페미나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아그너스, 진정해요! 나는 괜찮아요!”
“흐음.”
바알의 시선이 유페미나에게 돌아갔다.
“네가 그녀로구나.”
저벅. 저벅.
유페미나에게 다가온 바알이 싱긋 웃었다. 정말로 상쾌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비수로 변하고 있었다.
“같잖은 호의로 내 장난감을 종종 먹통으로 만든.”
“아그너스....?”
푸욱-!
유페미나의 가녀린 목덜미에 비수가 꽂혔다. 그녀의 푸른 눈이 빛을 잃었고, 그녀의 작은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며 바알의 품에 안겼다.
“머리가 울리니까 그만 소리쳐. 자, 자. 진정하고 기뻐하라고. 지금부터 네 꿈을 이뤄줄 테니까.”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하는 유페미나를 쓰레기처럼 내팽개친 바알이 혼잣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거목에 박힌 채 움찔거리고 있는 베니야루에게 유페미나의 피로 흠뻑 젖은 비수를 꽂아 넣으려다가 멈췄다.
흑금색의 손이 그의 안면을 덮쳐오고 있었다.
쩌엉-!!
비수가 손을 쳐냈지만 손은 3개나 더 남아있었다.
각자 검을 거머쥔 그것들이 동시에 어떤 검술을 펼쳤다.
연(聯), 살(殺), 극(極).
바알에게도 익숙한 검술이었다.
다름 아닌 전대 계약자의 성명절기였으니까.
“크하핫! 재미있게 됐군!”
누가 나타났는지 눈치 챈 바알이 크게 들떴다.
3개의 갓 핸드가 펼치는 검무를 비수 한 자루로 막아낸 그가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번쩍-!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그너스으!!”
“파그마의 후예!!”
콰르르르르르르릉!!
열망의 무아검과 바알의 비수가 충돌하며 충격파가 발생했다.
나부끼는 머리카락 틈새로 엿보이는 그리드의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가 점철돼 있었다.
“개자식!!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유페미나를!!”
그리드가 이곳에 날아온 이유는 세계수의 부탁 때문이었다.
베니야루를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한데 이곳에 도착한 그리드가 처음으로 목격한 장면은 유페미나의 죽음이었다.
내가 남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동료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X발!”
치를 떤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재차 휘둘렀다.
자신은 초월자.
플레이어. 하물며 근접전에 비교적 약한 아그너스쯤이야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한데.
채챙-! 채채채채채채챙!!
아그너스는 작은 비수 한 자루로 그리드의 공격을 모조리 쉽게 막아냈다. 중간중간 폭발하는 검은 불꽃과 붉은 뇌전마저도 마기의 장막으로 쉽사리 소멸시켰다.
‘이렇게 강해졌다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남들 역시 똑같이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리드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직 데스나이트와 리치조차 소환하지 않은 아그너스와 호각세라는 건 그리드 입장에서 납득이 안 됐다.
“흑화!”
<벤타오의 조롱>처럼 또 특별한 스킬을 얻어서 사용 중인 건가?
생각해본 그리드가 마기를 이끌어냈다.
그는 커다란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냉정한 상태였다.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내야만 중상을 입고 있는 베니야루를 구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데.
피시식....
“....?”
흑화의 영향으로 끓어오르던 마기가 거짓말처럼 소멸해버렸다.
흑화의 발동이 멈추며 스킬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바알이 웃어보였다.
“내 앞에서 마기에 의지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
“....?”
“하핫! 이래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냐? 파그마와 달리 둔한 면이 있구나.”
자꾸 뭔 개소리야?
아그너스가 연달아 헛소리를 지껄이자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가 뒤늦게 깨달았다.
하얗게 질린 피부와 길게 솟아난 송곳니. 그리고 검게 물든 흰자위.
아그너스의 생김새가 평소와 달랐다.
마치 흑화 상태의 나를 연상시키는....
[투기가 최대치에 도달하였습니다.]
“....!?”
투기가 벌써 다 찼다고?
역대 최고 속도다.
“누구냐, 너?”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불쾌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리드에게 바알이 대답해주었다.
“나는 지옥의 옥좌에 앉은 자.”
“신들과 인간의 허세를 지켜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아~주 아주 무료한 자다.”
설명은 이걸로 충분할 터.
나의 정체를 알게 된 파그마의 후예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큭큭....?”
그리드의 얼굴에 떠오를 절망을 기대한 바알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다가 굳었다.
그리드의 표정에 별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크게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왠지 모를 불쾌감에 휩싸이는 바알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그래서 네가 누군데?”
“.....”
바알은 거악 중의 거악.
시대의 주역들이 반드시 토벌하기를 꿈꾸는 최종보스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바알은 많은 영웅들을 만나왔고 그가 본 영웅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능력의 고하와 관계없이 지혜롭다는 점이었다.
여태껏 바알이 만나온 영웅들은 과연 그 시대의 주인공답게 영민했다. 한 마디 대화로 10개의 뜻을 서로 교환하는 게 가능했으니 때때로 교감마저 되었었다.
‘근데 얘는 왜....?’
너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바알이 한동안 넋이 나갔다가 아뿔싸, 낭패를 외쳤다.
“역시 파그마의 후예답군. 여태껏 본 그 어떤 영웅보다 영민하면서 동시에 비열한 것이 파그마와 꼭 닮았어.”
“....?”
“내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즉시 간파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시키다니.... 후훗, 덕분에 조금 아쉽게 됐다. 네 실력을 감상할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
자꾸 뭐라고 떠드는 거지?
어리둥절하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초월자의 감각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움직인 바알이 어느새 베니야루의 곁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을 마무리할 시간은 남아서 다행이군.”
“잠깐!!”
그리드가 다급히 검무를 밟았다.
4개의 검무를 하나로 승화시킨 절기가 순식간에 완성되어 바알을 위협했다.
하지만 이미 바알은 베니야루의 숨통을 거두고 있었다.
“하핫, 다음에 또 보자고.”
푸우욱-!!
그리드의 검이 바알의 몸통에 꽂히는 순간.
[<동화>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바알의 자아가 지옥으로 되돌아갔고 아그너스는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코앞에 직면해온 죽음.
반사적으로 벤타오의 조롱을 전개하려던 아그너스가 이내 관두고 베니야루의 시신을 챙겼다.
쏴아아아아아-
아그너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베니야루를 구하려면 어차피 한 번 죽여야한다고 했으니 이걸로 된 건....? 응?”
썩어문드러진 숲에 멍하니 남은 그리드가 중얼거리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지발을 발견한 것이었다.
지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뭐가? 아니, 잠깐.”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그랜드 마스터? 걔가 왜 여기에 있어?”
지가 숲속의 잠자는 왕자야, 뭐야?
왜 여기서 자고 있냐?
황당해서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지크프렉터에게 다가가려 하자 지발이 막아섰다.
“어차피 못 일어나니까 깨워봤자 소용없어. 그것보단 우선 피하는 게 좋을 걸? 곧 네오 적기사들이 몰려올 텐데 아무리 너라도 그들을 혼자서 감당하긴 힘들 거다.”
“응, 피아로 부르면 돼.”
“재수 없는 놈.... 어차피 때가 되면 그랜드 마스터쪽에서 먼저 너를 찾아갈 거다.”
“흠.... 너는 그랜드 마스터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거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줄 잘 섰네.”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도 적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들 기진맥진한 것을 보아 야탄교와의 전투가 쉽지 않았던 눈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바쁘기도 하고.”
귀환 주문서를 꺼낸 그리드가 그것을 미련 없이 찢어버렸다. 세계수를 만나기에 앞서서 유페미나의 상태부터 살피고 싶은 것이었다.
“무서운 놈....”
그리드가 사라지자 홀로 남은 지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비록 본체는 아니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1위 대악마 바알을 만나고도 저토록 태연한 그리드가 그는 놀랍고 신기했다.